제 603화
진혁이 눈을 깜빡이는 사이 뒷자리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김 비서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스타일리스트들이 머물고 있는 뒷방으로 사라졌다.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네요.”
미미가 생긋 웃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곧 착륙하고 내려야 하니 서둘러야 한다.
아내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준비되어 있던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야구 점퍼를 걸치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잠깐만요. 지금 뭐가 지나간 거예요? 하나도 안 보였어요.”
황미미가 황당해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말씀하신 대로 옷을 갈아입었는데요.”
진혁이 킥킥 웃었다. 미미가 손을 뻗어 진혁이 입고 있는 커플 야구 잠바를 살짝 잡아당겼다.
“아니, 너무 빠르잖아요!”
“동체 시력을 조금만 훈련하셨어도 충분히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진혁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미가 왼팔을 뻗어 팔짱을 끼었다.
항공기의 계단을 내려가며 그녀가 속삭였다.
“악어 고기 스테이크는 나름대로 꽤 괜찮대요.”
“가금류의 가슴살과 비슷하면서 조금 더 쫄깃쫄깃하죠.”
“예?”
“저희 푸드 블록 팩토리에서도 악어고기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태국의 악어 양식 농장에서 월 100마리 정도요.”
미미가 눈을 깜빡였다.
“저희도 태국에서 수입하고 있어요.”
“태국에서 해외에 악어고기를 수출할 정도로 규모가 큰 농장은 두 군데밖에 없습니다. 같은 농장에서 수입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름은 저도 확인해봐야겠는데. 태국에서 제일 큰 농장일 거예요. 20만 마리 가까이 사육하고 있대요.”
“품 쑤언룸 농장이군요. 저희도 거기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많이 수입하지는 않아요. 테마파크에 반입할 정도만 소량 구매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
“100마리 이상 대량 구매를 하면 할인이 됩니다. 저희 쪽에서 구매량을 늘리고 테마파크 쪽으로 건네도 되겠는데요?”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악어 고기 말고 다른 물품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구매팀이 푸드 블록 팩토리와 협력해서 구매할 수 있게 하고 싶은데, 어때요?”
“좋습니다. 협력할 수 있도록 저도 말해두죠.”
그녀가 이어셋을 두 번 두드리고 나서 말했다.
“왕 비서, 구매부 담당자에게 식자재 구매 내역을 정리해서 보고하라고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 ◈ ◈
당연하게도 테마파크에는 두 사람 외의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대로였다.
미화원들은 부지런히 쓰레기통을 비우러 돌아다녔고, 마스코트 직원들은 진혁과 미미의 동선을 의식해 나타났다.
“디저트 테마파크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좋았어요.”
미미는 놀이기구를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설명해 주었다.
“회전목마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까?”
이전에도 보았던 회전목마는 잘 관리되어 여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칠해진 크림이 듬뿍 올라간 찻잔과 찻주전자 모양의 마차, 그리고 월병과 팥빙수, 마카롱과 다쿠아즈, 마들렌 모양의 탈것들이 저마다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회전목‘마’라기보다는 회전하는 디저트 탈것에 가깝다.
디저트 탈것을 타고 내려오면 눈앞에 매점이 있다.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저기에 매점이 있네요?”
“월병을 타고 내리면 월병을 줘요.”
“아.”
“다른 데서는 팔지 않고 여기서만 주는 한정판 제품이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어요.”
두 사람은 관람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람차는 이전의 사고 이후 대대적인 수리와 리모델링을 거쳐 모양이 바뀌었다.
“컵케이크에서 찻잔 모양으로 바뀌었군요.”
“전체적인 구조 자체를 완전히 바꾸었거든요.”
진혁이 물었다.
“관람 차를 타고 싶으십니까?”
미미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제 식사하러 갈까요?”
그녀는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진혁은 미미와 함께 팔짱을 끼고 있었기에 아주 조금 미미가 살짝 멈추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
“무섭습니까?”
“설마요.”
그녀는 화사하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고소공포증은 원래부터 없었고 지금도 없었어요.”
진혁은 미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절대 사고 날 일이 없도록 다시 설계했고, 안전 테스트도 충분히 거쳤어요.”
목소리는 차분했고 안정되어 있었으나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진혁이 말했다.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미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제가 저기에 올라가기 싫어하는 것 같네요?”
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가 말했다.
“지금 같이 올라가요.”
임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요?”
“제가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는 거지요.”
그녀는 팔짱을 풀고서 뒤로 돌았다. 그리고 관람차 쪽으로 성큼성큼 돌아가기 시작했다.
“굳이 다시 올라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하지만 미미는 이미 관람차 앞에 서 있었다. 관람 차를 조정하는 담당 매니저가 허리를 90도 각도로 꺾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진혁은 서둘러 미미 곁으로 다가갔다. 황미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진혁 씨는 안 타셔도 괜찮아요.”
“같이 타겠습니다.”
이전번에는 스트로베리 케이크 모양의 관람차에 갇혔다. 케이크 모양의 관람차 위에 거대한 플라스틱 모형 딸기가 올라와 있었다.
우연인지 이번에 두 사람 앞에 정지한 찻잔 위에도 딸기가 있었다. 이전에 탔던 관람차와 대단히 유사했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딸기 모형이 플라스틱 휘핑크림 위에 올라와 있다. 미미의 시선은 그 딸기 모형에 못 박힌 듯이 머물렀다.
『딸기 크림 라떼 찻잔입니다!』
담당 매니저가 활짝 웃으며 소개했다. 이제 계단을 올라가 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미미는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진혁이 말했다.
『이 다음 걸로 타죠』
미미는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승낙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어, 다음 관람차는 초콜릿 크림 라떼인데 괜찮으십니까?』
매니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진혁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딸기 크림 라떼 찻잔이 지나가고 그 다음으로 초콜릿 크림 라떼 찻잔이 멈추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서 붉은색 벨벳 커튼을 한쪽으로 밀면서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
황미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안쪽의 의자에 앉았다. 짙은 갈색의 쿠션은 푹신푹신했고, 양쪽의 창문에는 붉은색 커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창문 쪽에는 컵 홀더가 놓여 있다. 미미의 시선이 컵 홀더에 머무르자 매니저가 허둥지둥 관제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뛰쳐나왔다.
『두 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료입니다!』
진갈색 유리병 두 개를 받아들며 진혁이 빙긋 웃었다.
『고맙네.』
유리병에는 스티커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초콜릿 크림 라떼라고 쓰인 스티커에는 지금 타고 있는 관람차와 똑같은 모양의 잔이 그려져 있었다.
『영광입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미미는 떨리는 손으로 초콜릿 크림 라떼가 담긴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문이 닫히고, 관람차가 덜그럭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미는 창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양손으로 유리병을 잡고서 심호흡을 계속했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혁이 손을 내밀어 미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지금 여기서 이 관람차가 뚝 떨어져서 부서진다고 해도 사람 한 명 정도 구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진혁이 침착하게 속삭였다. 미미가 울음 반 웃음 반이 섞인 앓는 소리를 냈다.
“히끅, 끅, 당신…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예요?!”
그녀가 훌쩍이는 동안에 관람차는 벌써 절반까지 올라왔다.
지상에 있는 회전목마와 매점, 푸드 테마파크와 크고 작은 놀이기구 그리고 테마파크 바깥의 주차장과 저 멀리 보이는 산까지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트럭이 성냥갑처럼 조그맣게 보이더니 성냥개비의 머리처럼 더 조그마해졌다.
진혁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미는 아직도 양손으로 구명줄마냥 유리병을 꼭 쥐고 있었다. 관절이 새하얘진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가 아내에게 속삭였다.
“자, 심호흡을 해 봐요.”
미미는 태연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어떻게든 심호흡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총명한 눈동자는 점차 두려움에 흐려져 갔고, 숨은 점차 거칠어졌다.
진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따가 내리면 치즈 케이크 하나 더 구워 줄게요.”
미미는 진혁을 한 번 쳐다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장난감 마을처럼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건물들을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전 무섭지 않다고요.”
“네에.”
“높은 곳에 올라오는 것도 무섭지 않고, 다 괜찮아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네에.”
그는 초콜릿 크림 라떼가 담긴 유리병의 뚜껑을 돌려서 열어 주었다. 그리고 빨대를 꽂아서 미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안 무서우니 이거 먹어요.”
“…!!”
그녀는 조용히 눈앞의 크림 라떼를 빨아들였다. 평소라면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했을 텐데, 츄르릅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다 마셔 버렸다. 달콤한 맛이 온몸에 퍼지며 긴장이 조금 풀렸다.
미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가 초콜릿 크림 라떼를 마시는 동안 진혁이 손을 통해 진기를 조금씩 흘려 넣어 주었다.
“…이거 맛있어요.”
미미는 전신이 이완되며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진혁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초콜릿의 질이 그다지 좋지는 않군요. 제가 더 맛있는 초콜릿 크림 라떼를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진영이 형을 초빙해서….”
미미가 가냘프게 웃었다.
“후훗, 괜찮아요.”
관람차가 점차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그녀는 점차 더 평온해졌다. 미미가 진혁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오해하시면 안 돼요. 저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요. 높은 곳이나 관람차도 다 괜찮고요.”
진혁이 미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무서우면 안 됩니까?”
“예?”
“바다에 빠져서 생명이 위험했던 적이 있다면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이 무서울 겁니다. 그건 수영 실력과는 관계없는 문제입니다. 이전에 관람 차를 타고 위험했던 적이 있으니, 그 이후에는 관람차가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저에게 무섭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합니까? 그것도 무리하면서 말이죠.”
미미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말했다.
“무리하지 않았어요! 무섭지도 않았고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무섭지 않다면 그게 더 문제입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