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2화
“오케이!”
“그리고 그 목수들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
“네가 오게?”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한 명 보내줄게.”
“제과제빵사는 충분한데?”
“그런 사람 말고. 형, 지금 어떤 사람을 왜 언제 어떻게 써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잖아. 루이스 형이 제일 잘 하는 일은 맛있는 재료로 좋은 빵을 만드는 거야. 다른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할 수 있어야지. 지금 형한테는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지금 이런 일이 있을 때 옆에서 짚어줄 사람 말이지.”
“…알았어.”
루이스가 동의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진혁은 황미미에게 바로 연락하여 한 가지 사실을 확인받았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마음대로 하세요.」
원하던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진혁은 바로 한 비서를 불렀다.
“당대 궁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전통적인 대목이 필요한데.”
한 비서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통궁궐의 설계와 시공, 감리 업무에 종사하는 대목수를 몇 명 알고 있습니다. 통역사를 붙여서 보내겠습니다.”
진혁이 턱을 괴고서 말했다.
“한 비서, 상해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나?”
“예?”
한 비서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내와 그 가족들이 상해에 살고 있다며. 마침 루이스 옆에서 일을 도와줄 만한 사람도 필요하고.”
진혁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한 비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의 변화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좌천입니까? 혹시 제가 어제 건방진 이야기를 해서, 아니면 무능하다고 생각하셔서 저를 다른 데로 보내시고 싶은 겁니까?”
“아니, 일을 잘하니까 보내려는 거야. 마침 가족들도 그쪽에 있고. 아내를 못 만난 지 몇 달은 지났잖아?”
한 비서는 표정을 잃었다. 그는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그건….”
진혁이 말했다.
“한 달.”
“예?”
“한 달이라는 시간을 줄 테니 그쪽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와. 그리고 아내도 데리고 한국으로 와.”
한 비서는 창백하게 질려 있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아와 입을 벙긋거렸다.
신뢰를 잃거나 내쳐지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처럼 불가능한 일을 촉박한 시간에 맡긴 것이다. 정신을 되찾은 그가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대표 이사님! 한 달로는 부족합니다!”
“그럼 두 달이면 되나?”
“최소한 3개월입니다.”
“두 달 주지. 당장 내일 출발해.”
“아니, 안 됩니다. 지금 대표이사님 일정만 해도 인수인계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지금-”
“내일모레 출발해.”
“알겠습니다!!”
한 비서는 다급하게 뛰어갔다. 진혁은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가족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하지.”
◈ ◈ ◈
한 비서는 인수인계를 망친 후에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진혁에게는 총 네 명의 비서가 새로 생겼다. 황미미가 보내 준 사람이 둘, 그리고 한 비서의 부하 직원이 둘이었다. 낮에는 두 명의 비서가 2교대로 따라붙고, 밤에는 다른 두 명이 교대로 근무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이사님! 수석 비서 김한영입니다.”
“임동환입니다.”
“서진우입니다.”
“김서명입니다.”
진혁은 네 명의 비서를 꼼꼼히 살폈다. 특별히 탁기가 있거나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 김 비서, 잘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대표이사님.”
김한영이 빠릿빠릿하게 인사하는 동안 막내 김 비서가 흠칫 놀랐다.
“지금부터 수석 비서님이 김 비서. 거기 김 비서님은 막내 비서입니다.”
진혁이 정리해 주자 막내 김 비서가 활기차게 외쳤다.
“알겠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미미 씨하고 같이 중국으로 가기로 했는데, 알고 있지요?”
진혁이 묻자 수석 비서가 대답했다.
“전용기를 수배해 두었습니다.”
“미미 씨 비서진하고 협의는 했죠?”
김한영이 눈알을 굴렸다. 진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나하고 내 부인이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각자 출발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시정하겠습니다, 대표 이사님!”
김한영 비서가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어딘가에 연락하기 시작했다.
◈ ◈ ◈
테마파크는 이틀간 문을 닫았다. 공식적인 이유는 ‘내부 수리’였다.
진혁과 미미는 상태 점검을 위해 테마파크를 이틀간 순회하고, 지금은 한 비서가 임시 CEO가 되어 일하고 있는 ‘푸드 블록 팩토리 상해’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전용기에는 진혁과 미미만이 아니라 미미의 스타일리스트 팀, 그리고 진혁의 비서들이 타고 있었다.
“특별히 사고가 있거나 했던 건 아니지요?”
“예, 예방하는 점검이에요.”
미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전용기 내의 다른 방에서 헤어 스타일리스트와 패션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종알대는 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조용한 데이트를 하기 위해 테마파크를 폐쇄해버릴 줄은 몰랐어.』
『애초에 대표이사님이랑 데이트하려고 만든 테마파크잖아. 그런데 그 데이트를 몇 번이나 했냐고. 한 번? 그것도 결혼하기 전에?』
『다들 잊자구요. 공식적으로는 그룹 내의 엔터테인먼트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서잖아.』
『그럼, 그럼.』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진혁이 피식 웃자 미미가 물었다.
“테마파크를 좋아하시잖아요?”
“태국 전통 시장 거리가 재미있었습니다. 도마뱀과 도롱뇽 구이, 악어 고기 스테이크가 있었죠? 지네 튀김과 거미 튀김도 있었는데. 맞다. 그러고 보니 미미 씨는 편견 없이 거미 다리 맛을 즐기셨잖아요? 그건 꽤 괜찮았죠?”
“거미 다리에 보송보송하니 털이 돋아 있었죠. 바삭바삭한 닭고기 맛이 났던 기억이 있어요.”
미미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입꼬리만 올렸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 또 같이 갈까요? 맛이 변하지 않았을지 궁금한데.”
“그러면 진짜 좋을 텐데 말이에요. 거미와 지네, 메뚜기 튀김 같은 것들은 판매 목록에서 빠졌어요. 지금은 태국 전통 시장 테마를 접고 송대의 전통 야시장 테마로 바꾸었거든요.”
“그렇군요. 송대 야시장에서도 지렁이 튀김이나 애벌레를 말려 포로 만든 육포 같은 걸 팔긴 했는데.”
“송나라 야시장이라고는 해도 드라마에 나왔던 야시장을 재현한 거예요! 그런 건 없어요.”
미미가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일부러 놀리시는 거지요?”
“아닙니다. 그보다 비행기 안에서 먹을 치즈 케이크를 구워 왔는데요.”
“앗, 오늘은 없는 줄 알았는데요!”
진혁은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은색 포장지에 둘러싸인 검지만 한 직육면체 상자는 핑크빛 리본으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 조그마한 게 케이크라고요?”
그녀는 양손으로 상자를 받고서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바로 리본을 잡아당겼다.
“너무 작은데요?”
은색 포장지를 벗기자 하얀 종이 상자가 드러났다. 상자 안에는 가느다란 일회용 포크와 상앗빛 길쭉한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크기는 작았으나 고소한 치즈 냄새가 강렬하게 풍겼다. 벽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진짜 작아요! 과자라고 해도 되겠어요.”
“스틱 케이크입니다. 저희 회사에서는 각종 스포츠 대회마다 지원하고 있는 물품이죠. 마라톤 선수가 달리다가 보급소에서 물과 함께 집어 들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게 핵심입니다.”
“이런 게 다 있네요.”
그녀는 케이크를 바로 집어 들어 한입 물었다.
‘딱딱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이 치즈 케이크 스틱의 맛은 보기와는 전혀 달랐다. 손에 와 닿는 단단한 촉감은 단지 겉면의 얇은 한 층뿐이었다. 비스킷처럼 단단한 겉껍질 안에는 크림처럼 부드러운 내층이 숨어있었다.
“와아!”
비단처럼 포근하고 구름처럼 부드럽다. 달콤한 케이크는 혀를 간지럽히고 바로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도 짧은 황홀경이었다.
황미미는 이제 검지 한 마디 크기밖에 남지 않은 스틱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과자일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부드러워요. 안쪽에는 뭐가 들어있는 거예요?”
“평범한 치즈 케이크입니다. 부드러워야 씹기 쉽고 목에 걸리지 않으니까 달리면서 영양분으로 소화도 빠르게 되죠.”
“그런데 겉에는 단단하잖아요?”
“손에 들고 먹어야 하니까요.”
“아.”
한 번 맛보고 나서 두 입째에 바로 사라져 버렸다. 황미미는 아쉬워하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혹시 또 있나요?”
“여기 더 있습니다.”
진혁은 다른 쪽 주머니에서 같은 상자를 하나 더 꺼냈다. 이번에는 금색 포장지에 파란색 리본이 장식되어 있는 상자였다.
“이건 뭔데요?”
“열어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미미는 서둘러서 파란색 리본을 풀고 금색 포장지를 찢어발겼다. 하얀색 상자 안에 이번에는 갈색 과자처럼 보이는 것이 들어있었다. 똑같이 생겼지만 흑갈색이다. 진한 초콜릿 향기가 풍기는 과자를 손에 집어 들고 미미가 눈치를 보았다.
“이거 진혁 씨는 안 먹어도 되나요? 한 입 줄까요?”
“전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미미는 바로 초콜릿 스틱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보들보들한 초콜릿의 맛이 파도처럼 혀를 타고 입천장을 지났다가 목구멍까지 흘러갔다. 따끈따끈하면서도 부드럽고, 황홀하면서도 설렜다.
임진혁은 애정 표현을 자주 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원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들어주었다.
“계속 치즈 케이크만 주시다가 이번에는 초콜릿 케이크가 생겼네요?”
“초콜릿 케이크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게 누군데요?”
“밥 앤더슨 씨요.”
“아.”
밥 앤더슨이 초콜릿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생전에 꽤나 유명했다. 미미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초콜릿 케이크를 핥듯이 바라보더니 다시 상자 속에 집어넣었다.
“바로 먹지 않습니까?”
“조금만 있다가 먹으려구요. 그분이 돌아가셔서 정말 아쉬워요.”
그녀는 비행기 창문 아래로 보이는 구름 바다를 흘깃 보며 말했다.
“유산 때문에 벌어진 소동도 정말 엉망진창이었죠. 진혁 씨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엄 파커, 비서 빌은 지금 도박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이 말씀하셨던 대로 치료가 끝나는 대로 저택 관리를 맡게 될 겁니다.”
“가정부는 5년 형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얼 존스는 사형이고요.”
진혁이 말했다.
“얼 존스는 분명히 피에르를 죽일 계획이었을 겁니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미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미미가 먼저 물었다.
“새 비서진은 어때요?”
“쓸만합니다.”
“당신하고 저를 다른 비행기에 태워서 상해로 보내려고 했다고 들었는데요?”
“하지만 저희는 지금 여기에 있지요.”
미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게 제대로 교육해야겠네요.”
◈ ◈ ◈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미미는 스타일리스트들이 머물고 있는 뒷방에 들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 갈아입었어요.”
황미미는 붉은색 야구 모자를 쓰고, 긴 머리를 땋아서 모자 바깥으로 빼냈다. 반들반들한 재질의 야구 점퍼를 걸쳤고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재벌 회장이라기보다 대학생처럼 보인다.
양복에 구두를 신고 있던 진혁이 말했다.
“저도 옷을 갈아입어야겠는데요?”
“진혁 씨 갈아입을 옷과 신발은 여기에 있어요.”
미미가 새 쇼핑백을 내밀었다. 미미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브랜드의 양말과 신발, 그리고 속옷 일체를 포함한 의복이었다.
“그럼 저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갈아입으셔도 괜찮아요.”
미미가 생글생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