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1화
“후우.”
임진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었다. 폐 깊숙한 곳까지 가능한 한 한껏 들이마시며 깊이 숨을 내쉰다. 한순간 빨라졌던 심장 박동 소리가 다시 천천히 느려진다.
“후아아아.”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차분해졌다. 진혁이 알려준 호흡법이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 방법을 사용해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자, 임진혁 대표이사님. 합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디아타 공주의 푸드 팰리스에 지금 리필 푸드 블록을 공급하고 있는 책임자는 루이스 이사님이잖아. 우리 자체 제작 시설은 아직 설계 단계라서 여기 샘플은 공장제가 아니라 핸드메이드라고.”
진혁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한테 부탁하는 거지.”
“…어?”
그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중국 쪽은 지금 공장 설비 관리와 테마파크를 위한 설비 확장 때문에 바쁘다고 하던데. 둘 다 이런 식으로 서로에게 핑계 댈 줄은 몰랐네.”
“아니, 그게.”
진희가 말문이 막혀 가슴을 쳤다.
“나도 돕고 싶은데 지금은 여력이….”
꽃사슴 같은 눈동자가 울망울망 이쪽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넌 지금 방향을 잘못 잡았어.”
“뭐?”
“네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은 잡무를 익히는 게 아니야. 큰 그림을 보면서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가는 거지. 노동법과 식품법에 대해서는 네가 알 필요가 없어. 법률적인 업무는 전문가에게 맡겨.”
노골적으로 지적받은 진희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 ◈ ◈
“그럼 이제 회의를 시작합니다.”
진혁과 민병철, 그리고 루이스 강과 백진영. 유키코까지 다섯 사람은 각자 서로의 방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국과 미국, 중국과 일본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회의를 하려면 누군가 한 사람이 잠을 포기해야 했다.
“흐아암.”
민병철이 졸린 지 하품을 했다. 중국과 한국은 시차가 많지 않으나 미국은 거리가 멀었다. 그가 입을 가리며 말했다.
“2시 52분이니까 졸리네.”
거의 새벽 3시다.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루이스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긴 오후 2시 52분입니다.”
백진영은 흘긋 손목시계를 보며 저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의 서울은 상하이보다 한 시간이 늦다.
반면에 일본은 한국과 시간차가 없다. 유키코는 굳이 시간을 언급하지 않고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시간은 4시였지만 다들 일찌감치 회의실에 로그인해 있었다.
“유키코 씨,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아버지는 좀 괜찮아요?”
백진영이 물었다. 유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우리 본점 식구들이 다들 걱정하고 있다구요. 강남점에서도 빈자리가 크다고 해요.”
유키코와 백진영이 안부를 교환했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다 부른 거야?”
정식 회의가 시작하기 전에 루이스가 물었다. 진혁이 대답했다.
“지금 부서 간 업무 협조가 순조롭게 되지 않아서 말이야.”
민병철이 으르렁거리듯이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맞아!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하려고 했어. 이탈리아의 호텔과 미국의 클리닉 카페 양측에서 푸드 월을 요청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거절만 당하고 있으니 말이지.”
루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은 어렵습니다. 지금 이번에 자금성 태화전을 짓는 것만 해도 5개월은 더 걸려요.”
유키코가 끼어들었다.
“일본 지사에서도 푸드 월이 필요해요.”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빵 파는데 푸드 월이 왜 필요하다는 거지요? 이탈리아의 호텔에는 아주 훌륭한 관광 명소가 되어 줄 겁니다. 지금 매출이 오르고 사람들이 모이는 중입니다. 6개월 후면 벌써 늦습니다.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할 때 확 터 줘야지, 그때 가면 이미 이탈리아 관광 유행이 지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푸드 월이 당장 필요한 데가 바로 호텔입니다. 클리닉 카페는 반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만, 호텔은 못 기다려요.”
민병철이 강력하게 말했다. 루이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푸드 블록 팩토리 상해 지사는 지금 이것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디아타 공주의 푸드 웨딩 팰리스에 계속해서 블록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력이 없어요. 카리브 쪽 공장까지 제가 혼자 왔다 갔다 하느라 잠도 못 자고 있습니다.”
유키코가 고개를 저었다.
“일본 지사는 당장 필요해요. 밥 앤더슨 씨를 기리기 위한 푸드 월, 그리고 크기별 펜로즈 삼각형의 샘플이 필요합니다. 2달 후에 도쿄 현대미술관에서 돌아가신 밥 앤더슨 씨의 유작을 전시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다들 아실 거 아니에요? 임진혁 쉐프님의 초콜릿 케이크가 최초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게끔 하신 분이잖아요.”
루이스와 유키코, 그리고 민병철이 서로 언성을 높였다. 요구 사항은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으며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하아.”
진혁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여러분에게는 실망했습니다.”
“엣…?”
“임진혁 쉐프님, 죄송합니다.”
유키코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일단 이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한 명 한 명이 먼저 로그아웃을 했다. 진혁이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민병철 이사님. 이제 주무시러 가셔도 됩니다.”
눈 밑이 시꺼메진 민병철이 피곤에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회의 끝났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한다.”
“알았어.”
“이거 지금 업무 협조가 문제가 아니네. 당장 경영이라곤 해보지 않고 현장 일하던 사람들이 관리 일을 할라니까 땅부터 파고 있잖냐. 애들이 우선순위가 뭔지 모르네.”
민병철은 진혁과 함께 일하기 전부터 벤처 기업 창업자로서 사업 경영을 꾸준히 해 왔다. 이사들 중 유일하게 쉐프도 바리스타가 아닌 사람이었다.
“….”
진혁이 말없이 민병철을 바라보았다. 병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익숙한 일을 하고 있다가 여력이 생기면 도울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 다들 자기 분야와는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있잖아? 내가 완전 생소한 호텔 관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진혁이 한숨을 쉬었다.
“관리할만한 사람들을 다 붙여 줬는데.”
“관리라는 건 기본적으로 머리가 하는 거지. 방향을 잡고 다른 사람들이 손발이 되어 뛰어다녀야 하는 거야. 생각을 해 봐라. 니가 프린세스 웨딩 하면서 궁전 만드는데 일 년이 안 걸렸어. 기반 시설조차 처음부터 만들어야 했고, 명확한 데드라인이 있는 상황에서 일을 시작했지. 그리고 그 데드라인을 맞추고 나서 애들이 다 틀이 있는 상황에서 시작하지 않았냐?”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푸드 블록 팩토리 쪽은 루이스 이사와 주느비에브 쉐프 두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일정을 좀 더 당겨서 빨리 끝냈어야지. 도대체 뭐하러 중국식 궁전을 통째로 새로 설계하는 거야? 애초부터 블록 타입으로 만들기로 했으면 그냥 다양한 블록을 생산해서 그걸로 쌓아 올리면 안 되냔 말이지.”
“그게 바로 푸드 월이잖아.”
“그래! 푸드 월부터 만들라고. 지금 당장 이탈리아나 뉴욕이나 도쿄 모두 복잡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건물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냥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적당히 빼먹을 수 있게 푸드 블록과 블록을 쌓는 기술만 공유해주면 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서 보내려고 하니까 일이 되잖아.”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형이 지금 말하는 건 자금성 태화전을 만드는 것보다 푸드 월을 우선시하라는 이야기네.”
“아니지, 자금성 태화전의 일을 병행하면서 다른 지부의 일을 도울 수 있다는 거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울 수는 없어도, 보편적이고 무난한 벽을 하나 디자인하고 그 벽을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공유하면 되잖아.”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철이 투덜거렸다.
“진짜 협조받기 힘들다, 힘들어.”
“음.”
“루이스가 얼음 조각사 출신이었지? 장인 정신으로 자금성에 매달려서 우아하고 멋진 건물을 만들어내는 건 좋아. 좋은데, 지금 그냥 현장 감독 자리에 있는 게 아니잖아. 푸드 팩토리의 총감독을 맡고 있으면 멀리 봐야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이야기는 어제 그가 임진희에게 해주었던 이야기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
“흐.”
진혁이 실실 히죽거리자 민병철이 있는 대로 표정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넌 지금 내 얘기가 웃기냐? 현장 일을 모르면 관리직이 될 수 없지. 하지만 관리를 할 줄 모르면 관리직 자리에 있으면 안 돼. 언제까지 네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 뒤를 따라다니면서 똥 닦아 줄 건데?”
민병철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냥 전문경영인을 초빙해.”
진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해 볼게.”
“알았어.”
민병철이 로그아웃했다. 스마트폰이 띠링띠링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회의에 참석했던 이들이 연락한 것이었다.
“진혁아, 지금 통화되냐?”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것은 루이스였다.
“어.”
“이번엔 내가 괜히 흥분했지? 미안하다.”
그는 먼저 사과부터 했다. 진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영상 통화가 아니라 음성 통화였다.
“그 이야기만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지?”
진혁이 발로 바닥을 톡 톡 두드렸다. 루이스가 바로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말만 하면 푸드 블록이 톡톡 튀어나올 거라고 생각하나 봐. 여기가 얼마나 바쁜지 전혀 모른다고. 가벼우면서도 맛있고, 먹을 수 있는 블록 개발이야 이미 되어 있지. 하지만 그걸 어떻게 주춧돌과 벽과 기둥으로 쌓아 올리고 기와까지 얹을지는 전적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잖아.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바쁜데 도대체 왜 우리한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진혁이 물었다.
“지금 제일 큰 문제가 뭔데?”
“지금 주느비에브 쉐프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기둥 위에 대들보를 쌓으면 무너져 버리는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어. 지금 사흘째 잠도 제대로 못 잤다니까.”
“건축과 공학 쪽 기술자는 불렀어?”
“어…?”
“형, 형은 거기에 건축기술자문으로 가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럴 때는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말고 전문가를 불러. 왜 혼자 고민하고 있는 거야?”
“주느비에브 쉐프님이 고민하는 걸 보다 못하다 보니….”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주느비에브 쉐프는 동양 건축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
“전통 목수를 불러서 그 사람들하고 상의해.”
“젠장! 내가 왜 진작에 그런 생각을 못 했지?”
“사람이 잠을 못 자면 멍청해지지.”
루이스가 갑자기 경쾌하게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난 당장 목수들부터 섭외하러 간다.”
진혁은 루이스의 중국 내 꽌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우리 쪽에서 섭외해서 보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