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0화
정직한 것과 상냥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그렇다.
진혁이 혀를 찼다.
‘허, 참.’
한 비서는 미미가 데리고 있던 핵심 수하 중의 하나였다.
황태명은 미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고아나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녀석들을 따로 선정하여 후계자에게 붙여 주었다. 한 비서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 후에는 미미가 자신에게 한국말이 유창하면서도 괜찮은 사람을 붙여준 것이다.
진혁은 미미를 믿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신뢰가 자동으로 모두에게 확장되지는 않았다.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수하들도 서로 의견이 달라 충돌하는 와중에, 애초부터 다른 사람의 부하로 길러진 사람을 함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한 비서는 진혁을 온전히 믿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 크나큰 방향을 공유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진혁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한 비서는 아주 유능한 협상가였다. 법률과 행정도 그럭저럭 해냈다. 하지만 한 비서의 제일 놀라운 능력은 사람을 설득하는 재능이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배경 지식을 조사하는 것은 돈과 시간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배경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는 섬세하고 꼼꼼하게 상대방의 예상 반응을 추측하고 그에 어떻게 반응하면 될지 분석하여 행동 방침을 정했다. 타인의 인종과 성장 배경, 학력과 경력, 취미와 음악, 읽는 책, 즐겨 만나는 사람들을 파악하여 대하는 태도 역시 바꾸었다.
기본적으로는 냉철한 샐러리맨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나, 필요할 때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면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배우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연기력을 활용해 기업 대 기업의 협상에서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니면 뛰어난 건지.’
하지만 그 재능과 경험을 자신의 상급자에게 활용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여태까지는 그랬다.
‘지금 나를 떠보는 건가?’
“한 비서.”
“예?”
“자네 말이야. 황 그룹에서 이쪽으로 오면서 어떤 것을 기대했나?”
진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바람이 불 리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한기가 살짝 돌았다. 한 비서는 순간적으로 오싹하여 온몸을 떨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비서실에서 계속 일했다면 미미 씨의 최측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한국까지 오게 되면서 기분이 이상했을 테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자네는 내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 미미 씨에게 계속 보고하고 있잖아.”
“예?”
한 비서는 그대로 굳은 듯이 멈추어서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진혁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예? 저, 그건… 제가 가지고 있는 공식 일정표는 당연히 회장님도 가지고 계시고….”
한 비서는 한순간 당황해 눈알을 굴렸다.
“자네가 미미 씨에게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는 있지. 하지만 보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에게 정식으로 보고한 적이 있나?”
진혁은 일부러 그대로 두었던 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한 비서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내가 그걸 왜 그대로 두고 있다고 생각하나?”
힐난하거나 비난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단순한 질문이었다.
한 비서는 갑자기 등을 쭉 펴며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저를 통해서 회장님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로군요.”
“우리는 적이 아니야. 나는 숨길 일도 없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식적인 일정 공유는 그에게 있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어디에서 뭘 하는지 직접 문자나 사진으로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 중복으로 공식 일정을 전부 보고한다고 해서 진혁과 미미의 관계에서 달라지는 점은 없다.
또한, 공식적인 일정에는 빈 시간이 8시간이나 있었다. 바로 수면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필요로 하는 수면 시간이 달랐다. 두세 시간의 수면만으로도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 일주일 정도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했다.
몰래 취미 삼아 범죄자라도 잡아 죽이고 싶다면 그 시간에 하면 된다. 진혁은 대개 이 시간에 운공을 하거나 새로운 메뉴를 개발했다.
즉 이러나저러나 해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내버려 두었다.
미미와 진혁의 관계에서는 그러했다.
“한 비서. 자네는 기본적으로 황 가문의 사람이잖아?”
“예?”
“황 그룹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자랐고 지금도 황 그룹에 정보를 전달하지. 그런데 내가 자네를 지금 이상으로 신뢰해야 할 이유가 있나?”
한 비서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그는 창백한 낯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표이사님….”
진혁이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처럼 계속해서 보고하도록 해.”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진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 비서가 따라 내리려고 하였으나 진혁이 제지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일하고 퇴근하게.”
“…알겠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미미가 안쪽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편안해 보이는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조명을 받아 갈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땋아 내렸다. 연한 색조의 화장은 고운 피부와 짙은 눈썹, 그리고 총명한 눈동자를 돋보이게 하였다.
“진혁 씨! 어서 와요.”
그녀는 몇 년만에 만나는 것처럼 진혁을 반겼다. 진혁이 미소를 지으며 미미를 껴안았다.
“어떻게 지냈습니까?”
“…방금 전까지 쉬고 있었어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쉬고 있지 않았다. 낮 내내 정신없이 일하다가 진혁이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스타일리스트들을 불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스타일리스트 그리고 패션 스타일리스트가 달라붙어 ‘집 안에서 자연스럽게 쉬고 도중에도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도중에 헤어 손질이 끝났고, 스타일리스트들은 빠르게 정리하고 떠났다.
미미는 확실히 아름다웠고 태극권을 수련하며 나날이 더 아름다워졌다. 피부도 좋아졌고 자세가 곧으며 머리카락도 찰랑찰랑하다.
“꾸미지 않아도 되는데요.”
진혁이 보기에 자신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꾸밀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는 화장이 아무리 얇아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원한다면 거죽 속의 근육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데, 굳이 표면의 아름다움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미미가 생긋 웃었다.
“하지만 꾸미면 더 예쁘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함께 거실로 들어갔다. 작고 하얀 손은 따뜻하고 보송보송했다. 그녀는 신이 나서 미술 전시회 일정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큐레이터가 예상보다 일을 더 잘해 주어서, 전시회 일정이 더 당겨졌어요. 밥 앤더슨 씨의 그림 전시회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열리는 건 처음이에요. 저도 너무나 기대돼요.”
“잘 됐군요.”
“이번에도 펜로즈 입체 도형 케이크를 만드실 건가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미미가 활짝 웃었다.
“요즘 바쁘시잖아요? 꼭 펜로즈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이전에 만들었던 한정판 상품의 컬러를 바꿔서 그대로 써도 괜찮아요.”
“그렇습니까?”
“지금 경매 사이트에서도 프리미엄이 붙어 있거든요. 그때 그 상품을 다시 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진혁이 물었다.
“전시회 내부에서 굿즈로 판매할 겁니까?”
“아니요.”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진혁 씨만 괜찮으시다면, 아예 한정판 공장제 빵을 만드는 건 어떨까 해요. 전시회 기간에만 잠깐 파는 거예요.”
“빵이라.”
“그림별로 카드를 만들어서 빵 안에 넣으면 좋겠어요.”
“빵을 여러 개 사야 카드를 다 모을 수 있겠군요. 그림은 어떤 걸 생각하고 있습니까?”
미미가 씩 웃음 지었다. 그녀는 태블릿 PC에 화면을 띄워서 보여주었다.
“보세요, 그림 하나하나가 25 피스 퍼즐 조각이에요. 25개의 퍼즐 조각을 모으게 되면 훌륭한 그림으로 완성할 수 있어요.”
진혁은 그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25개라… 이걸 꼭 카드로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다른 좋은 생각이 있으세요?”
“이 퍼즐 모양 말인데,”
진혁이 검지로 퍼즐을 가리켰다.
“빵으로 만들어도 되겠군요. 스물다섯 개의 빵을 사서 합치면 미술 작품이 되는 겁니다.”
“빵이요?”
미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렸다.
“하지만 빵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 같은데요?”
“평면에 세우면 됩니다.”
“아니면 조금 더 작은 형태는 어떨까요? 쿠키 같은 거요.”
“쿠키가 오히려 더 밀도가 높아서 무너질 겁니다.”
“그래요?”
미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진혁이 미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래쪽의 쿠키는 단단하고 통통하고 위로 갈수록 작고 가벼운 쿠키로 만든다면 가능하긴 할 겁니다.”
“스물다섯 개는 너무 많을까요?”
“그렇죠. 한 명이 전부 사서 만들기에는 너무 많은 양입니다. 다 먹기 전에 상해 버릴 가능성도 높구요.”
미미가 키득키득 웃었다.
“반면에 종이 카드나 스티커 씰은 그런 염려는 없지만요.”
“반드시 하나만 할 필요는 없죠.”
진혁이 말했다.
“스티커 씰을 같이 넣는 겁니다.”
“아!”
“이 빵을 다 모으면 정말로 그 모양이 만들어지는지 다들 궁금해할 겁니다.”
미미가 물었다.
“퀄리티 컨트롤이 어렵지 않겠어요? 빵도 그렇고 쿠키도 그렇고 원래 동글동글하게 부풀어 오르잖아요. 이렇게 장난감 블록처럼 꼭 맞아들어가려면 모두 완벽하게 만들어져야 할 텐데요.”
진혁이 싱긋 웃었다.
“그게 바로 저희가 푸드 블록 때에 했던 일입니다. 지금 테마파크에서도 하고 있고요.”
“아!”
◈ ◈ ◈
“그래서 지금 회장님 아니 새언니의 미술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 푸드 블록 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임진희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그녀는 푸드 블록 팀의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뒤적이는 중이었다. 지위가 높았기에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던 와중에 진혁이 국제전화를 해서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그렇지. 내가 디자인은 보냈어. 두 달 후에 미술 전시회를 할 건데, 그전에 샘플을 보고 싶어서 말이야. 샘플 좀 만들어서 나한테 보내 줘.”
“그건 루이스 이사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나한테 얘기해?”
진혁이 해맑게 미소지었다.
“루이스 형은 너한테 얘기하라고 하던데?”
“….”
임진희가 심호흡을 했다.
“나 지금 여기 온 지 이틀 됐거든?! 여기의 노동법, 식품법, 현지 식재료들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사람들하고 얼굴 익히는 데만도 벅차!”
“왜, 뭐가 잘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