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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593화 (591/656)

제 593화

진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는 임진희를 놀리듯이 말했다.

“저번에 엄마가 카누 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카누? 무슨 카누?”

“호수에 조그마한 카누 띄워서 오붓하게 놀고 싶다고 했잖아. 마을회관에 카누 만들기 프로그램이 있어. 거기서 아버지가 직접 목재 깎고 계셔.”

임진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가 따지듯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진혁이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이건 아버지에겐 비밀이다. 원래 소망시 마을회관에는 카누 만들기 프로그램이 없었어. 부모님이 저번에 두 분이 춘천 여행 가서 카누를 타신 거지. 그리고 의암호에 있는 카누 만드는 프로그램도 보셨나 봐. 아버지가 지난번 식사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시니까 미미 씨가 어디서 강사를 초빙해 오고 프로그램도 만들어 놓더라.”

“헐, 그게 돼?”

“마을회관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자원봉사자랑 기부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기부금도 있고, 자원봉사할 강사도 있으니 프로그램 만드는 건 쉽대. 너도 하고 싶으면 제과제빵 강사로 봉사할 수 있을걸?”

“난 됐어. 지금도 일이 많은데 어떻게 더 늘려.”

임진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셔츠를 여미며 말했다.

“엄마한테 얘기해줘야겠어.”

“엄마한테 할 서프라이즈 선물이라서 몰래 하고 있는 건데? 네가 얘기해 버리면 어떻게 하냐.”

임진희가 검지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아니, 아니지. 그놈의 서프라이즈 선물 때문에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되잖아. 내가 적당히 모르는 척해달라고 말할게.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서 자꾸 집에 늦게 들어오니까 엄마도 이상한 줄 알아.”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혁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전화로 하면 되고.”

“음.”

임진희가 뜸을 들였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디아타 공주의 결혼식에 나를 왜 데려갔어?”

“그때 말했잖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지. 너는 더 경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었는데 굳이 나를 데려왔어. 처음에는 그냥 푸드 블록 도안을 만드는 거면 된다고 했단 말이지? 그리고 조금씩 일 양을 늘리더니 마침내는 여자 쪽 결혼식에서 내가 총감독을 하게 만들었지.”

“제대로 잘 해냈잖아? 뭐가 문제야.”

진희가 얼굴을 붉혔다.

“문제는 없는데, 그 일이 너무 재미있더라고. 축제 같았어.”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저기, 전에 명동점이 내 가게라고 말했잖아.”

“맞아. 처음부터 직영점이 아니라 네 소유로 했잖아.”

진혁이 깊은 눈으로 임진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눈빛을 마주 보지 못하고 피했다.

“하지만 네가 날 믿고 맡긴 거잖아. 가족이 하면 좋으니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닌데.”

“뭐?”

“옛날에 했던 말 기억나지 않아? 아직 병원 다닐 때 말이야. 빵집 잘 되면 너한테도 하나 차려 달라고 했잖아.”

그가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시켰다.

“어, 그러면 내가 제과제빵 일을 배운다고 했을 때 좋다고 했던 건.”

“아무것도 모르고 가게를 ‘소유’하기만 할 수는 없어. 그건 그냥 호구 잡히는 일이야. 최소한 기본은 알아야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감독하는 것과 자기가 못 하는 일을 부탁하는 건 달라.”

진혁은 옛일을 떠올렸다.

‘적혈곡’(赤血谷)이라는 암살단이 있었다.

한때는 유명했다. 7대 교주가 이끌던 전성기의 적혈곡은 일월신교의 소교주도 암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여하간 7대 적혈곡주는 어렸을 적 잃어버렸던 자신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에 크게 감격하였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8대 곡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생애 통틀어 살(殺)이라고는 파리 죽이기밖에 해보지 않은 자가 암살 집단의 수장이 된 것이다. 그는 성공적으로 적혈곡을 파멸시켰다.

‘광안마 놈이 진짜 아들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우기더니 말이지.’

광안마는 처음에 몇십 년이 걸릴 계획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작 몇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혁은 회고를 그만두고 눈앞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과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아직 어리고 앞길이 창창하다.

“네가 차려 준 거니까….”

임진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쌍둥이 남매에게 진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갖고 싶다고 해서 차려 준 거야. 적당히 점장 하나 앉히고 하고 싶은 거 해. 집에서 놀고 싶으면 놀아도 되고, 푸드 블록 이벤트 진행이 재미있었으면 그쪽 일을 해도 되고.”

임진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에는 누가 가게에 와서 내가 만든 빵을 사 먹을 때 진짜 보람이 있었거든. 건강에 좋은 빵이라고 SNS에서 인스타나 트위터 보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꽤 있잖아.”

“그렇다고 했지.”

“내가 병원에서 오래 일을 했잖아. 소화 기능이 좋지 않아 빵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을 개발하는 데서 보람을 느꼈거든. 그런데 비행기 타고 멀리 가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축제를 진행하니까 다르더라. 결혼식이라는 반짝이는 순간을 함께 하는 것도 기뻤고, 예쁘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것도 좋았어.”

“우리나라에서야 케이크가 원래 그런 거잖아. 명절이나 축제 같은 날에 모여서 먹는 거.”

“병원도 그렇고 빵집도 그렇고 내가 맨날 보던 사람들만 만나잖아? 날 방문하는 환자분들이나 손님분들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는 있는데 나는 항상 그 자리에 못 박혀 있고. 그곳을 떠날 수가 없잖아. 그런데 내가 낯선 곳을 방문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 하니까.”

“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그 사람들이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 하게 되지?”

“응. 내가 그대로 서울에서 가게만 하면서 살았으면 평생 못 만났을 사람들도 만났고. 내가 어디 가서 공주님이랑 왕족들을 실제로 만나겠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 형이 푸드 블록 사업을 지금 중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중국어는 못하니까 미국에서 배우면서 같이 해.”

“뭐? 명동점은?”

진혁이 물었다.

“동진이한테 맡길까?”

“걔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아?”

“네가 생각하기에 명동점에서 제일 중요한 점이 뭔데?”

임진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와 달> 명동점은 강남이나 망원 지점하고 다르게 건강에 좋은 빵이 테마지. 동진이는 나만큼 건강 빵을 개발하는 데에 열정이 있어. 그런데 나이가 좀 어리지 않나 해.”

“성실하고. 시간 약속 잘 지키고. 인벤토리 관리 잘하고. 나이가 어린 게 큰 문제가 될까?”

“거래처에서 얕잡아 볼 거 같아.”

“어떤 거래처인데? 전부 그린 워터 농장이랑 같이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밀가루 갖다 주는 젤로스 사의 담당자가 내가 여자라고 무시한단 말이야. 나이 어린 사람도 우습게 보고 무시하지 않을까 싶어서.”

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무시한다는 게 정확히 뭐야? 안 좋은 물건을 갖다 줘?”

“어, 그렇게 말하니까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네. 은근슬쩍 하대한다고 해야 하나? 뭔가 눈치가 있잖아. 농장에서 오신 분들이랑 달라. 그분들은 날 정말로 존중해 주는 느낌이 있는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젤로스 사에서 랑비에 씨가 퇴직하신 후로 그쪽 직원 상태가 별로 안 좋은가 본데.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임진희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일러바친 것 같다?”

“가족이라고 해봤자 너랑 나밖에 없잖아. 널 우습게 보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

“아하하하.”

그녀가 힘없이 웃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계시고. 나 때문에 억지로 명동점 일을 계속 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오너 사장으로 돈만 받고, 하고 싶은 일을 해. 동진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맡겨도 되고.”

“외부 사람을 들이는 건 좀 조심스러워. 지금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서.”

“아니면 기존에 중국에서 출장 오신 분들에게 다른 직위를 맡겨서 승진시켜도 되고. 명동점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너고, 제일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도 너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진희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어.”

“뭘?”

“나한테 기회를 준 거잖아. 가게를 열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건 좋지만 네가 좋아야지. 우리는 가족이잖아.”

임진희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너만 나한테 이것저것 다 해주는데, 내가 그만큼 돌려주지 못하니까 그렇지. 그런 주제에 욕심만 부리는 게 아닐까 싶어서. 나 잠깐만 화장실 다녀올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향했다.

진혁은 스마트폰을 꺼내 몇 사람과 메시지를 교환했다.

“나 왔어. 많이 기다렸어?”

화장을 고치고 돌아온 임진희의 눈매가 벌게져 있었다. 그녀는 언제 주문했는지 초콜릿 쿠키를 접시째 들고 왔다.

“너 초콜릿 칩 쿠키 좋아하지? 이거라도 먹어. 내가 사줄게.”

진혁이 피식피식 웃으며 비닐 포장된 초콜릿 쿠키의 포장을 벗겼다. 그는 아직도 살짝 번져 있는 임진희의 얼굴을 못 본 척해주었다.

“이건 시판하는 공장제 쿠키잖아.”

“프랜차이즈 카페에 뭘 더 바라는 거야.”

“우리는 직접 굽잖아.”

잠시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다가 진혁이 본론을 꺼냈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 정리하고, 다음 주 월요일 아침 7시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출발해. 루이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임진희는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놓쳤다.

“잠깐, 뭐라고?”

쿠키 조각이 테이블 위에 떨어지며 조각나 흩어졌다.

“루이스하고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잖아. 걔는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하고, 너는 일할 곳이 필요하고. 지금 허니랜드 쪽의 일을 총괄해 줄 사람이 필요해.”

“…아니, 그렇게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은 지금 당장 해야지. 짧은 인생인데 언제까지 좁은 빵집에 갇혀서 살려고 해. 아버지야 빵집에서 일하는 게 좋다고 하시면서 거기에 계속 머무르지만,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아니, 아니. 잠깐만 나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허니랜드에서 일을 하게 되면 학교로 출근을 못 하잖아.”

“미미 씨하고 조정했어. 일단 네가 만든 교과서를 바탕으로 다른 교사가 수업하고, 네가 한국에 머무르는 주간에만 특강을 할 수 있어. 채용공고를 하나 더 내면 되니까 간단해.”

임진희가 숨을 들이마셨다. 마스카라가 번지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고마워.”

“아, 가족인데 뭘. 하다가 다른 일이 하고 싶어지면 얘기해.”

“그런 일은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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