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2화
진혁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믿지 않았다. 지금도 믿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유키코를 알았다. 그녀는 성실하게 눈앞에 있는 일을 솔선수범하여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무엇을 지시하면 단순히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실현되도록 전심전력으로 일한다.
그는 유키코가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을 믿었다.
‘동경 지사가 더 높은 성과를 올리면 올릴수록, 유키코에게 돌아가는 인센티브도 커지고 말이지.’
그녀는 단순히 월급을 받기만 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개발한 음식들의 매출이 증가할수록 추가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공평하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이들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혁은 최소한 자신의 기업 내에서는 노력하는 자에게 노력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기를 원했다.
“열심히 일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군요.”
진혁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유키코가 생긋 웃었다.
“마키모토 그룹에 아시는 분이라도 있어요?”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매번 호가호위할 수 없으니 직접적인 투자를 하는 방법도 고려해봐야겠어.’
◈ ◈ ◈
도쿄 지사는 분위기가 좋았다. 케이크 위치들은 순조롭게 팔렸다. 유키코는 S 그룹과 M 그룹 둘 다에게 체면을 세웠다. 제과제빵 공장은 순조롭게 돌아가며 생산량을 조금씩 늘렸다.
유키코의 아버지 역시 건강을 되찾고 있다고 들었다.
사흘이 지나 성공적으로 도쿄 순방을 마치고 진혁은 서울로 돌아왔다. 공항을 지나 강남의 아파트로 돌아오자 미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반갑게 진혁을 맞이했다. 뉴욕을 떠나 아랍에는 진혁 홀로 갔고, 일본을 들러 돌아왔다. 미미는 그동안 중국에서 사업상 일을 처리하고 왔다. 거의 일주일 만이다.
「이건 선물입니다.」
진혁이 황미미에게 납작한 선물 상자를 건넸다. 미미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치즈 케이크가 아니네요?」
그녀는 상자를 감싸고 있는 리본을 잡아당겼다. 은색 포장지가 리본과 함께 벗겨지면서 안쪽에 있는 노란 바나나 그림이 드러났다.
「유키코 씨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상자 안에 든 바나나 모양의 과자 빵을 확인한 미미가 살며시 웃었다.
「이거 전에 일본인 친구가 선물해 준 적이 있어요.」
미미가 입을 더 크게 벌리며 웃었다. 진혁이 덧붙였다.
「도쿄에는 폭신폭신하게 부풀어 오른 조그마한 치즈 케이크 가게가 많더군요. 그래서 도쿄풍 치즈 케이크를 만들어 왔는데, 어떻습니까?」
「아하하하하하.」
그녀가 명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이제 치즈 케이크에 질리셨습니까?」
미미가 윙크했다.
「아니에요, 도쿄 스타일 치즈 케이크는 뭐가 다른지 궁금하네요.」
임진혁은 어디에 여행을 가더라도 치즈 케이크를 선물로 가져왔다.
「이전에 드셔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최근에 유행이 조금 바뀐 것 같더군요. 수플레처럼 부풀려서 생크림과 함께 달콤한 절임 과일을 올려서….」
그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치즈 케이크에 대해서 설명했다.
진혁은 여행을 가지 않고 함께 머무를 때도 다양한 종류의 치즈 케이크를 구워 주었다. 옆에 없을 때에도 이것저것 보냈다. 반응이 좋은 케이크는 싫다고 할 때까지 계속 보내 주었다. 간지럽고 다정하게 애정 표현을 하지는 않았으나 여태까지 단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점심 식사는 평범한 한식이었다. 차돌박이 김치찌개와 김치, 그리고 콩나물무침과 고사리 무침 등 나물 반찬이었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잡곡밥을 수저로 뜨며 미미가 말했다.
「진혁 씨에게 직접 케이크를 주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해 온답니다.」
「누군가 미미 씨에게 부탁한 사람이 있습니까?」
「오마르 왕자가 다시 물어보고 있어요.」
「제가 해 드려야 합니까?」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화로는 얻었으니까 괜찮아요.」
진혁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 화로 사진을 봤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던 것 같거든요.」
미미가 싱긋 웃었다.
「당신이 쓰셨던 것이 맞을걸요.」
「예?」
「할아버지께서는 역사학자들과 박물학자들을 지원하셨어요. 역사학자들이 당시의 종교를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재단을 만드셨고, 당시의 유물을 찾아서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박물관도 만드셨어요.」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황태명 어르신이 찾으라고 한 유물이 그 화로 말고도 또 있군요.」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대의 물건이라면 옥석을 가리지 않고 전부 찾고자 하셨어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화로와 항아리, 두 자루의 검, 그리고 목패를 찾고자 하셨지요.」
「다른 물건들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미미가 바로 읊었다.
「화로는 찾았고. 검은 이미 아실 거예요. 목패는 당시의 호패로, 제갈책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거구요. 항아리는 이 정도 크기에 검은색 장독 같이 생겼다고 했어요. 뚜껑에는 노란 종이가 여러 장 붙어 있는 상태고-.」
그녀는 스마트폰의 갤러리 사진을 검색해서 스케치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항아리를 알아본 진혁이 한일자 모양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대 역사에 취미가 있으셔서 찾고 계신 줄만 알았는데요. 그게 아닌가요?」
진혁이 물었다.
「이 물건들을 계속해서 찾고 있습니까?」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아버지의 사당에 바치려고 했어요.」
「연구자들에게 맡겨서 연구하거나 박물관에 맡기는 게 아니고요?」
미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애초부터 할아버지께서 원하셨던 거였으니까요. 사당 앞에 두고 이틀 정도 지난 후에 박물관으로 보내려고 했어요.」
진혁이 말했다.
「다른 물건들은 상관없습니다. 항아리가 발견된다면 제가 먼저 보고 싶습니다.」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나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일반인들이 접해서 좋을 것은 아닐 뿐입니다.」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어요. 만일 찾게 된다면 알려 드릴게요.」
미미가 화제를 바꾸었다.
「테마파크의 디저트 팰리스는 이제 거의 완공되어간다고 하더라구요. 같이 보러 가요.」
그녀가 태블릿에 사진을 띄웠다. 경험을 통해서 미미는 진혁에게 자연스럽게 요청을 하였다. 그녀는 더 이상 진혁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뭔가를 물어보면 거절할 가능성이 높지만, 업무에 관련된 제안을 이런 식으로 요구하면 대부분 승낙한다.
「이건 제 일인데. 미술관의 해외 전시와 학교 일 때문에 꽤 바쁘지 않습니까?」
「전시는 큐레이터가 맡아서 처리하고 있어요. 제대로 일할 줄 아는 윗사람이라면 위임을 할 줄 알아야 하죠. 학교는 이제 위원회 구성을 마쳤고, 교사들을 채용하고 있어서 당분간은 할 일이 없어요.」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프린세스 디아타의 결혼식은 세기에 남을 만한 행사였다고 들었어요.」
미미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진희는 운영 측의 일환으로 참석했지만, 그녀는 다른 업무로 바빴다.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푸드 블록 궁전을 못 봤군요.」
「네, 테마파크에 세울 궁전은 자금성의 태화전을 모델로 만든다고 들었어요. 아라비아식 모스크도 아름다웠을 텐데 말이에요.」
아쉬움이 섞인 말을 듣고서 진혁이 대답했다.
「그럼 함께 과자로 만든 자금성 모형을 보러 가지요. 재밌을 겁니다.」
「좋아요. 제가 일정을 조정할 수 있도록 비서팀에게 말해 둘게요.」
미미가 살짝 웃었다.
◈ ◈ ◈
그날 저녁, 진혁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집 앞으로 나가서 임진희를 만났다.
임진희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진혁을 데리고 들어왔다. 구석 자리에 앉아서 인스턴트커피의 향을 맡으며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커피 맛없다.”
임진희가 피식피식 웃었다.
“진영이 오빠는 아예 원두부터 다른 걸 쓰잖아. 그 커피에 익숙해지니까 다른 커피는 못 마시는 거지.”
진혁이 물었다.
“알면서 왜 나한테 이렇게 맛없는 쓰레기를 먹이는데? 그냥 집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면 될걸.”
“아, 그러면 먹지 마.”
임진희는 진혁이 앞에 있던 커피 컵을 끌어다 가져왔다.
“너는 괜찮아도 내가 조심해야지. 시댁 식구가 미리 연락도 안 하고 아무 때나 드나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임진희가 말했다.
“여기 아메리카노는 별로여도 유자 에이드는 맛있어. 내가 시켜 줄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폰을 조작해 앉은자리에서 주문을 했다. 진혁이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핸드폰 어플로 주문을 할 수 있어?“
임진희가 어이없어하며 진혁을 쳐다보았다.
“너야말로 이런 걸 나보다 더 잘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우리는 아직 종이 카드에 도장 찍어 주잖아. 너도 그렇게 하고 있고.”
“그래, 종이 잃어버리면 끝장이지.”
임진희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진혁이 빠르게 말했다.
“소망 베이커리는 안 돼. 햇살 경로당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은 스마트폰은커녕 피처폰도 없을걸?”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지점의 고객들은 대부분 20~30대야.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니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해서 주문하면 훨씬 편할 거야.”
“그 사람들이 귀찮게 어플을 새로 깔고 싶어 한다면 말이지만 말이야.”
“너는 그 어플은 왜 깔았는데?”
“선물 받으려고. 열 번 마시면 두 잔 주고, 스무 번 마시면 네 잔을 줘.“
“그것도 참고해야겠다.”
진혁은 한 비서에게 문자를 남겼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대해서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임진희가 데스크에 가서 유자 에이드를 두 잔 받아왔다. 진혁이 말했다.
“그래서 여기 왜 왔는데?”
임진희는 고개를 숙이고 유리잔에 담겨 투명하게 반짝이는 탄산수를 내려다보았다.
“나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아빠가 이상해.”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식으로 빙 돌려 말하는 대화가 싫었다.
“이상하다고? 뭐가 어떻게 이상한데?”
“학교 수업 때문에 회의실에서 이틀에 한 번씩 다 같이 영상 통화를 하거든. 회의실에서 집까지는 걸어가도 15분이면 도착할 거리야.”
“그런데?”
“그래서 당연히 아빠가 이미 도착했을 줄 알았단 말이야? 하지만 집에는 엄마 혼자 있고, 아빠는 두 시간 후에 집에 들어갔어.”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임진희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이게 한두 번이 아니야. 월수금 회의를 하는데 맨날 두 시간씩 늦게 집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뭐 했냐고 물어는 봤어?”
“아빠한테 회의 끝나고 뭐하냐고 물어보면 그냥 바로 집에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하셔.”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