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9화
「예? 그, 그럼 저희가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를-.」
진혁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 주십시오.」
진혁은 이미 페드로의 음식도 먹어보았고, 알레한드로가 만든 치즈도 먹어보았다. 굳이 비행시간을 옮기면서까지 먹고 싶은 음식은 아니었다.
냉정하게 거절당한 알레한드로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먹고 싶을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을 테니 기대하시죠.」
그는 페퍼민트 화분을 도로 챙겨 들고서 등을 휙 돌렸다.
진혁은 알레한드로의 동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저 요리사들은 무하마드의 수하들일 뿐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강하고 예민했다. 원한다면 고객들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다. 그렇기에 어느 시점에서 선을 그어야 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 알레한드로의 요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운기조식을 계속했다.
한편 알레한드로는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왕궁의 주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새벽 비행기로 떠나신다고 합니다.」
페드로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반죽 휴지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아무리 빨라도 오전 6시인데. 새벽 몇 시 비행기인지는 알고 있나?」
알레한드로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음식을….」
「거 꽃핀 페퍼민트 화분은 왜 들고 있누?」
「이거는 그냥 제가 쓰려고….」
개인적으로 선물을 주고 싶어서 따로 챙겨 왔다. 알레한드로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자 페드로가 웃었다.
「설마 그걸 선물로 드리려고 한 건 아니지? 뿌리식물은 반입 못 한다. 허브를 선물로 주고 싶으면 말려서 줘야지. 그것도 나라에 따라서 안 되는 데 있을걸?」
「아, 알고 있다고요.」
알레한드로는 페퍼민트 화분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걸어가면서 물 주려고 가져간 거예요.」
페드로는 그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웃어넘겨 주었다.
◈ ◈ ◈
「마지막 가는 길에 우리가 만든 음식을 맛보여 주고 싶었는데요.」
「우리 요리를 먹고 나서 피드백을 해 준다면 그것도 도움이 될 텐데.」
요리사들이 수군거렸다. 꼬미 요리사 한 명이 아쉬워하며 말했다.
「페드로 요리사님이 이번에 생 치즈로 만든 라이스 그라탱이 정말 맛있는데. 따끈따끈한 치즈와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가 촘촘히 배어든 쌀알까지 환상적이잖아요.」
「한국은 쌀을 빵처럼 먹는 나라라고 하면서 일부러 한국식 쌀을 가져와서 요리 연습을 하셨는데. 그걸 못 드시게 되다니 안타깝네요.」
페드로가 고개를 저었다.
「왜 못 드시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예? 새벽 비행기 때문에 안 된다고….」
「이번에도 왕자님 전용기로 돌아가시잖아?」
「어.」
「전용기에 음식 실을 때 내 음식도 같이 실어 달라고 하면 되지. 기장과 승무원들 것까지 넉넉하게 만들어. 4시까지 보내면 나세프가 실어 줄 거야.」
페드로가 양팔의 흰 소매를 걷어붙였다.
「나세프는 누군데요?」
「내 처남. 전용기를 포함해 왕궁의 구매 업무를 처리하잖나. 저번에 봤을 텐데? 자, 자. 쓸데없는 질문을 할 새가 없어. 12인분의 도시락을 2가지 메뉴로 만들자고. 알레한드로!」
알레한드로와 꼬미 쉐프들은 저마다 자기 자리로 흩어졌다.
「페드로 쉐프님.」
「왜?」
「쉐프님은 진짜 천재예요. 라이스 그라탱으로 하실 거죠? 당장 쌀부터 준비하겠습니다.」
페드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라이스 그라탱은 새벽에 먹었을 때 맛있는 음식은 아니야. 오히려 지나치게 부담이 될 수 있지. 그러니 메뉴를 바꾸는 게 좋겠어.」
「그럼 어떤 거로 하시게요?」
알레한드로의 질문에 페드로가 싱긋 웃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쌀 요리를 내놓는다. 그거야말로 지나치게 쉬운 길 아닌가? 나도 자존심이 있는 요리사라네. 그리고 내가 제일 잘하는 요리는 파스타와 피자야. 역시 아침에는 파스타가 제일 좋지.」
그 말을 듣자마자 알레한드로는 페드로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콜드 파스타를 하려고 하시는군요.」
페드로가 자랑하는 경우 화덕 피자의 경우 갓 구워내어 따끈따끈할 때가 제일 맛있다. 차가운 것을 데운다면 조금 낫지만, 갓 구워냈을 때만큼은 못하다.
그러니 화덕 피자를 기내식으로 할 리가 없었다.
또한, 따뜻한 파스타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소스를 흡수해 불어버리기 때문에 도시락으로 포장하기엔 적절치 않다. 소스를 별도로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면이 식어버리면 그만큼 맛이 덜해진다.
하지만 콜드 파스타는 미리 만들었다가 냉장고에 보관한 후에 몇 시간 후에 먹어도 맛있는 요리다.
「그렇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콜드 파스타를 만들면 돼.」
페드로가 두툼한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내가 요리를 할 줄 몰라서 이번에 미각 훈련인지 후각 훈련인지를 받은 게 아니잖나. 예민해진 후각과 미각을 바탕으로 좀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된 거지. 새로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요리를 선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들은 며칠간 혹독하게 시달렸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받았고, 끊임없이 냄새를 맡았다. 꼬미 쉐프들이나 알레한드로보다 페드로가 제일 괴로워했다. 그동안 왕궁 요리사라는 명예로운 지위에 머물면서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왜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떫은맛과 신맛, 은은하게 숨어 있는 맛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이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예민해졌는데 말이지.’
무하마드 왕자는 그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미각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어떤 허브 조각을 내놓아도 척척 구별해 내는 모습은 놀라웠다.
페드로는 임진혁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로 감각과 감각 훈련에 대해서는 천재에 가까웠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커리큘럼을 찾아왔는지 모른다. 일류 와인 아카데미나 조향사 스쿨의 경우 이 정도로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에 최소한 반년에서 일 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임진혁의 도움을 받아 왕궁의 요리사들은 며칠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놀랄 정도로 감각 수준을 높였다.
「우리가 누구지?」
「최고의 미식가 무하마드 왕자님의 요리사들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 실력을 보여주자고.」
「물론입니다, 쉐프!!!」
꼬미 쉐프와 알레한드로가 일제히 대답했다.
◈ ◈ ◈
진혁은 새벽에 전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출발했다. 금일 오후부터 일본 전역의 편의점에 빵이 풀린다. 회의를 겸해서 실제로 판매 중인 영업점들을 방문하는 출장이었다.
그는 비행기 내부에서 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홍보팀의 팀장과 연락하고 싶어. 그리고 강마리오와 김도을에게 법무팀을 연결시켜 주도록 해.」
「법무팀이요?」
「악플러에 대한 대응과 해명을 할 때 원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지. 이 비용은 내 사비로 부담할 거야.」
한 비서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 그룹의 홍보팀에서는 두 사람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진혁과 ‘해와 달’의 이미지만을 우선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진혁은 한 비서에게 지시했다.
「두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 주게.」
「알겠습니다.」
비행은 순조로웠다. 몇 시간이 흐른 후 승무원이 다가왔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내밀었다.
「기내식을 드시겠습니까?」
진혁이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소가죽이 씌워진 메뉴판에는 오늘의 메뉴가 쓰여 있었다.
총 네 종류의 콜드 파스타가 준비되어 있었다. 루오타 파스타와 리코타 치즈, 살라미와 민트를 곁들인 ‘파파야 살라미 파스타’ 그리고 펜네 파스타와 닭가슴살, 올리브유와 디종 머스터드를 곁들인 ‘시저 샐러드 파스타’ 또한 짧고 속이 비어있는 카세레체 파스타에 붉은 고추와 브로콜리, 견과류를 곁들인 ‘태국풍 아몬드 파스타’.
마지막 파스타는 아보카도와 바질, 다진 마늘을 얇고 곱슬곱슬하게 말린 제멜리 파스타 면을 곁들인 ‘갈릭 바질 아보카도 파스타’ 였다.
각 재료의 원산지가 표기된 것을 보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페드로 쉐프가 만들었군?」
승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파파야 살라미 파스타로 주게나.」
「물론입니다.」
한 비서는 다른 것을 골랐다.
「저는 시저 샐러드 파스타로 주세요.」
진혁은 파파야 살라미 파스타에 씌워져 있던 랩을 벗겼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큼직하게 잘린, 신선한 오렌지 빛깔 파파야 조각이었다. 웨지 감자처럼 잘려 있는 파파야는 반들반들하니 신선해 보였다. 루오타 면은 수레바퀴처럼 생긴 짧은 면이다. 수십 개의 조그마한 수레바퀴 모양 면에서 올리브유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작고 빨간 칠리 고춧가루와 후추, 그리고 소금이 알록달록한 작은 점이 되어 상아색 면을 장식했다. 면 사이 사이에 파고들어 있는 얄팍한 진분홍색 살라미 햄 속에도 후추 알이 콕콕 박혀 있었다.
‘화이트 와인 식초와 올리브유, 소금과 후추, 민트 잎과 칠리…, 그리고 쪽파를 썼군.’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페드로의 파스타는 확실히 이전보다 한 단계 발전했다. 그는 새로이 얻은 예민한 후각을 이용해, 단순하고 차가운 요리에 최소한의 향신료를 뿌렸다. 그리고 그 향신료들이 서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정성 들여 배치했다.
진혁은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한 입 맛보았다.
「애썼네.」
짭조름하면서도 살짝 매콤하여 심심하지 않다. 말랑한 면과 쫄깃한 햄, 그리고 아삭한 파파야 조각의 씹는 맛 역시 잘 어울렸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맛보여 주고 싶어 했구나.’
따뜻한 음식을 맛있게 하는 것보다, 차가운 음식을 맛있게 하는 것이 더 어렵다.
몇몇 예외가 아닌 이상 인간은 따뜻한 것을 더 즐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파스타를 보면, 페드로의 요리 실력은 분명 한 계단을 더 올라섰다. 임시 제자의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며 진혁은 다시 포크로 파파야를 찍어 올렸다.
「나쁘지 않네.」
한 비서는 옆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시저 샐러드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어떤가?」
「이거 맛있네요. 왕궁에 있는 내내 음식이 맛있었는데, 이것도 좋아요.」
「어떻게 맛있는데?」
「그냥 맛있는데요.」
진혁은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이전에 왕궁에서 먹었던 것과 비교하면 어떤데?」
「그것도 맛있고 이것도 맛있네요.」
아무리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변은 ‘맛있다’ 뿐이었다. 진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무하마드 왕자가 최고야.’
십여 시간의 비행 끝에 일본의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일본 지사의 직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진혁은 터미널을 나오자마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플랜카드를 발견했다. 그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서 바로 인사했다.
「유키코 쉐프님, 오랜만입니다.」
이런 마중은 지부장인 그녀가 직접 할 일은 아니었다.
「직접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았을 텐데요?」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진혁이 그 사실을 지적하자 유키코가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케이크 위치 대결도 같이 했던 사이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시장하실 것 같아서 제가 특별히 준비해온 게 있답니다.」
그녀가 트렁크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제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케이크 위치에요. 편의점에서 판매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