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86화 (584/656)

제 586화

「포도잼이라. 뜨겁게 팔팔 끓여 식힌 잼과 달리, 이 아이스 와인은 한껏 차갑지 않습니까? 포도를 얼려 만든 아이스 잼이 있다면 이런 맛이겠죠.」

「자네 말이 맞아!」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타르트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무하마드 왕자는 황홀해 하며 목을 길게 빼며 의자에 기댔다. 눈은 감은 채로 고개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잠시도 혀와 이가 쉬지 않았다. 입을 오물거리는 동안 눈가는 주름지고 입꼬리는 치켜 올라가 있어 그가 얼마나 이 쾌락을 즐기고 있는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동안 페드로는 내내 서 있었다. 그는 품위 없이 침을 줄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쉴 새 없이 눈알을 굴렸으며 계속해서 코를 벌렁거렸다.

진혁과 무하마드는 와인 두 병을 깔끔하게 비웠다. 페드로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아랍식 정찬을 먹어 보게나.」

애피타이저는 납작하게 구워낸 피타 빵과 후무스, 그리고 말린 과일과 견과류였다. 달콤하게 절인 자두와 포도, 사과와 바나나가 금테를 두른 사기 접시 위에 얹어져 나왔다. 볶은 호두, 땅콩과 피스타치오, 아몬드가 그 뒤를 따랐다.

조그마한 쌀알처럼 생긴 쿠스쿠스를 얹은 신선한 야채 샐러드.

건포도와 땅콩을 얹어 쌀과 함께 찐 염소 고기 캅사(Kabsa), 칠리와 토마토소스, 레몬 피클을 곁들인 살리그(Saleeg). 살리그는 이탈리아의 리조또와 요리 방식이 비슷했다.

「그냥 우유에 쌀과 닭고기를 쪄낸 게 아니군요?」

「닭고기 육수와 우유에 함께 찌는 거지. 비프 살리그는 쇠고기 육수를 사용한다네. 내 요리사들은 십여 년에 걸쳐 최고의 요리장들에게 아랍 요리들을 배워 왔어.」

처음 먹어보는 아랍 요리들을 하나씩 맛보며 진혁이 짧게 평했다.

「쿠민과 사프란 향이 잘 어울리네요.」

「후무스는 어떤가?」

「쌀밥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릅니다. 아참,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요리사들이 향신료를 직접 키우면서 달라진 점이 있습니까?」

「식탁에 올라오는 허브들이 원래 신선했지만 말이야. 이제는 아예 살아있는 것들만 올라오고 있네.」

「좋은 변화군요.」

무하마드는 진혁이 살인 용의자로 몰렸던 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진혁은 일본과 함께하는 사업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았다. 오로지 음식과 재료, 그리고 맛과 향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이 아스파라거스는 정말 신선하군요.」

「알레한드로는 소의 젖을 짜는 데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야. 아스파라거스와 페퍼민트, 재스민과 로즈마리. 온갖 허브를 생생하게 키워낸다네. 녹색 엄지손가락을 가졌다고 할 수밖에 없어.」

「정원사가 키운 게 아닙니까?」

「물론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들이 따로 있지. 하지만 부엌 앞에 식재료들을 가꾸는 작은 텃밭이 있다네. 요리사들이 관리하는 곳이지. 그곳에는 정원사가 발걸음을 들이지 못한다네.」

「제가 그 밭을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나, 페드로?」

하급 웨이터처럼 앞에 서 있던 페드로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방문하셔도 좋습니다, 임진혁 쉐프.」

처음에 진혁을 보면서 껄끄러워했던 것과는 명백하게 다른 태도다. 임진혁이 뉴욕에 가 있는 동안 무하마드는 요리사들을 호되게 훈련시켰다.

따로 초청한 피트니스 트레이너들은 아침저녁으로 요리사들에게 체력 훈련을 시켰다. 달리 달리기만이 아니라 웨이트 트레이닝도 늘렸다. 정규 근무에 이어 운동을 더 하며 식이 조절까지 하게 된 요리사들은 훅훅 살이 빠졌다. 당장 페드로만 해도 풍만하게 나와 있던 배가 들어가 있었다. 허리둘레가 2인치는 줄어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앞으로 사흘간 더 머물 예정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가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유익한 대화를 마치고 진혁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영상 통화를 했다.

한국에서 홀로 훈련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제자의 진척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주군!』

장유향이 화면 속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세요도 아니고, 안녕하세요도 아니다. 그는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진혁을 반겼다. 임진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주군 소리는 하지 않아도 좋다고 몇 번이나 말했나?』

장유향은 스마트폰을 벽에 기대어 놓고 앞을 바라보며 뒷걸음질을 쳐서 뒤로 여러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카메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군의 은혜를 입어 오늘도 크나큰 진전이 있었습니다.』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장유향이 전부 잡히지 않았다. 흰 머리가 바닥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진혁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는 고두례(叩頭禮)는 교주를 맞이할 때 하는 큰절이다.

『주군 소리도 하지 말고, 절도 하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라』

『예, 주군.』

『….』

진혁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이 고집 센 노인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훈련의 성과는?』

『태양의 원기를 받으며 소주천을 하였고, 달리기를 충분히 하였습니다. 주군께서 하사해 주신 가마를 사용해 오리를 두 마리 구웠습니다.』

장유향은 어떤 향신료를 사용하고 무엇으로 속을 채웠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지난 보름간 온갖 향신료에 도전했으나, 결국 자신이 원래 사용하던 배합으로 돌아왔다. 대신 불길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는 오리 껍질이 얼마나 바삭바삭하며 살결이 얼마나 촉촉했는지 손발을 휘적거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진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제 내가 먹을만한 준비가 되었나?』

『매우 훌륭합니다. 최고의 오리구이지요. 하지만 아직! 주군께 보여드리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

몇 마디 잡담을 더 나눈 후, 진혁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메신저를 확인했다. 황미미가 전송한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상자에 가득 담긴 주방용 식기 사진이었다. 한 벌은 상자 뚜껑이 열려 있어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는 흰색 도자기가 아주 잘 보였다. 접시와 그리고 깊이 있는 둥근 접시, 대접과 밥그릇, 국그릇과 타진 등 온갖 그릇이 얇은 종이와 함께 들어 있었다.

「당신에게 온 선물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진혁은 바로 미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미미 씨, 무하마드 왕자의 선물을 받으셨군요.」

미미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진혁 씨. 500인분의 연회용 식기래요. 서울 저택에는 보관할 만한 자리가 없는데, 혹시 생각해두신 쓸모가 있나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없습니다.」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하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대안을 내놓았다.

「명절이나 잔치를 위해서 보관하실 건가요?」

임진혁은 과연 명절마다 500명을 대접할만한 일이 있을 것인지 생각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줄까요…?」

그렇다고 해도 많은 양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미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는 이 넝쿨 모양 문양은 장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캘리그래피로 쓴 아랍어 글자예요.」

「그렇습니까?」

진혁은 자신이 왜 그릇을 살 수 없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무하마드 왕자의 공식 칭호와 풀네임이 금박으로 박혀 있거든요. 왕족이 자신이 쓰는 식기를 내린다는 건 그만큼 당신을 신뢰한다는 의미지요.」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왕족의 이름과 호칭을 일일이 새겨 놓은 그릇이라면 과연 일반인에게 팔 수 없을 만도 하다. 생각이 어지럽게 요동쳤다.

과거에 도산검림은 교주가 되어 광안마와 혈도객을 호법으로 책봉하면서 귀한 무기를 내렸다. 그 무기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를 뜻했다.

그렇다면 이 그릇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진혁이 턱을 괴었다. 그가 결단을 내렸다.

「와인도 아닌데 묵혀 둘 필요가 없지요.」

「해와 달 전체 지점의 그릇을 교체하실 생각인가요?」

진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울에 있는 저택과 소망시에 있는 집, 그리고 중국에 있는 집과 별장에 있는 그릇들을 교체하죠.」

미미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요, 그게 가장 적절해 보이네요.」

진혁이 투덜거렸다.

「그 양반은 정말이지 쓸데없이 스케일이 커서 말입니다.」

「답례는 하셨나요?」

진혁이 이마를 짚었다.

「…답례도 해야 하는군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미미가 살포시 웃었다.

「고맙습니다.」

「밥 앤더슨 씨의 그림들은 무사히 중국으로 옮겼어요. 다음 달이면 공개적으로 박물관에서 전시를 시작할 수 있답니다. 새로 고용한 큐레이터가 아주 일을 잘해주고 있어요.」

그녀가 뿌듯하게 말했다.

「잘 됐군요!」

「3개월 정도 후에는 순회 전시도 하려고 해요. 뉴욕 현대 미술관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왔어요. 어디를 제일 먼저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정도라니까요. 그래도 서울 먼저 가려고 해요.」

해외 전시는 보통 일이 아니다. 전시 작품을 선정하며 어떻게 공간을 구성하고 진열할 것인지 결정한 후에도 도난 및 손상에 대한 보험에 가입하고 어떻게 운송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입장료와 수익 분배에 대한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렇기에 해외에서 전시를 하겠다고 결정하겠다고 해도 바로 전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 제일 먼저 가려고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미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야 <해와 달>과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할 수 있잖아요? 전에는 중국에서 우선으로 했지만요.」

「아.」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림을 전부 미미 씨가 소유하게 되었군요. 그림만이 아니라 그림에 대한 권리도….」

밥 앤더슨은 자신의 그림이 상업적으로 재해석되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했다. 미술관에서 명화 그림을 인쇄한 머그컵이나 우산, 수첩이나 노트 따위를 판매하는 것을 혐오해 모든 굿즈 판매를 거절해 왔다.

하지만 진혁이 만든 빵만은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그는 과거 밥과 협력해 한정판으로 펜로즈 삼각형을 모티브로 한 빵을 팔기도 했다. 당시 그는 중국과 한국에서 막대한 양의 매출을 올렸다.

그는 밥 앤더슨의 다른 그림들이 어떤 식으로 빵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재밌겠는데요.」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미미가 격려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예, 밥 앤더슨 씨의 그림을 전시하면서 그 그림들과 연관된 빵을 함께 먹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제가 허락할 테니 마음껏 빵을 만들어 보셔요.」

「저만이 아니라 다른 페이스트리 쉐프들도 밥 앤더슨 씨의 그림을 모티브로 빵을 만들고 싶어 할 겁니다.」

「이번에 일본의 편의점에 런칭할 빵 라인에도 추가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좋은 생각이셔요!」

미미가 화사하게 웃으며 서류를 펄럭여 보였다.

「그리고 다음 달이면 학교가 완공된답니다. 진희 씨가 쓴 초보자용 교과서도 검수를 마쳤어요. 아버님께서 쓰신 교과서는 벌써 출간이 됐구요.」

「벌써 그렇게 됐습니까?」

「네, 진혁 씨만 아직 수업 교재를 주지 않으셨네요.」

「잠깐만요. 저도 거기서 수업을 하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