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85화 (583/656)

제 585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무하마드 왕자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이상한 훈련이라고 했나? 잘못 들었겠지. 아주 훌륭한 훈련이라고 했네. 분명히 효과도 있고 말이야. 초반에 견디기가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가 없지.」

진혁은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한 훈련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굳이 아이스 와인으로 만든 디저트를 드실 필요도 없겠군요.」

그가 놀리는 말에 무하마드가 정색했다.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원래 메인 요리 아니었나. 당연히 아이스 와인으로 만든 포도주와 타르트도 먹고 싶네!」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지난번에 왕실에 납품하는 그릇에 관심을 보였지? 내가 그것도 알아봤네.」

무하마드의 요리사들은 납작한 접시와 뾰족한 뚜껑이 있는 전통 그릇을 비롯해 목이 길고 우아한 물병까지, 정교한 도기 그릇을 사용했다.

진혁은 전에 보지 못했던 이 독특한 그릇에 흥미를 보였다.

무하마드 왕자는 자신의 비서에게 그릇 구입처를 알아내 한 비서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대표이사님. 그릇 업체의 연락은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접시는 오직 왕실에만 납품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무하마드 왕자의 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은 전부 한 곳에서 납품한 것이었다. 당장 와인 타르트가 담겨 있는 접시만 해도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흙을 납작하게 구워내 하얗게 바르고 유약을 칠한 접시다.

하지만 식기 공급업체에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금테를 두르고 특정한 넝쿨 모양으로 장식한 접시는 오직 아랍 왕실에서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진혁은 무하마드에게 따로 언질을 주었다. 왕자는 알아보겠다고 하였다.

마침 나와 있는 접시를 보던 진혁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 접시를 제가 살 수 있는지 알아보셨습니까?」

「자네는 못 산다네. 그래서 내가 샀지.」

「예?」

「자네 아내에게 500인분의 식기 일체를 보냈는데. 못 받았나?」

대대로 왕실에 도자기를 납품해 온 업체와 임진혁의 체면 양쪽을 살려주는 해결방식이었다.

「내가 예전에 이미 다 알아서 처리했지.」

무하마드 왕자가 호탕하게 말했다.

「예에?」

「축구팀부터 전용기까지, 그 어떤 것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잖나. 욕심 없는 자네가 갖고 싶다고 한 건데. 당연히 줘야지.」

진혁이 눈알을 굴렸다.

「아니, 잠깐만요. 서너 개만 있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혼수품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그릇과 접시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서너 개? 그렇게 적은 양의 접시로 뭘 할 수 있나?」

진혁이 이마를 짚었다.

「맛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화 요인을 줄이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양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음식이 나가는 접시 역시 맛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그는 무하마드 왕자가 사용할 접시와 자신이 맛 테스트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접시를 같은 것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타르트나 파이, 빵 등을 올려놓기 위한 접시 정도만 있으면 됐다.

무하마드 왕자가 씩 웃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야. 아름다운 식기를 사용하면 그만큼 음식의 맛도 좋아지지. 자네가 나한테 해준 그 많은 일들에 비하면 그 접시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호의는 고맙게 받게.」

「알겠습니다.」

임진혁은 아이스 와인으로 만든 타르트를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금빛 넝쿨 장식이 오묘한 모양으로 얽힌 문양은 접시의 바깥쪽에만 새겨져 있다. 그렇기에 접시 안쪽은 단정한 하얀색이었다. 아이스 와인 타르트는 조금 전에 보여 주었던 레드 와인 베리 타르트와 완연히 달랐다.

레드 와인 베리 타르트는 자줏빛과 핏빛, 보랏빛이 선명하게 어우러진 과일이 올망졸망 올라간 다갈색 타르트였다. 하지만 이 타르트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페이스트리 생지 위에 옅은 상앗빛 크림이 올라가 있어 훨씬 톤이 밝았다. 꿀에 절여서 잘라 놓은 반구형의 과일은 조각마다 큼직하니 하나씩 박혀 있었다.

「이 과일은 뭔가?」

‘복숭아라고 하기에는 생김새가 다른데. 사과처럼 단단한 과일을 연하게 한 것 같고. 사과와 와인 타르트라….’

진혁이 바로 대답해 주었다.

「향신료를 곁들인 한국산 초록 배와 아이스 와인 타르트입니다.」

「한국산 초록 배라고? 그런 과일은 처음 들어보는데.」

무하마드 왕자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는 과일과 향신료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렇기에 조롱박 모양의 서양배는 당도가 높고 무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양 배는 껍질이 노란색이고 단단하며 아삭하고 서양배보다 덜 달다.

그냥 먹기에는 동양 배 쪽이 좋지만, 오븐에 익히거나 굽는 경우에는 당도가 높은 서양배 쪽이 훨씬 더 맛있어진다. 그렇지만 초록 배라는 품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과일은 다 맛보았다고 생각하는 미식가에게 있어 새로운 과일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진혁이 보충해서 설명해 주었다.

「초록 배는 이번에 한국의 배 농장에서 새로 내놓은 개량 품종입니다.」

황미미는 결혼하면서 진혁의 지인들인 녹색 농부 조합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연구원을 고용하도록 설득하고 연구비를 투자해주었다. 농장주들은 토종 종자를 교배하며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였다. 오백여 년간 키워오던 강화 장군감은 좀 더 작고 당도가 높은 새로운 ‘엄지장군감’으로 거듭났다. 감과 고구마만이 아니라, 양배추와 사과 그리고 배 역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초록 배는 가장 크게 성공을 거둔 작물이었다. 작고 달콤하면서도 껍질을 벗기기 쉬운데, 껍질이 초록색이다. 열매당 500g 이상의 크기를 갖고 있으며 맛 또한 뒤지지 않았다.

무하마드 왕자가 입맛을 다셨다.

「달콤한 아이스와인과 달콤한 과일이 어울리나?」

「초록 배는 달콤하기만 한 배가 아닙니다. 산미가 강하고 뒷맛이 있지요.」

진혁은 아이스 와인병에 손을 가져갔다. 퐁 하고 기분 좋게 코르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담담하게 투명한 와인 글라스에 황금빛 액체를 따랐다. 무하마드 왕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먹는 것이 제일 좋은가?」

무하마드가 와인잔을 손에 들어올렸다. 이제 막 입에 가져가려는데 진혁이 입을 열었다.

「아이스 와인을 좋아하십니까?」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네.」

페드로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아시는 대로 아이스 와인은 언 포도알로 만드는 와인입니다. 처음에는 냉해를 입어 얼어 버린 포도들을 골라내어 그대로 압착해서 포도즙을 짰다고 합니다. 발효가 끝난 후에도 리터당 최소 100g 이상의 당이 잔류하기 때문에 훨씬 달게 느껴집니다. 프랑스보다는 독일이 유명하지만,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그 술은 역사적으로도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아이스 와인이죠.」

무하마드 왕자가 피식피식 웃었다.

「페드로가 아이스 와인을 좋아한다네.」

「그렇습니까?」

「얼마나 좋아하는지, 전에는 나까지 끌고서 포도 농장 견학까지 갔네.」

진혁이 피식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이스 와인 농장에 견학을 갔다고요?」

왕족이자 사업가인 무하마드 왕자는 나름 괴짜로 유명했다. 무하마드가 힐긋 쳐다보자 페드로가 설명했다.

「해가 비치면 얼었던 포도가 녹아내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낮에 포도를 딸 수가 없습니다. 가장 추운 날 포도가 속까지 얼어붙었을 때 한밤중에 맨손으로 포도를 일일이 따서 골라냅니다. 손전등 빛 때문에 얼음이 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희미한 빛 속에서 고르죠. 독일의 에센 농장에서는 직접 딴 포도를 아이스 와인으로 만들어서 바로 병에 담아 주는 서비스를 합니다.」

아이스 와인용 포도나무를 기르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일이었다. 사람 손이 많이 갈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이 받쳐 줘야 한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가 완전히 얼어붙을 정도로 기온이 낮아야 하나 포도나무가 매년 얼어 죽을 정도로 낮으면 안 된다. 포도 열매가 어는 것과 동시에 나무까지 얼어 버린다면 지나치게 큰 손해가 된다. 그래서 아이스 와인은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의 일부 지방에서 한정적으로 생산되어 왔다.

「그렇게까지 아이스 와인을 좋아하시는지 몰랐군요.」

진혁이 놀리듯이 말하자 무하마드 왕자가 고개를 저었다.

「단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페드로는 코를 벌렁거리며 서 있었다. 아이스 와인과 타르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냄새 한 줄기라도 맡으려고 한껏 숨을 들이마시는 모양이 우스웠다. 가슴을 부풀렸다가 다시 콧김을 내뿜는 모양을 보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는 페드로에게 아이스 와인을 권하지 않았다.

「타르트를 드실 때 페이스트리 부분과 배, 그리고 크림 부분을 한꺼번에 드셔야 합니다.」

대신 무하마드에게 타르트 먹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아, 물론이지. 먹어도 되지?」

진혁은 흐뭇하게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 단맛을 더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새로운 맛을 추가했다.

무하마드 왕자는 접시째 타르트 조각을 들어 올렸다. 나이프로 자른 단면을 확인하고, 얇은 파이 껍질과 뭉클한 크림의 냄새를 맡았다.

「커스터드 크림인가?」

「드셔 보십시오.」

왕자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타르트 조각을 입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암흑실을 떠올렸다.

‘나는 지금 식당에 있는 것이 아니야. 어두운 방에 있어.’

처음에는 두렵고 무서우며 공포스러웠던 어둠의 방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 들어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심지어 자신이 데리고 있는 요리사들이 그곳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왕궁 내에 암흑실을 설치했다.

그곳에 들어가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잘 갈린 칼날이 된 것처럼 감각이 예리해진다.

‘꿀에 절인 배는 확실히 달아. 꿀맛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산미가 있어. 크림은 뻑뻑하지 않고 살살 녹는데….’

연하게 씹히는 배의 식감, 그리고 꿀에 절인 배를 포옥 감싸고 있는 커드 크림과 얇고 파삭파삭하게 부서지는 과자빵의 질감.

포도잼처럼 진득하고 달콤한 향이 순간 지나가고, 부드러운 크림이 입안에서 침과 함께 섞이며 페이스트리를 녹였다.

「커스터드 크림과 달콤한 꿀맛 배를 이어주는 맛이 있군.」

개성 있고 독특한 두 가지의 맛.

그 사이에 다리처럼 연결해주는 다른 맛이 두 가지 있었다. 농축된 포도잼처럼 느껴지는 맛과 익숙한 향신료의 맛이었다.

진혁이 일부러 설명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무하마드 왕자는 그 수수께끼에 정답을 내놓았다.

「계피인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습니다.」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타르트를 먹어치운 무하마드 왕자는 아이스 와인을 마셨다. 반병의 아이스 와인을 만들려면 언 포도를 10kg 나 압착해야 한다. 농밀하고 진한 단맛이 혀를 흠뻑 적셨다.

「타르트는 그다지 달지 않아.」

「아이스 와인이 달콤하니까 상대적으로 덜 달게 느껴지는 겁니다.」

「허, 포도잼 같은 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커드 크림이라고 생각하신 그 크림이 아이스 와인으로 만든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