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4화
바로 식사를 할 예정이었으나 무하마드 왕자가 고집을 부렸다.
「그 와인 타르트부터 먹자고.」
1945년산 로마네 콩티.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 상위 5위 안에는 꼭 드는 레드 와인이다.
프랑스 왕가의 방계 왕족이었던 콩티 왕자는 1760년 부르고뉴 지역의 작은 포도밭에 ‘로마네’라는 이름을 붙이고 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소수의 직속 관리인이 직접 돌보는 포도밭에서 손수 골라낸 우수한 포도만을 발효해 일일이 포도주로 만든다. 면적이 작은 만큼 연 생산량도 많지 않다. 500여 상자, 4000여 병의 포도주만을 한정해서 생산한다.
1945년 ‘포도 농장 로마네’의 포도나무들은 미국산 진드기 때문에 병충해를 겪었다. 결국, 뿌리부터 썩어 버린 포도나무를 전부 뽑아서 새로 심어야 했다.
1760년부터 키우던 포도나무들이 그해 전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오백여 병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 1945년산 포도주는 경매에 나올 때마다 점점 더 가격이 올랐다.
밥 앤더슨은 한 병에 6억 원이 넘는 가격을 지불하고 이 포도주를 구매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마시지 못하고 갔다.
「이 타르트를 함께 먹을 사람으로 나를 택해 줘서 고맙네.」
무하마드는 입맛을 다시며 식당 문을 열었다. 진혁은 이전과 확연히 바뀐 식당의 모습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 왕자와 귀한 손님이 온다고 들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식탁을 깔끔하고 우아하게 장식했다.
단순한 레이스로 장식된 순백의 비단 식탁보와 우아한 붉은 장미가 화사하게 피어난 꽃바구니, 그리고 탁자 가장자리를 장식한 은촛대까지 완벽했다. 낮은 볼륨의 현악기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샹들리에의 유리 전구는 음식의 색감을 돋우는 LED 전구로 바뀐지 오래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가르친 학생을 칭찬했다.
「실내 장식이 오늘 먹을 음식과 잘 어울리는군요.」
무하마드 왕자가 자리에 앉으며 뿌듯하게 말했다.
「자네가 이전에 ‘미식’은 분위기의 영향도 받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레스토랑 개업 시 실내 장식을 전문으로 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고용했지.」
왕자는 이탈리아 요리를 먹을 때에는 이탈리아의 삼색기와 지도 등을 이용한 실내 장식을 하는 등, 국가별로 신경을 쓰고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신경 많이 쓰셨습니다?」
「물론이지. 자네가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데, 당연히 인테리어부터 바꿔야 하지 않겠나? 음식은 단순히 후각과 미각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시각과 청각, 촉각에도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조명과 배경, 음식을 내놓는 그릇과 테이블의 장식, 조명과 식탁, 의자에 따라 맛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무하마드가 시작한 이야기를 진혁이 이어받아 마무리했다.
페드로가 카트를 밀면서 다가왔다. 카트에는 손을 씻을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페드로가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무하마드 왕자와 임진혁을 대면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실 것은 어떤 것이 좋으시겠습니까?」
투명한 유리 수반 속 물에는 반 조각난 레몬이 생생하게 잠겨 있었다. 진혁이 레몬수에 손을 씻으며 말했다.
「레드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용의 잔을 2개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와인은 어떤 것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직접 가져왔으니 괜찮습니다.」
진혁이 손에 들고 있던 보스턴 캐리어백을 내려놓았다. 그는 그 안에서 타르트 상자부터 꺼냈다. 진혁이 내기로 보호하고 있던 타르트는 신선한 그대로였다.
식탁 위에 타르트 상자가 올라오고, 진혁이 와인 병을 꺼냈다.
우아한 병목에 붙어 있는 오래된 라벨을 읽은 페드로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특급 호텔을 비롯해 왕궁에서 일 해 온 그는 소믈리에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포도주에 대해서 잘 알았다.
하지만 1945년산 로마네 콩티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 제, 제가 디캔팅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페드로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수십 년 전에는 포도주를 정제하고 거르는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래된 포도주를 열 때에 침전물을 병 안에 남겨두며 동시에 맛과 향을 풍부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용기에 옮긴다. 그러한 행위를 디캔팅이라 한다.
이 로마네 콩티 역시 수십여 년이 지난 부르고뉴산 붉은 포도주이므로 디캔팅이 필요했다.
하나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따로 디캔팅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와인의 향과 풍미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와인 속에 붙잡아 두는 일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에게 굳이 맡기지 않았다.
페드로는 아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는 뚜껑을 열기 전에 먼저 와인병 입구 주위에 아주 작은 공기의 흐름을 만들었다.
진혁은 미리 준비되어 있던 코르크 따개를 이용해 코르크를 땄다.
딸각 하는 소리가 고요한 식당에 울려 퍼졌다.
「역시 대범해.」
무하마드 왕자가 칭찬을 했다. 페드로는 진혁이 능숙하게 와인 병을 여는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믈리에 훈련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하마드와 페드로가 군침을 삼키며 바라보는 동안 진혁은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느라 바빴다.
오로지 진혁만이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포도 향 입자들이다.
코르크 마개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냄새 입자들이 안개가 피어오르듯 뭉게뭉게 병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까 미리 만들어 둔 공기의 흐름에 갇힌 입자들은 병 입구 주변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진혁이 술을 따랐다.
빙그르르 딸려온 포도 향은 중력에 딸려 가며 쏟아지는 파도 속에서 포도주 속으로 다시 갇혔다.
진혁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무하마드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손을 뻗었다.
「타르트를 먼저 드시고 난 다음에 드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래?」
무하마드 왕자가 투덜거렸다.
「향이 날아갈까 봐 지금 빨리 마시려고 했지.」
진혁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가 포도 향을 와인 속에 가두어 둔 이상 조금 늦게 마시는 것 정도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다른 이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바로 해 드리죠.」
「자네는 포도주를 즐기지 않는가?」
「저보다는 미미 씨가 좋아합니다.」
무하마드 왕자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물었다.
「아내와 함께 마실 술은 남겨 놓았겠지?」
「하하.」
당연히 오기 전에 미미에게 줄 술은 따로 보내 두었다. 밥 앤더슨이 남겨 준 술은 4병이었는데 한 병은 제임스, 아니 얼 존스가 마셔 버리고 내부를 다른 싸구려 술로 채워놓았다.
남은 세 병 중 한 병이 미미에게 갔고, 한 병은 진혁이 타르트를 구울 때 썼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개봉한 술이 마지막이었다.
투명한 와인잔에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찰랑하니 잠겼다. 그리고 진혁은 보랏빛 블루베리와 새빨간 라즈베리가 담뿍 올라간 타르트를 상자에서 꺼냈다. 그는 칼로 타르트를 조각내어 왕자에게 밀어주었다. 은접시 위에 올라간 알록달록한 타르트는 향긋한 베리 향을 풍겼다. 후각이 예민해진 무하마드 왕자는 입을 다물고서 눈앞에 있는 타르트에 코만 가까이 갖다 댔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아.」
「원래 알코올은 오븐에서 굽는 도중에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아까운 짓을 했단 말이지」
타르트는 하나가 아니었다. 진혁은 다른 상자에서 상앗빛 뽀얀 크림이 올라간 커드 크림 타르트도 꺼냈다. 무하마드 왕자가 입천장을 핥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걸 먼저 먹는 게 좋겠나?」
왕자는 은 포크를 쥐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리 와인 타르트를 먼저 한 조각 드시고 난 다음에 와인을 한 모금 드십시오.」
「알겠어.」
무하마드 왕자가 입을 벌렸다.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진한 블루베리 향이었다. 블루베리가 톡 터지고 라즈베리 향이 감싸오는데 묵직하니 깊은 뒷맛이 느껴졌다. 진중하고 무거운, 발효된 포도의 맛이었다.
‘이래서 와인 타르트구나.’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바삭바삭하게 구워 낸 파이지에도 포도의 맛이 깊이 배어 들어가 있었다.
침이 폭포수처럼 흘러 입안을 흥건히 적셨다. 녹아내린 베리와 포도와 타르트 생지는 교향곡처럼 조화를 이루며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지나치게 달지 않으면서도 짙은 포도향을 머금은, 훌륭한 디저트였다.
무하마드 왕자는 눈을 감았다.
「커흠, 흠.」
그는 진혁이 아직 자신 몫의 타르트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무하마드는 전에도 와인 타르트를 맛본 적이 있었다. 스위스 여행을 하면서 스위스의 명물인 스위스식 와인 타르트를 맛보았다. 하지만 그때 먹었던 것과 이 타르트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때는 그냥 술 향기가 조금 나는 뻑뻑한 빵이었는데 말이야.’
감히 그때 먹었던 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맛이었다. 금속이라 치자면 구리 합금과 순금 정도의 차이가 났다.
그러나 지나치게 농밀한 탓인지 무언가 부족한 느낌도 들었다. 무하마드 왕자는 눈을 깜빡이며 코를 킁킁거렸다.
‘맛있는데 더 먹고 싶다. 뭔가 부족해.’
그리고 그는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부터 너무나 마시고 싶었던 술이다.
「왕자님은 전에 로마네 콩티를 마셔본 적이 있으시지요?」
황홀경에 빠져 있던 무하마드에게 페드로가 말을 걸었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옆에 서 있었다.
혹여 포도주 한 방울, 타르트 한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하마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10여 년 전에 한 번 마셔본 적이 있지.」
그러나 그는 귀한 술을 요리사에게 권하지는 않았다.
왕자는 술잔을 입으로 가까이 가져가 먼저 향을 맡았다. 그리고 술잔을 한 차례 빙글 돌리고 나서 다시 향을 맡았다.
「그때는 나도 젊었는데 말이야.」
입안에는 아직 달콤한 타르트의 뒷맛이 남아 있다. 그렇지만 무하마드는 굳이 물을 마셔서 입안을 헹궈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술잔을 기울여 적포도주에 혀끝을 갖다 댔다.
「!!」
짙디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포도주로 목욕하는 것처럼 강렬한 향기였다. 십여 년 전에 마셔 보았을 때에는 분명히 이 정도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숙성되어 농밀하고 농후한 향기였다.
방금 전에 맛보았던 달콤한 포도 맛 타르트. 거기서 무언가 빠져 있었던 것이 지금 방금 완전하게 충족되었다.
그는 진혁이 어째서 타르트를 먼저 먹고 와인을 마시라고 했는지 완전히 이해했다.
「흐으.」
저절로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겁지겁 와인을 마셨다.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싼 적포도주는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목을 넘어갔다.
무하마드는 곧 포도주를 전부 마셔 버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페드로는 조용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아쉬움과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임진혁.」
「예?」
자신 몫의 타르트와 포도주를 맛보고 있던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무하마드 왕자가 말했다.
「자네를 만나서 이상한 훈련을 받기로 한 건 정말로 내 인생 최고, 최대의 행복이야.」
「이상한 훈련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