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3화
농경생활을 시작한 고대 국가 시절부터 인류는 밀가루와 물만 가지고 전통적인 빵을 만들어 왔다.
이스트는 물론이고 버터와 소금이 없을 때에도 밀가루를 떡처럼 물에 부쳐 먹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은 삼천여 년 전부터 밀가루와 물 외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빵을 만들어 왔다.
‘납작한 식사용 빵을 만들면 되겠군.’
한쪽 구석에 설치되어 있던 정수기에서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따뜻한 물과 밀가루가 뭉치며 섞여 허공에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동글동글하니 덩어리지게 뭉쳐진 반죽은 여섯 개로 나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주무르듯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어나고, 마침내 둥근 구형으로 정착했다.
반죽이 바로 납작하니 얇게 펴지며 늘어났다. 부침개처럼 납작해진 반죽이 춤을 추듯 휘어지며 팔랑거렸다.
그리고 이제 익힐 차례다.
진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주변의 공기가 후끈후끈해지며 반죽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스트가 없어 부풀어 오르지 않은 빵이 점차 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계속해서 열이 가해지자 뜨거워지며 갈색으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허공에 떠 있던 빵들이 저마다 제자리를 찾아갔다.
전부 구워지는 데에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소나기 오는 날 파전처럼 납작한 빵이 고슬고슬하니 바삭하게 구워진 모양을 보니 진혁은 확연히 기분이 나아졌다.
‘미미 씨가 좋아하실 거야.’
효모 없이 구워내 부풀어 오르지 않은 이 빵은 보통 종교적인 제의에 쓰인다.
진혁은 유대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때때로 수수한 빵을 만들어 먹는 날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진혁은 빵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담백하니 쫄깃하다. 빵의 가장자리가 파스스 부스러지는데 안쪽은 졸깃하게 씹혔다. 그릇이나 도마 따위가 닿지 않아 순수한 빵의 맛만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무하마드 왕자에게도 먹여 보고 싶은데.’
진혁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는 메신저를 가득 채운 수십여 장의 사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왕자가 자신이 궁전의 내부 인테리어 장식을 어떤 식으로 바꾸었는지 일일이 사진을 찍어 진혁에게 보냈다.
「허브가 늘었군.」
왕자는 꼬마 요리사들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요리사들을 위해 어떻게 인테리어를 교체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요리사들의 침실 곳곳이 허브 화분을 갖다 놓았어도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냄새를 구별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지 않았다.
무하마드 왕자는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진혁이 돌아오기 전에 명백한 성과를 이루어 제자를 훌륭하게 키웠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왕자궁의 복도와 거실, 그리고 응접실과 서재를 포함해 요리사들이 드나드는 모든 통로에 허브 화분을 갖다 놓았다.
식당의 바깥쪽, 요리사들의 출근길에 조성된 정원에도 변화가 생겼다.
정원사는 무하마드 왕자의 요청대로 모든 것을 갈아엎었다. 알록달록한 꽃이 피던 화원은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였다.
연둣빛과 연초록, 그리고 짙은 녹색 잎사귀와 줄기들. 녹음이 우거진 정원은 이전과는 명확히 다른 색깔을 띠었다.
무하마드는 자신이 정원의 소로를 걸으며 검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으로 V 자를 그리는 사진을 보냈다.
「다양한 향을 풍기는 식물 위주로 다시 꾸몄어. 눈이 아니라 코로 정원을 즐길 수 있다니까. 어서 와서 보고 싶지 않나?」
지나치게 많은 사진 후에 줄줄이 써 있는 메시지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하마드는 꼼꼼하게 전용기를 사용할 수 있는 스케줄까지 작성해서 보냈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출발해야겠군.」
진혁은 언제 가겠다고 따로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다만 전용기 스케줄 정보는 한 비서에게 공유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죽이는 것은 너무나 쉽다.
뇌혈관을 터트려도 되고, 심장을 쥐어짜도 좋다. 시신조차 찾지 못하도록 산산조각 내 죽일 수도 있었다.
오랜 고통을 주고 싶다면 사지 일부의 말초 신경이나 혈관에 문제를 만들어 주어 절뚝거리게 하거나 손을 못 쓰게 할 수도 있다. 섭혼술을 통해 자살을 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갓 구운 빵이 향긋한 냄새를 솔솔 풍겼다. 이 빵은 낮과 생명, 따뜻한 가족을 연상케 했다. 밥 앤더슨이 그리워하던 수프와, 그가 그리워하던 어머니를 떠오르게끔 하였다.
진혁은 마음을 바꾸었다.
◈ ◈ ◈
그날 저녁, 유튜브에 영상이 한 편 올라왔다.
한때 제임스라고 자칭했던 얼 존스가 유튜브에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범행에 대해 고백하는 동영상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이제까지 저질렀던 살인에 대한 정보를 술술 이야기하는 영상은 금방 20만 명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가 고백한 사실들이 진짜가 아니라고 믿었다. 아주 잘 만든 거짓말이라고 시끌시끌해졌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료들을 검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추가적으로 영상을 촬영해 올리는 다른 유튜버들도 생겼다.
그리고 그가 말한 살인 사건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순식간에 조회 수가 치솟았다.
조회 수가 100만 뷰가 되어갈 무렵, 그는 직접 경찰에 방문해 진술서를 제출했다.
밥 앤더슨을 비롯해 그가 저지른 수 건의 살인에 대하여 모든 것을 적어낸 자필 진술서였다.
살인을 저지른 날짜와 수단, 그리고 시체가 숨겨진 장소를 비롯하여 모든 정보가 꼼꼼하고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유튜브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료들도 있었다.
그는 변호사를 대동할 수 있는 권리도 포기했다.
뉴욕 경찰국에서는 협조적인 범인을 구속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다른 주에서 저지른 살인 사건 또한 있었기 때문에 거의 사형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경찰서에 오기 전 살인 등의 행위로 얻은 자신의 재산을 이미 자선 단체에 기부한 상태였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마음이 변한다잖아.」
「재산도 다 기부했다는데 반성해서 그런가.」
「아니지. 그냥 죽기 전에 자랑하고 싶은 것 같던데?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말 따위가 하나도 없어.」
「말기암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네티즌들이 웅성거리며 <얼 존스 대 뉴욕주> 사건은 크게 화제가 되었다.
범인이 자백하면서 공범 행위를 한 피에르 역시 구속되었다.
그러나 얼 존스가 저지른 12건의 완전 범죄 쪽이 워낙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피에르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피에르를 통해 아들 헨리가 받을 유산 역시 집행이 정지되었다.
황미미는 익명으로 헨리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2주가 더 지나고 빌 파커의 도박 중독 치료의 첫 세션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진혁은 아랍으로 돌아갔다.
무하마드 왕자는 한껏 진혁을 반겼다.
「어서 오게나! 내가 자네를 위해서 성찬을 준비해 두었지.」
「그렇습니까?」
「자네가 보낸 스위스식 와인 타르트도 잘 받았네. 웬일로 이번에는 치즈가 아니어서 놀랐지.」
「오래된 포도주가 많이 생겼습니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얼 존스가 포도주를 유산으로 받을 수 없게 되면서 그 포도주들은 다른 유산 상속자들에게 분배되었다.
유산 상속을 맡은 변호사가 신탁처럼 판매를 대행하여 돈으로 분배하게 되었는데, 진혁이 그냥 전부 사 버렸다.
덕분에 거액의 돈을 얻게 된 빌 파커는 빚을 거의 갚았다.
「잠깐, 자네 혹시 무슨 포도주로 타르트를 만들었나?」
무하마드가 흰자위를 번득이며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 드 마리아입니다.」
「이봐, 그걸로 타르트를 구웠다고?! 그건 디저트에 곁들여 마시는 와인이잖아! 같이 먹어야 할 걸 구워 버리면 어떡하나!」
진혁이 멀뚱하니 무하마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다지 술을 즐기지 않았다. 만독불침이라는 특성상 아무리 독한 술이라고 해도 취하지 않아서 주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향을 즐기는 셈이다.
무하마드 왕자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설마 다 구워 버린 건가?」
하지만 무하마드는 달랐다. 그는 오래된 포도주들을 좋아했고, 때로는 고가의 포도주 경매에 참여해 낙찰을 받기도 했다.
「로열 드 마리아는 나도 낙찰받고 싶었던 술이란 말일세.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대리인을 보냈는데 그 무능한 놈이 고작 몇천 달러를 아끼겠다고 내 술을 날려 먹었지 뭔가.」
그가 나라를 잃은 것처럼 탄식했다. 진혁이 손짓하자 한 비서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무하마드 왕자님, 임진혁 대표이사님께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상자 형태만 봐도 알아볼 수 있다. 길쭉한 포장 상자를 본 무하마드가 반색했다.
「오! 고맙네」
「덕분에 빠르게 돌아왔습니다.」
진혁이 선물로 준비한 포도주는 한 병이 아니었다. 한 비서는 이전의 경매 내역을 확인하여 무하마드 왕자가 관심을 보였던 포도주 위주로 선물을 골랐다.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귀한 술을 여러 병 선물 받은 무하마드가 크게 기뻐했다.
「고맙네, 고마워!」
그는 신이 나서 정원으로 진혁을 안내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정원을 실제로 보자 옅고 진한 녹색 식물로 가득해 이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혁은 아마존의 정글처럼 바뀌어 버린 정원을 보며 감탄했다.
「온갖 냄새가 뒤섞여 있군요.」
「사실 내 의도하고는 조금 다르긴 해. 이렇게 섞이고 엉켜서 짙은 향을 내뿜을 줄은 몰랐네.」
무하마드 왕자가 머쓱하게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아니어도 그들에게 나중에는 도움이 될 겁니다. 왕자님에게는 지금 당장 도움이 될 거고요.」
진혁의 이야기를 들은 무하마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자네는 설마 여기에 있는 식물들의 향기를 전부 구분할 수 있나?」
「그렇죠. 이름은 몰라도 향은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뒤섞여 있는데?」
「바깥쪽에 있는 이 잎들을 하나씩 따로 분리해서 얼려 보시면 좀 더 구분하기 쉬울 겁니다.」
「하지만 이 잎들은 식용이 아닌데.」
무하마드 왕자는 먹을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열대 야자수 잎은 식용이 아니지만, 음식에 향을 추가하기 위해 장식으로 쓸 수는 있습니다.」
정원을 걸어 식당으로 향하며 왕자가 말했다.
「저녁 식사부터 할 거지? 일단 요리사들을 소집하겠네.」
「지금 바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따로 만나죠.」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무하마드가 물었다.
「아니, 우리 애들을 보고 달리기도 같이 하고 밥도 먹을 셈이 아니었나? 미각 테스트도 하고 말이지.」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동영상 일기를 매일 매일 찍어서 보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새삼스럽게 확인할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식사를 하러 가지요.」
진혁은 로열 마리아만을 타르트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밖의 고가 포도주 중에서도 관리가 잘 되고 향이 풍부한 것이 있다면 가격과 상관없이 전부 타르트로 만들어 버렸다.
포도주 애호가들이 알면 기겁할 일이었다.
「로열 드 마리아로 만든 타르트라, 기대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한데.」
무하마드 왕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진혁이 말했다.
「그것만으로 타르트를 구운 것은 아닙니다.」
「잠깐, 또 어떤 포도주를 쓴 건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