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2화
복수(復讐)하다.
원수를 되갚아 주다.
진혁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을 암살하려고 한 자들을 살려 두지 않았다. 암살자에게 의뢰한 자가 있다면 시행범과 의뢰자 양측을 모두 죽였다.
일월신교의 교주이던 그는 항상 과하게 손을 써야만 했다. 그가 업수이 여겨진다는 건 일월신교가 얕보인다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에 과해야만 했다.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았다.
옛사람들은 그보다 스케일이 컸다. 진나라의 경우 반역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구족(九族)이라 하여 일가 친척을 모두 죽였다.
육촌이나 팔촌도 멀게 느껴지는 시대에 구족은 까마득하다. 사촌과 육촌, 팔촌을 포함하여 고조부와 고조모, 그리고 현손을 포함했다.
또한 ‘구족’만이 아니라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와 아랫사람들을 전부 포함하니 그 수가 적지 않았다.
「현대 사회의 처벌이라……」
뉴욕주는 사형을 폐지했으므로 살인죄라고 해도 종신형이다. 진혁은 펜을 내려놓고 종이를 움켜쥐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가 구겨지며 찢어져서 산산조각 나 가루가 되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 보답할지 마음을 정했다.
「임진혁 대표이사님, 손님이 왔습니다.」
진혁은 문을 열었다. 제임스가 미소를 지으며 방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임진혁 쉐프님, 오랜만입니다. 좋아 보이시네요.」
의례적인 인사에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눈 밑이 그늘져 있는데. 어젯밤에 잠이라도 설쳤나 보군?」
제임스는 호감 가는 청년이었다. 180cm는 되어 보일 키에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를 짧게 잘랐다. 단정하게 양복을 차려입었다. 헬스클럽을 다니면서 관리한 덕분에 과하지 않게 적당히 근육도 있었다.
빌 파커가 훌륭한 사무직으로 보인다면 제임스는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한 전문직 회계사처럼 보였다. 온화해 보이면서도 자신의 분야에서는 제대로 일할 것처럼 보이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LA 출신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의 학교 생활에 대한 기록은 빈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마이클 타카시는 제임스의 하이 스쿨과 칼리지 시절을 포함한 과거까지 깔끔하게 조사해 왔다.
이제 진혁은 제임스의 고등학교 때 성적표부터 시작해서 그가 어떤 사고를 치고 뉴욕으로 도망쳐 왔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밥 앤더슨 씨가 그렇게 가고 나서 마음이 편하지는않았습니다. 전부터 계속 몸이 좋지 않아 언젠가 가실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실제로 아버지처럼 모시던 분이 가시니 잠드는 것이 어렵습니다.」
제임스가 콧잔등을 만지며 말했다. 진혁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그리고 고가의 포도주들을 단시간에 판매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테지.」
그는 굳이 제임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압적이고 빈정거리는 듯한 말에 제임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며 눈을 깜빡였다.
「임진혁 쉐프님의 포도주 창고를 빨리 비워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다들 관심을 보여주고 계셔서 꽤나 좋은 거래를 몇 건 할 수 있었습니다.」
「자,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지.」
진혁은 제임스에게 손을 뻗었다.
「예, 제가 목록을 준비해 왔습니다.」
「중학생 때 화재 사건으로 부모와 형을 잃었지. 그리고 양부모에게 입양이 되었어.」
중학생 소년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부모와 형을 잃고 가장 가까운 친척인 삼촌 부부에게 가게 되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부유했던 삼촌 부부 역시 교통 사고로 생명을 잃고, 자네가 홀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지.」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일이 반복되자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좁은 동네에서 또래들은 소년을 피했고, 어른들은 수군거렸다.
그 교통 사고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그렇다면 화재 사고는 어땠을까?
제임스는 손끝을 떨거나 눈을 가늘게 뜨지 않았다. 전혀 동요하는 모습 없이 태연했다. 그는 진혁에게 물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전 제임스입니다.」
「얼, 자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아.」
소년은 자신이 태어났던 동네를 영원히 떠났다.
「이름을 바꾸면서 뉴욕으로 왔고. 어떤가, 얼 존스?」
그는 호감가는 청년이었다. 이름을 바꾸며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마이클 타카시는 19살부터 20대 후반까지 얼 존스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아냈다.
30살의 제임스가 뉴욕에 나타났다. 그는 연상의 여인과 결혼을 했고, 아내가 사고로 우연히 죽었다.
「베로니카 어빙이라는 이름은 기억하나?」
진혁이 죽은 이름을 언급했다. 얼 존스가 움찔했다.
「사별한 제 아내입니다.」
「천애 고아였고 꽤 부유했지. 자네가 그 재산을 혼자 물려받았고 말이야.」
「그래서 독신으로 계속 지냈습니다.」
그 이후 ‘제임스’의 주변에서는 유사한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비서 분야에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왔다. 그리고 추천을 받아 밥 앤더슨의 비서가 되었다.
「설마 아내가 죽은 게 제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려고 합니까? 그건 사고였습니다. 여름 바다 때문이었지요. 그 이후에 저는 무서워서 바다에도 못 가고 있습니다.」
그 사고는 공식적으로 이안류(離岸流)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찰들이 조사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사고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제임스가 사실 얼 존스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이 사건은 다시 주목받게 될 것이다.
제임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하신 게 분명합니다. 죽은 제 아내 일까지 꺼내시다니 아주 모욕적이군요. 지금 거래를 하시려는 생각이 없으시다면 전 이 자리를 떠나겠습니다.」
「화를 내는 타이밍이 너무 늦어.」
「예?」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낸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아. 오히려 벌컥 화를 내면서 따지고 묻기 마련이지. 자네처럼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음에 거짓말을 할 일은 없겠지만 기억해 두라고.」
진혁이 엄지손가락을 튕겼다. 옆방과 연결된 호텔 객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멍한 표정의 피에르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그녀는 로봇처럼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피에르!」
제임스, 아니 얼 존스가 말했다.
「저 여자가 거짓말을 한 겁니다.」
존스의 심장이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제가 전부 해명할 수 있습니다. 저 여자는 전부터 밥 앤더슨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협박해서…….」
진혁은 더 이상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네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얼 존스?」
「예?」
「돈? 평판? 아니면 명예. 살아있는 가족들인가?」
얼 존스는 살기 섞인 질문에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얼어붙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에 서 있던 임진혁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손바닥이 펼쳐졌다.
「예에에?」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속여 왔다.
사람들은 그에게 호감을 가졌고 쉽게 사랑에 빠졌다. 그렇지만 골치 아프게도 그를 조종하려고 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항상 돈이 있었다.
「돈이 제일 중요합니다.」
돈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쾌락을 살 수도 있고, 불편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성가신 집안일을 대신 맡기는 것도 가능하다. 불쾌한 상사의 밑에서 노예처럼 뒤치다꺼리를 하며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다.
제임스이자 얼 존스였던 자는 자신이 속마음을 나불나불 털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13살 이후로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본 적이 없었다.
「평판이나 명예는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는 항상 숨기고 속이며 거짓을 말해 왔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얼 어니스턴 존스입니다.」
「친부모와 형은 어떻게 죽었나?」
「제가 불을 질러 죽였습니다.」
진심을 말한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꽉 막고 있던 보가 터져 홍수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진심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왜 죽였지?」
「아버지가 게임기를 사 주지 않았습니다.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있는데도 형만 사 주었죠. 그래서 홧김에 태워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하고 같은 방에서 주무셔서 어머니만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삼촌 부부는?」
「부모님의 유산을 저에게 주지 않고 빼돌려서 써 버리려고 온갖 궁리를 하더라구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죠.」
「어떻게 했는데?」
「두 사람이 타는 자동차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브레이크에 문제가 자주 생겼죠. 그래서…….」
진혁은 팔짱을 끼고서 그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들었다. 마이클 타카시가 조사하지 못한 공백 기간 동안에 그는 밥 앤더슨처럼 나이 든 노인들의 측근이 되었다.
보통 대서양을 다니는 크루즈 선에서 노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비서가 되어 그들의 재산을 관리하며 빼돌렸다.
노인들은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면서 그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
어차피 관 속으로 가져가지도 못할 재산이다.
그가 조금 나누어 받아서 나쁠 일은 없지 않은가?
기다리는 것이 점점 더 지겨워진 후에 그는 적극적으로 유산을 받았다.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었고,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도 노인의 친구인 제임스를 의심하지 않았다.
「밥 앤더슨은 왜 죽였나?」
「내가 포도주를 빼돌린 걸 눈치챘습니다.」
「테트로도톡신은 어디서 구했지?」
「이전에 크루즈선을 타고 일본 여행을 했을 때 복어 낚시를 배웠습니다. 직접 낚아서 난소와 내장을 말린 후에 가루로 만들어 계속 가지고 다녔습니다.」
「남은 것들은 어디에 있지?」
「제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 책상 위 서류 가방 속에…….」
「이 정도면 충분히 들었군.」
진혁이 녹음기를 껐다. 피에르는 여전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진혁이 손가락을 튕겼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나는 경찰도 판사도 아니야.」
정신이 번쩍 든 제임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금 전에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약이라도 먹였나?!」
그는 녹음기를 향해 덤벼들였다. 진혁은 옆으로 가볍게 한 걸음 물러나며 제임스를 피했다. 그는 앞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평판도, 명예도, 인간관계도 중요하지 않군. 그리고 오직 돈만이 제일 중요해. 그렇다면 자네에게서 돈을 빼앗아 주면 되겠어.」
진혁이 쓰러진 제임스를 내려다보며 선고했다.
「두고 보자고, 친구.」
◈ ◈ ◈
피에르와 제임스.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진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죽여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가능하다면 피에르의 아들인 헨리까지 죽일 수도 있었다.
밥 앤더슨은 무엇을 원할까?
유령이라도 불러내어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씁.’
그는 이런 식으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장 죽여 버리면 끝날 텐데, 막상 죽이기에는 찝찝하다.
멍하니 두 명의 범인을 보다가 진혁은 문득 유키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는 빵을 굽는다고 했지?」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소파 옆에 있던 샘플 밀가루를 허공으로 띄웠다. 비닐 봉투를 벗고서 뛰쳐나온 밀가루들이 허공에 비산했다.
「버터도, 소금도, 달걀도 없군.」
그렇다면 어떤 빵을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