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0화
윌리엄 파커에게 있어 밥 앤더슨은 단순한 고용주가 아니었다. 시궁창에 처박힌 인생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미 틀렸다고 생각한 순간 밥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파산 전문 크레딧 관리 업체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어쩌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 인생이 다시 궤도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밥 앤더슨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렸다. 파커는 다시 절망에 빠져들었다.
친구이자 멘토인 자가 죽었기 때문에 우울한 데다가 직장이 사라져 버려서 괴로웠다.
「빌, 밥 앤더슨이 당신에게 유산을 남겼어요.」
그 와중에 왔던 맥스웰 변호사의 전화는 단비 같았다. 그리고 피상속인 중 한 명의 사정 때문에 유언 발표가 연기되었다.
빌은 채권자를 찾아가 사정했다.
「밥 앤더슨은 저를 아들처럼 아꼈습니다. 제 빚을 갚아주고 싶어 했으니 거액의 유산을 남겼을지도 모릅니다. 조금만 두고 보시죠.」
간신히 유예 기간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깜짝 상자를 열자 나온 것은 그저 현금 5천 달러뿐이었다.
원금을 갚기에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이번 달 이자를 지불하면 간신히 신용카드값을 낼 수 있을 정도다. 유감스럽게도 알렉산더 그레이는 유언 내용에 대해서 숨기지 않았고, 채권자들은 신문사를 통해서 유언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빚을 갚기를 종용했다.
빌은 맨해튼 앞바다에 몸을 던지려면 몇 시가 적절할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따로 맥스웰 변호사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임진혁을 찾아가라, 고 쓰여 있었습니다.」
생전에 진혁을 찾아 가보란 말 역시 들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밥 앤더슨이 임진혁에게 일자리를 알아봐 주려 했다고 생각했다.
‘내일 맥스웰 변호사가 방문하기로 했지.’
밥 앤더슨이 과연 진혁에게 윌리엄 파커를 부탁하려고 했을까?
그는 진혁이 눈앞의 이 도박 중독자를 갱생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마지막 이메일에는 그런 언급이 없었다.
어쩌면 만나서 말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밥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진혁이 물끄러미 빌을 바라보았다.
「도박 중독 치료 센터에 들어갈 생각인가?」
「아니오.」
빌이 고개를 저었다. 진혁은 문득 이 청년이 무엇을 할 예정인지 깨달았다.
「여기서 나가서 제일 먼저 뭘 할 건가?」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침실 서랍장 맨 마지막 서랍에 있는 권총을 꺼내서 이 모든 일을 다 끝낼 겁니다.」
임진혁은 윌리엄 파커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 계획대로 버스를 타고 짐에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짐을 챙겨라. 도박 중독 치료 센터에 연락해서 가능한 빨리 입소해.」
그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윌리엄 파커는 거부하지 않았다.
「예.」
「도방 중독 치료 센터의 프로그램에 협조하고, 그 이후에 내 지시를 기다려.」
◈ ◈ ◈
그날 오후 진혁은 주방이 딸린 스튜디오에서 직접 케이크를 구웠다.
‘밥 앤더슨, 당신은 틀렸어.’
밥은 미미가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케이크 말고 다른 음식을 먹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했다.
하지만 미미는 여전히 치즈 케이크를 즐겼다. 진혁이 눈앞에서 치즈 케이크를 만들어 주면 그 모습을 보며 손뼉을 쳤다.
그리고 오늘은 뜻깊은 날이었다. 그는 아침에 미미를 초대했다.
「혼자서 오라구요? 꼭 저만 있어야 하나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시간이 아닐 때 미미는 항상 4~5명의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비서들과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타일리스트와 경호원들이 팀을 짜서 교대로 따라다녔다. 이번처럼 법률 전문가가 필요한 경우,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통역사들을 데려와 일행이 열 명 이상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이번에는 미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미미 씨가 처음 보는 걸 보게 될 테니 보디가드들도 두고 오십시오.」
그는 진지하게 말했다.
「뭔가요?」
「부모님께도 보지 못하신 겁니다.」
「대체 어떤 모습이길래 그래요?」
진혁은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한 시까지 맨해튼의 스튜디오로 오시면 됩니다.」
황미미는 진혁이 말하는 스튜디오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주방과 화장실이 딸린 원룸 형태의 아파트로, 진혁이 이전에 요리 연습을 할 때 사용하던 공간이다.
이전에 미미는 그 스튜디오에 훌륭한 킹사이즈 침대를 선물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주방과 침대, 그리고 케이크.
그녀가 개인적인 일정에 대해서 언급하자 측근들이 흥분했다.
헤어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의상 담당 스타일리스트 모두 야단법석을 떨었다.
「얼마 만에 두 분이 데이트하시는 거예요?」
「비즈니스 미팅 말고 따로 나가시는 건 이전에 함께 테마파크에 가셨던 때 말고 처음 아닌가요?」
「결혼할 때 준비했던 속옷 세트를 받쳐입으시는 것이 좋겠어요. 어디에 있지?」
의상 담당이 씨익 웃었다.
「여기에 있어요. 사향 향기가 배도록 향 주머니를 넣어 두었답니다.」
헤어 스타일리스트는 윤기 나는 검은 생머리에 왁스를 조금씩 발랐다.
「오늘은 물에 젖은 것처럼 촉촉한 느낌을 줄 수 있게 머리 모양을 만질 거예요.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섹시해 보이게요.」
「세 시간 동안 두 분이서만 시간을 보내실 거라고 하셨죠? 그럼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으세요. 정장을 혼자 벗었다가 다시 입으시면 구겨질 테니까, 아예 네추럴하고 캐주얼하게 가죠. 그게 헤어하고도 어울릴 거고.」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박스티에다 청바지인데, 속옷을 그렇게 화려한 거로 입으면 이상하잖아.」
「이건 부담스럽지 않은 라인이에요! 향도 잘 어울린답니다.」
오랜만에 캐주얼하게 차려입고 자연스럽게 꾸민 미미는 여대생처럼 어려 보였다. 그녀는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운전사와 측근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계단을 올라갔다.
‘도대체 뭘까?’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면과 마주쳤다.
「어서 오십시오.」
임진혁이 부엌에 양팔을 펼치고서 서 있었다. 미미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미리 부숴놓은 쿠키 가루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달콤한 초콜릿 안개가 빙글빙글 돌면서 미미의 곁을 스쳐 갔다가 다시 진혁의 앞으로 돌아갔다.
미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어머.」
황금처럼 반짝이는 노란 덩어리가 자그마한 해처럼 떠올랐다. 녹은 버터였다. 그 버터와 쿠키 가루들이 피어오르는 구름처럼 섞여 들어가 합쳐졌다.
마법처럼 신비로우며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세상에!」
이것은 그녀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바로 진혁이 손을 사용하지 않고 무공을 사용해 케이크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순서는 크림치즈와 마스카포네 치즈였다. 하얗고 몰캉몰캉한 덩어리들이 새털구름처럼 거리 두고 있다가 갑자기 서로에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회오리가 생기며, 깔끔하게 합쳐졌다. 케이크 크기만 한 회오리에 새로운 손님들이 나타났다. 은가루처럼 반짝이는 화이트 초콜릿에, 자수정처럼 빛나는 블루베리였다. 시럽을 옷처럼 휘감은 진보랏빛 껍질은 그 어느 보석보다도 휘황찬란했다.
진혁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서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재료 투입은 전부 끝났다.
원형 틀도 필요하지 않았다. 진혁이 두어 번 손짓하자 케이크는 그대로 틀 모양으로 굳어갔다. 본래대로라면 수 시간을 식혀 굳혀야 할 터다. 하지만 그가 손을 댄 것만으로도 케이크는 딱 적당한 강도로 굳어졌다.
블루베리 레어 치즈 케이크.
황미미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 중의 하나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공으로 제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처음이다.
진혁은 뒤돌아서서 미미의 반응을 확인했다.
「너무 멋있어요!」
미미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진혁을 응시했다.
「스턴트 배우가 와이어를 설치해서 하는 것과는 수준이 달라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너무나 아름다웠어요.」
그녀는 흥분해서 말했다.
「오븐이나 믹서기, 휘핑기 같은 기계가 전혀 필요 없네요. 영화 같았어요. 저 혼자 보는 게 너무 아까워요! 세상에!」
진혁은 미미가 이 정도까지 흥분한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뿌듯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밥 앤더슨이 죽은 이후로 우울해하는 것 같아, 무엇을 할까 하다가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진혁은 자신이 생각해낸 작은 선물을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자 흐뭇해졌다.
하지만 이 선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진혁이 허공에 떠 있는 케이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당장 먹어볼래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진혁이 가볍게 손짓하자 케이크가 조각조각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내려가듯 조금씩 떨어져 내려와 미미 앞의 접시에 놓였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처럼 자신의 앞에 떨어져 내린 케이크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보기만 해도 달콤해요.」
「먹어보면 더 달 겁니다.」
그녀는 포크를 들어 올렸다. 금관을 장식하는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는 블루베리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블루베리가 큼직하게 여러 개 박혀있는 부분을 잘라냈다. 희고 촉촉하며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가 포크 위에서 탱글하니 출렁거렸다. 그녀는 입을 벌려 케이크를 맞이했다.
치즈 케이크는 솜사탕처럼 혀 위에서 사르륵 녹아내렸다. 그러나 그 맛은 솜사탕처럼 인공적인 단맛이 아니었다. 농후하고도 담백한 치즈의 맛이었다. 그리고 블루베리가 터졌다. 톡 터진 싱그러움이 혀를 감쌌다.
그녀는 말을 잃었다. 여태까지 먹어온 케이크도 대단했지만, 이 케이크는 차원이 달랐다. 엄격하게 교육받은 양갓집 규수답게 그녀는 완벽한 식사 예절을 따르며 포크를 움직였다. 그렇지만 케이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훌륭한 공연과 완벽한 간식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미미는 입가에 크림치즈를 조금 묻힌 채로 방긋 웃었다.
「저 이제 진혁 씨가 만들어주신 케이크 아니면 못 먹겠다니까요! 평생 책임지셔야 해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호호호.」
진혁은 자기가 만든 케이크를 조금 맛보았다. 신선한 블루베리와 두 종류의 치즈, 그리고 서걱하니 차가운 온도까지 모두 적절하다. 미미가 제일 좋아하는 맛이었다.
‘역시 밥 앤더슨이 틀렸다니까.’
미미는 케이크를 좋아한다.
계속해서 만들어 주면 더 좋아할 것이다.
임진혁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제 더 확신하게 되었다.
케이크를 먹고 청소를 한 후, 두 사람은 잡담을 나누었다.
진혁은 아까 만났던 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살하고 싶어 하는 도박 중독자인데요. 밥 앤더슨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그 청년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미가 명쾌하게 말했다.
「그는 앤더슨의 재산에 대해서도 잘 알고 미술계의 인사들을 잘 알죠. 타운 하우스에서도 오래 살았고요. 그러니 도박 중독 치료 센터에서 나오면 타운 하우스의 저택 관리인으로 고용하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