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7화
「친구가 될 것 같지는 않은 만남인데요.」
그 질문에 진혁이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케이크를 좀 먹어보라고 했더니 얼굴을 시뻘겋게 하면서 거부하다가, 먹고 나서는 태도가 확 변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저를 친구라고 부르면서 시시때때로 연락하더군요.」
바로 얼마 전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일견 냉정해 보이는 모습에 경관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친구분이 돌아가셨는데 퍽 태연해 보이십니다?」
진혁은 경찰관의 예상과 달리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경관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진정한 남자라면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 겉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동양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면 오해받을 겁니다.」
경찰이 단호하게 말했다.
◈ ◈ ◈
진혁이 경관과 짧은 면담을 마치고 나왔다. 그러자 복도에서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그레이가 다가오자 진혁이 자신의 명함을 꺼냈다.
「용건이 있으면 내게 따로 연락주시지.」
용건이 있으면, 이라고 말했으나 사실은 ‘물만이 있다면’에 가깝게 들렸다. 알렉산더는 명함을 받고 나서 바로 경관에게 불려갔다.
「알렉산더 그레이?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니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유산도 제대로 받지를 못했어. 그런데 왜 나한테.」
그는 들어가면서 투덜거렸다.
다른 이들도 경관과 면담을 해야 해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월리 왕이 미미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왕 변호사가 진혁을 보며 물었다.
「경관이 무례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제가 바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군요. 혹시 특별히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미미와 진혁이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다면 유산 상속 절차에 대해서 맥스웰 변호사와 이야기를 좀 하고 가겠습니다.」
월리 왕이 서재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진혁에게 피에르가 다가왔다.
「임 쉐프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사흘마다 수프를 보내주셔서 미스터 앤더슨이 잘 드셨답니다.」
그녀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충분한 대가를 받고서 한 일입니다.」
「그 수프를 아주 좋아하셨어요. 같은 레시피로 요리해도 진혁 쉐프님이 만든 것 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고 불평하셨죠.」
진혁이 피에르에게 제안했다.
「시간 있으실 때 밥 앤더슨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누시죠.」
「지금은 아들을 데리러 공항에 가야 해서요.」
「저도 귀국 일정이 있으니…, 그럼 오늘 저녁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주소를 알려주시면 제 운전사가 모시러 갈 겁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황미미가 물었다.
「여보, 가정부와 따로 이야기를 할 이유가 있나요?」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미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녀가 살인범이라고 의심하시나요? 그렇다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나요.」
그녀는 진혁이 무엇을 하려고 해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해주었는데도 말이지.’
진혁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었고,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진혁을 보호하려고 했다. 변호사를 데려오려고 한 것도 그런 보호의 일부였다.
‘이런 점은 부모님이나 미미 씨나 똑같아.’
진혁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했다.
「저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물론 충분히 조심하시고 계시겠지요. 그래도 경호원과 함께 다니셨으면 좋겠어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주에 요리사가 휴가를 얻어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가정부가 수프를 데웠다고 합니다.」
피에르는 밥 앤더슨에게 매일같이 수프를 갖다 주는 역할이다. 그러니 비서들과 비교하면 독을 넣을 만한 기회가 제일 많았다.
「진실을 듣고 싶으니, 대화할 때는 다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피에르가 독을 넣지 않았다면 그건 그대로 필요한 정보다. 그렇다면 최소한 피에르가 냉동된 수프를 데워서 가져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혁이 경찰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를 미미에게 알려 주자 그녀가 바로 물었다.
「그 세 명 중 한 명이 범인일까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은 동기가 없습니다.」
「요리사는요?」
「그는 사전에 유산을 받았습니다.」
「유산을요?」
「별도로 현금을 건네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만 달러였나? 상당한 양의 돈을 주었습니다. 제 수프만 먹을 수 있게 되면서 더 이상 요리사가 저택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퇴직금으로 챙겨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이전에 밥 앤더슨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들었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미미가 말했다.
「그게 오히려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잖아요. 이미 돈을 받았어도 유언장에 이름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끝없이 욕심을 부리거든요.」
「음, 그렇지만 요리사는 아닙니다. 냉동된 수프가 도착하기 전부터 아예 저택을 떠난 상태였으니까요.」
「요리사는 가정부보다 훨씬 더 주방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각종 식재료나 음식에 능통하잖아요? 그러니까 좀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으니 그건 불가능하겠네요.」
진혁이 빙긋 웃었다.
「식재료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쉐프를 의심하신다면, 저를 의심하지는 않으십니까?」
미미가 피식 웃었다.
「당신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사고사로 보이게 밥 앤더슨 씨를 죽이실 수 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그분이 마지막 시간을 즐겁게 보내도록 수프를 보내 주셨잖아요.」
그녀가 손을 뻗어 진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 누군가 수프에 장난을 쳐서 화나신 거 다 알아요.」
「…티가 납니까?」
「네, 아내니까요. 보면 알 수 있지요.」
언뜻 보면 평온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 진혁은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밥 앤더슨은 무하마드 왕자나 백진영과는 달랐다. 그와는 전혀 관련 없는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자기 나름의 예술을 추구했으며, 미술에 대해서는 항상 진지했다. 그리고 그는 진혁을 친구라고 여겼다.
「누군가 수프에 장난을 칠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그런 건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진혁은 생전에 밥 앤더슨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현대 미술에 조예가 전혀 없었다. 굳이 그림에 대해서 논하자면 빛을 다루어 환한 그림을 그린 인상파의 그림 쪽이 더 좋았다. 그래서 그저 ‘황미미가 좋아하는 화가’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밥 앤더슨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특히나 불같은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트집을 잡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밥 앤더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타입이었다. 그는 진혁과 진혁의 아내에게 계속해서 호의를 베풀었고, 진혁에게 기회를 더 주려고 했다.
첼시 갤러리에서의 발표회에서도 자신보다 임진혁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주어지도록 배려했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은 동료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관계가 되었다.
‘펜로즈 삼각형이니 뭐니 하는 도형 그림들도 계속해서 보다 보니 나름대로 정이 들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밥 앤더슨의 그림을 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옛 그림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매일같이 전화해서 귀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프도 보내주고 있으니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지요.」
「그러셨군요.」
짧은 후회였다.
에드워드 해링턴이 죽었을 때에는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진혁을 존중하고 아끼는 손님이었으나 다만 그뿐이었다.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을 때도 담담했다.
하지만 밥 앤더슨의 죽음은 달랐다.
「보름은 더 살 수 있었을 겁니다.」
「네.」
「그리고 있던 어머니 그림 정도는 완성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요.」
「어린애처럼 계속해서 와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랍 출장이 끝나면 한 번 정도 들를까 생각하고 있었죠.」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갔을지도 모른다.
그가 조금 더 빨리 갔더라면, 수프 안에 이상한 이물질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진혁은 이를 갈지도 않았고, 살기를 뿌리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이마가 아주 살짝 꿈틀거렸다. 미미는 그 미미한 표정 변화를 읽어냈다.
「정말로 화가 많이 나셨군요.」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누가 무엇을 후회하게 할 건지,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미는 진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녀가 입꼬리를 올리며 살벌하게 웃었다.
「밥 앤더슨 씨는 현대 미술의 역사를 다시 쓰신 큰 별이랍니다. 그런 천재는 백 년 안에는 다시 안 나올 거예요. 독살이라고 판명 난 이상, 저도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 제가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요.」
그거야말로 그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진혁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 ◈ ◈
두 사람이 호텔에 도착하자 한 비서와 탐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비서는 눈치 빠르게 탐정 두 사람을 각각 다른 방에 대기시켜놓았다.
진혁은 먼저 벨리 로즈를 만났다.
「구두로 보고할 내용이 있습니다.」
「뭔가?」
「알렉산더 그레이는 이전부터 손버릇이 나빴습니다. 저택에서 이것저것 훔쳐내서 팔아 용돈으로 쓰곤 했죠. 가장 최근에는 밥 앤더슨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금시계의 모조품을 만들어 바꿔치기하고, 진품을 전당포에 맡겼습니다.」
「크크크큭.」
진혁은 소리 내 웃어버렸다. 그는 밥 앤더슨이 왜 오촌 조카에게 금시계를 물려주었는지 깨달았다.
‘조카 녀석에게 엿을 먹여주고 싶었군.’
밥 앤더슨은 손발이 묶여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수프를 떠먹을 정도의 힘도 없어서 뭘 하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나한테 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밥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비서에게 금시계가 진짜인지 조사해 보라고도 지시하지도 않았다.
대신 늙은 너구리답게 해결했다.
집안에 손버릇 나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알렉산더가 바꿔치기했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 그에게 유산으로 시계를 물려준다는 것은 아주 현명한 해결책이었다.
만일 시계가 진짜라면 시계를 받은 알렉산더는 크게 기뻐할 것이다. 진혁이 들은 대로라면 그 시계는 앤더슨 가의 남자들에게 대대로 상속되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밥이 죽는다면 알렉산더에게 돌아가야 할 물건이었다.
‘아주 뿌린 대로 거두었군.’
진혁이 보고를 듣다가 웃음을 터트리자 탐정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알렉산더가 테트로도톡신을 구매할만한 경로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