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6화
알렉산더는 여전히 얼떨떨하니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갑자기 왜 정수리가 아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지? 무슨 일이지?’
방금 말을 한마디 더 했을 때 더해진 통증 또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제임스와 임진혁이 포도주 저장고 사용에 대해서 협상하는 동안 그는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회까닥하니 눈알이 뒤집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쯧, 그렇게 아무 데서나 자기나 하고. 정말 쓸데가 하나도 없군.」
옆에서 빌이 혀를 차며 말했다. 피에르가 걱정스럽게 알렉산더의 곁에 가서 들여다보았다.
「상태가 안 좋은데요. 유산을 적게 받은 게 충격이 컸나 봐요.」
「‘내 금시계’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잖아. 다이아몬드가 박힌 한정판 롤렉스 시계. 그것만 팔아도 큰돈이 될 텐데, 지금 여기서 제일 손해 본 사람은 나라고.」
빌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듣지 못했을 수 있지만, 진혁은 똑똑하게 들었다.
그는 다들 알렉산더를 살피는 도중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앉아 있었다.
제임스가 다시 진혁에게 말을 걸기 전에 미미가 진혁에게 속삭였다.
「밥 앤더슨 씨는 비정기적으로 경매장에서 고급 포도주를 사 갔죠. 지난달에만 해도 로열 드 마리아를 낙찰받았는걸요.」
한 병당 4만 달러가 넘는 고가의 포도주다. 디저트에 잘 어울리는 아이스 와인으로, 미미 역시 치즈 케이크와 함께 먹기 위해 사려고 했던 품목이었다.
「그 전 달에는 1945년 로마네 콩티를 두 병이나 낙찰받기도 했고요. 그 세 병만 해도 벌써 합쳐서 10만 달러가 넘어요.」
그녀가 소곤거리는 말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와 빌에게 주는 인센티브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포도주의 가격에 대해서 잘 모르는 피에르만이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피상속인이 전부 모여야 한다면서요. 헨리는 여기에 없는데 괜찮아요?」
「아, 아닙니다. 피에르 씨가 상속하시고, 헨리의 대학 등록금으로 사용하시도록 제한이 걸려 있는 거예요.」
맥스웰이 설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 등록금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이에요.」
맥스웰 변호사가 봉투에 다시 유언장을 넣으며 말했다.
「그럼 발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재산에 대한 청구는.」
「잠깐만요.」
뒤늦게 혼란에서 깨어나 제정신이 돌아온 알렉산더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잠깐만. 이 중에서 밥 아저씨를 죽인 사람이 있으면 달라지죠.」
맥스웰 변호사가 천천히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살인자는 유산 상속을 못 받잖아! 여기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다 나온다고. 그러면 내가 1순위로 상속을 받게 되잖습니까, 아닌가요?」
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문밖에서 경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머나먼 동아시아에서 오신 두 분과 대화하길 기다렸죠.」
진혁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만나 보러 가보겠습니다.」
미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좋은 하루 되시길.」
문 앞에는 아까 서재에 함께 들어갔다가 피상속인이 아니라며 쫓겨난 월리 왕 변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더 그레이의 변호사와 피에르의 변호사 등 다른 사람들이 서 있어 북적거렸다. 월리 왕이 임진혁과 황미미에게 말했다.
「이쪽 방으로 오시지요, 그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복도를 오른쪽으로 꺾어 붉은색 목제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세 사람은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갔다.
「미스터와 미시즈 임, 안녕하십니까?」
제복을 입지 않은 백인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언뜻 봐도 192cm는 될 정도로 키가 컸고 금발이었다. 갈색으로 탄 얼굴과 팔을 보면 경찰이라기보다 하와이의 서퍼처럼 보였다. 그는 경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번갈아 질문할 테니 한 분씩 들어오시지요.」
진혁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내가 이번 일로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니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황미미는 진혁의 말에 완벽하게 맞추어 주었다. 그녀는 순간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다.
자연스럽게 아내를 받쳐 안으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함께 들어오신 남자분은-.」
「변호사 왕입니다.」
「이분들은 지금 아무런 위험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 단순한 질문을 할 것인데요.」
「두 분 모두 법적인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에, 네에. 당연히 그렇죠. 하지만 단순한 질문을 하는데 이렇게 변호사까지 대동해 오시다니 조금 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미스터 임, 정말로 변호사와 함께 하실 겁니까?」
임진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도 미국의 법리적 절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변호사분이 함께 계셔야 합니다.」
변호사를 내 보내고 싶어 하던 경찰은 포기하고 질문을 시작했다.
그는 미미에게 먼저 물었다.
「고인과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남편이 사업상 알던 관계라고 들었어요. 결혼식에 와서 제 초상화를 그려주시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친했습니까?」
「청혼 선물로 밥 앤더슨의 그림을 받았을 때부터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유언 내용은 어땠지요?」
「저에게 그림 전부를 물려준다고 하셨어요.」
경관이 휘파람을 불었다. 고인의 자산이 어느 정도 가치인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 그런 유언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께서는 사후에도 자신의 그림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신 거지요.」
그녀가 가냘프게 말했다. 누가 봐도 지인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심약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전에 드라마를 볼 때도 생각했지만 연기 잘 하네.’
진혁은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표면상으로는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걱정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변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보통 큰 재산이 아닌데 받게 되어 놀라지는 않으셨습니까?」
「경관님.」
미미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저는 황 그룹의 CEO입니다. 이 정도는 저에게 있어서 그다지 큰돈이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직원들이 돈을 벌어들이고 있답니다. 지금 영장도 없지만 어디까지나 저는 호의로 경관님을 만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하실 거라면 제가 이만 나가봐도 되겠네요.」
처음에 유쾌해 보였던 경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그럼 하나만 더 질문하겠습니다. 유산 분배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오늘 유산 상속 발표를 듣고 처음 알았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이제 나가셔도 좋습니다.」
왕 변호사가 진혁을 흘깃흘깃 바라보았다. 진혁이 말했다.
「왕 변호사님, 미미를 데리고 나가 주십시오.」
변호사가 미미와 함께 나가고 진혁 혼자 방에 남았다.
경찰관이 조금 전에 미미에게 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어조로 말했다.
「미스터 임, 유언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윽?!」
진혁은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는 탐정이나 비서의 자료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원했다.
진혁이 마주 보자 경찰관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풀린 눈동자로 앞을 응시했다. 멍하니 앉아있는 경관에게 다가간 진혁은 그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진언을 읊었다.
짧은 진언을 마친 후 임진혁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지금 여기는 네 마음이 가장 편안한 직무 공간이고 나는 네 가장 가까운 동료다. 어이, 이봐.」
「응, 잭. 무슨 일이야?」
「밥 앤더슨은 왜 죽었지?」
「뭐야, 왜 그것도 몰라. 독살당했잖아. 조회에서 못 들었어?」
「어떻게 죽었다고 했더라?」
「점심 식사로 수프를 먹다가 죽었잖아.」
경찰은 밥 앤더슨의 시신을 부검했다. 시신에서는 극소량의 테트로도톡신이 검출되었다.
법의학팀은 남은 수프와 그릇, 스푼을 검사하려 했다. 하지만 먹다 남은 수프는 버려졌고 그릇과 스푼도 설거지가 되어 있었다. 피에르는 습관대로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어버렸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고 한다.
진혁은 미간을 좁혔다. 한 비서가 가져온 보고서도, 다른 탐정이 가져온 보고서도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밖에 없었다.
‘이 경찰이 소식이 빠른 건가, 아니면 그놈들이 무능한 건가?’
어쩌면 아직 비서와 탐정이 탐문하고 다닐 때는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혁은 다시 물었다.
「지금 제일 유력한 용의자는 누구야?」
「유언장이 발표되어야 알지. 지금 봐서는 중국에서 온 여배우 같은데.」
「왜?」
「제일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자가 제일 유력한 용의자니까. 지금 재산을 받을 줄 몰랐다고 하는데, 그럴 리가 없어.」
밥 앤더슨은 비밀 유언을 하였다. 그래서 유언 공시 전에는 변호사들이 경찰에게도 내용을 숨겼다.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황미미는 알리바이가 있잖아? 중국에 있는데 어떻게 죽여.」
「남편이 요리사인데 수프를 냉동해서 며칠마다 한 번씩 보냈다고 하잖아. 그 수프에 독을 넣을 수도 있지.」
「남은 수프가 없었어?」
「조회 좀 제대로 듣지 그랬어. 마시던 게 마지막 수프였잖아. 잭, 잭? 너 잭이 맞, 으, 으으으, 으으으.」
「….」
의지력이 강한 남자였다. 흰자가 뒤집히며 입가에서 침이 흘렀다. 진혁은 남자의 정수리에 다시 손을 얹었다.
「잭, 재에엑, 잭.」
몽롱해진 채로 중얼거리는 남자를 보며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호오,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대단한데.」
‘가능하다면 스카웃해 오고 싶을 정도야.’
이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면 무슨 일을 해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는 뉴욕 경찰국에서 생각보다 지위가 높은 듯싶었다.
진혁은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밥 앤더슨과 임진혁은 수프를 대가로 거래를 했고, 그림을 주기로 했어. 자기 조카와 고용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밥은 죽기 이틀 전, 임진혁에게 이메일을 남겼네. 고용인들에게 유산을 안 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
그리고 진혁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경관이 눈을 떴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이 눈을 깜빡였다. 경찰관이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여는데 진혁이 먼저 물었다.
「더이상 묻고 싶으신 것은 없습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얼떨떨해하며 이쯤 해서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관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질문을 했다.
「어, 그. 밥 앤더슨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진혁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블랙 컨슈머와 사장 관계로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클리닉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죠.」
「첼시 갤러리에서 함께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셨는데요.」
「밥 앤더슨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
「…보통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