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5화
장 노인은 따로 받은 통나무를 직접 도끼로 패서 장작을 만들었다. 옆에서 통역사가 물었다.
『어르신, 힘들지 않으십니까?』
『이 정도야 식후 운동거리로 거뜬하지.』
그는 신이 나서 좋은 장작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잡목은 좋은 장작이 못 돼. 참나무가 좋지. 지금 살펴서 보내주신 나무를 보면 아주 목재부터 쓸만한 거로 골라 보내 주셨어. 쪼갤 때도 아무 생각 없이 하면 안 되지. 나중에 가마 안에 어슷하게 올리려면 한 가지 크기여서는 안 되지. 큼지막한 것도 필요하고 가느다란 장작개비도 필요해.』
장유향은 여태까지 혼자 있던 세월을 보충하기라도 하는 마냥 끊임없이 떠들었다. 다음 이야기는 불길을 조절하기 위해 어떻게 공간을 만들면 되는지였다.
『불이 숨 쉬려면 길을 만들어 줘야 해. 공기로 길을 터 주어야 화끈하게 솟아오르지.』
송대에는 석탄이 발견되어, 강렬한 화력으로 볶는 요리가 유행했다. 장유향은 한동안 센 불로 오리를 구워냈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연구 끝에 불을 복합적으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뜨거운 불을 사용해서 온도를 높이고 이후에는 낮은 온도로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굽는다.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불의 세기를 다르게 하는 방법을 익혔다. 목이나 날개처럼 껍질과 뼈밖에 없는 부위는 타버리기 쉽다. 껍질조차 타지 않을 수 있도록 촉촉하게 익히는 불 기술을 익혔건만, 가스 오븐에는 소용이 없었다. 오븐은 진흙 오리 구이의 온도를 전체적으로 높여줄 뿐, 부위에 따라 열을 더하거나 덜할 수 없었다.
‘주군께서는 나를 생각해 주신다.’
장유향은 진혁에게 그러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임진혁이 염화기공을 사용하면 어떤지 제안했다. 그리고 오븐 안에서 공기의 대류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화기공을 사용하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다. 섬세하게 조절하는 기술 역시 모자랐다. 어설프게 뜨거운 공기를 조절한답시고 노력하다가 오븐 하나를 태워 먹었다. 진혁은 별다른 말 없이 새로운 가스 오븐을 설치해주었다. 그리고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혁은 아랍으로 출발하기 전에 장유향을 따로 불렀다.
『곧 돌 가마가 완성될 테니 거기서 하게.』
그는 완성된 돌 가마를 앞에 두고 새롭게 의지를 다졌다.
『돌아오시기 전에 최적의 조합을 알아낼 것이야.』
◈ ◈ ◈
밥 앤더슨의 저택은 맨해튼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수해 보이는 벽돌 건물이나 내부는 화려했다.
높은 천장과 빛나는 샹들리에 그리고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은 가정집이라기보다 호텔 로비 같아 보였다. 단순한 백색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유화 그림들을 보면 미술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던 가정부 피에르가 세 사람을 반겼다.
「임진혁 쉐프님, 어서 오세요.」
피에르는 분홍빛 양 뺨이 통통하고 줄무늬 앞치마를 둘렀다. 여느 시골집의 행복한 가정주부와도 같은 생김새였다.
하지만 진혁은 오늘 차 안에서 조사 결과를 받았다.
피에르 몽탕은 마르세유 출신의 프랑스인이다. 스무 살 때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어 미대를 자퇴했고,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그때 밥 앤더슨은 전시회에서 우연히 피에르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피에르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숙식을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다.
하지만 한때 꿈많은 미대생이었던 피에르는 20여 년간 밥 앤더슨의 저택에서 살면서 단 한 번도 붓을 들어보지 못했다.
모든 일을 다 끝마쳐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밥은 집안이 깨끗하지 않으면 호되게 비난했다.
17개의 방이 있는 저택을 홀로 쓸고 닦으며 관리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밥 앤더슨은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피에르의 말을 계속해서 무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아이가 졸업하여 사회인이 되어 시간이 생겼을 때는 아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한때 촉망받는 화가 지망생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20년의 경력을 가진 가정부다. 곁에서 보면 피에르는 더 이상 붓을 들지 않고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이고 싶을 수도 있겠군.’
진혁은 짧게 피에르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울하고 우울해 보였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범인이기 때문에 우울한 걸까, 아니면 그저 오랫동안 모시던 고용주가 죽었기 때문에 우울한 걸까?
진혁은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서 질문을 했다. 가정부가 바로 대답했다.
「유언 발표 때문에 오셨지요? 서재로 오시면 됩니다.」
서재는 2층에 있었다. 세 사람은 바로크양식으로 화려하게 넝쿨처럼 장식이 타고 올라가는 나선식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미미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택 전체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네요.」
「하나씩 하나씩 그릴 때마다 저택 벽에 걸었다고 하더군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정부 피에르, 비서 빌 그리고 비서 제임스.’
비서 빌이 서재 안쪽에서 나오며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빌의 정식 이름은 윌리엄 파커다. 그는 카지노를 들락날락하며 거액의 빚을 졌다.
‘빚이 10만 달러였던가?’
멀쩡해 보이지만 속 빈 강정이다. 밥 앤더슨에게 월급을 가불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고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진혁이 처음 보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성 한 명과 젊은 남자 한 명인데 두 사람의 얼굴이 똑같았다.
‘어머니와 아들인가?’
여자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맥스웰과 헌터 사의 아리안나 맥스웰입니다. 임진혁 님과 황미미 님 되시지요?」
유산 상속과 재산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들이다.
「안녕하세요.」
미미와 진혁이 인사했다.
18세기 풍의 마호가니 원탁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나란히 앉았다. 먼저 와 있었던 20대 초반의 남자가 불평을 했다.
「당신들 때문에 늦어서 이제야 알게 됐잖아.」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리면서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하지?」
맥스웰이 소개를 해주었다.
「고인의 오촌 조카인 알렉산더 그레이입니다.」
오촌 조카는 밥 앤더슨과 거의 닮지 않았다. 비쩍 마른 몸에 긴 팔 하와이안 셔츠를 걸쳤다. 헐렁하여 쇄골이 보이는데 건강해 보이기보다 오히려 뼈와 가죽만 있어 병약해 보였다.
‘약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맥스웰 변호사가 요청했다.
「이제 피에르를 불러 주시겠어요?」
「예.」
제임스가 허둥거리며 나갔다. 빌은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진혁은 스마트폰을 클릭해 제임스의 신상을 빠르게 살폈다.
‘이제 스물네 살, 밥 앤더슨의 옆에서 일한 지는 3년이 채 안 됐군.’
고용인들 중에서는 제일 어린 축에 속했다. 바로 기다리고 있었는지 피에르가 곧 들어왔다. 아직 앞치마를 착용하고 대걸레를 손에 든 채였다.
「이제 시작하나요?」
「뭐야, 기자나 이런 사람들은 없어? 전에는 있더니.」
「유언 공개는 피상속인에게만 한정해서 공개됩니다.」
고인의 오촌 조카인 알렉산더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아리안! 그걸 누가 모르나.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빨리 알려주기나 해요, 궁금하니까.」
피에르는 통통한 분홍빛 뺨에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반면에 제임스는 긴장한 듯 땀을 흘렸다.
알렉산더는 긁지 않은 복권을 손에 쥔 것처럼 흥분해 있었으며, 빌은 무표정하게 앞을 쳐다보았다.
‘시체에 몰려드는 승냥이 떼 같군.’
이 중에서 밥 앤더슨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인가?
진혁은 고인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그림은 잘 그렸을지 모르지만,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능력이 부족했다.
아리안나 맥스웰이 봉투를 꺼냈다. 갈색 서류 봉투는 구식 붉은색의 밀랍 인장으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가르고 안에 있는 유언장을 읽기 시작했다.
「나, 밥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상속 재산을 남긴다. 펜로즈 연작 시리즈를 포함한 내 소유의 그림 102점은 정당한 거래의 결과로 황미미에게 남긴다. 황미미는 생존하는 동안 이 그림을 판매하지 않고 미술관에 다음과 같은 조건 하에 전시하고 관리할 책임을 진다.」
황미미는 눈을 크게 뜨며 임진혁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눈에 띄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행동은 격렬했다. 먼저 알렉산더가 벌떡 일어났다.
「뭐?! 그림을 저 사람에게 남긴다고? 도대체 뭘 한 거야!」
제임스와 피에르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크게 놀랐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가 항의하건 말건 맥스웰 변호사는 계속해서 읽었다.
「맨해튼 12번가에 있는 타운하우스와 가구 일체는 임진혁에게 남기니 상속세 재원으로 삼도록 한다.」
「아니 여기 가구가 얼만데!」
「중앙은행에 예금된 현금 중 피에르에게 1만 달러, 피에르의 자녀 헨리에게 4만 달러를 증여한다. 헨리의 4만 달러는 반드시 대학 등록금에 쓰이도록 한다.」
「맙소사, 밥.」
피에르가 앞치마 자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난 당신을 믿었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훌쩍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아리아나 맥스웰이 유언장을 마저 읽었다.
「알렉산더 그레이에게는 내 금시계와 500달러를 준다.」
알렉산더가 양손으로 마호가니 탁자를 내리쳤다.
「아니,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있어? 같은 피가 흐르는 친척인 나에겐 왜 제대로 된 돈 한 푼도 안 주고?! 도대체 왜?!」
그는 이를 갈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알렉산더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젠장할, 다 거지 같아! 내가 뭣 때문에 그렇게 찾아와서 알랑거렸는데!」
그는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황미미와 피에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은 거야? 침대라도 데워 줬나?」
그리고 세상이 빙글 돌았다. 알렉산더는 영문을 모르고서 신음을 냈다.
「으으…?!」
순식간에 탁자에 머리가 처박혔다가 다시 돌아왔다. 머리에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얼얼한 정수리를 더듬었다.
혹이 생긴 것 같았다.
임진혁이 빠르게 움직여 알렉산더의 머리를 탁자에 처박았다가 다시 돌려놓은 것이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젊은이, 말을 조심해야지.」
「아니 지금 누가 누구보고 젊은이라고- 웁.」
맞은 데를 또 맞으면 아프다.
‘오늘은 약을 안 했는데.’
알렉산더 그레이는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서 조용해졌다. 맥스웰 변호사는 계속해서 유언장을 읽어 나갔다.
「비서 윌리엄 파커에게는 역시 중앙은행의 예금에서 현금 5천 달러를, 그리고 제임스 맥도널드에게는 내 와인 창고에 있는 술을 전부 주도록 한다. 임진혁은 나와의 우정을 봐서 제임스에게 1년간, 와인 창고에 있는 술을 처분할 수 있도록 창고 사용을 허락해 주기를 바란다.」
빌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반면에 제임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진혁 쉐프님, 포도주 저장고를 제가 사용해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