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3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수프에 독이라.」
그는 눈을 감았다.
‘이틀에 한 번씩 수프를 끓였는데 말이지.’
심지어 오늘 오후에도 끓여서 냉동할 예정이었다. 만들 재료를 따로 요청해 왕궁의 주방에서 받기도 했다. 이런 비보(悲報)를 받지 못했다면 예정대로 만들어 보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무하마드 왕자를 바라보았다.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야. 그랬더라면 한 비서가 나에게 전했을 테지. 이건 무하마드 왕자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 분명해.’
진혁은 먼저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했다.
「어디서 들으신 소식입니까?」
「내 다니는 화랑의 큐레이터가 앤더슨의 비서와 동창일세. 그림을 사려고 연락했는데, 그림은 못 사고 엉뚱한 소식만 들었지 뭔가.」
「그림이라면…?」
무하마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르기 전에 사야지.」
진혁은 무하마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죽은 화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공급이 없으므로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게 마련이다.
「윌리엄 앤 그레이브, 최고의 유산 상속 전문 변호사라고 불리는 로펌에서 밥 앤더슨의 유산 상속에 대해서 맡았다고 하더라고. 유산 상속자들이 모여서 유언을 듣고 나면 공식적인 발표를 할 텐데, 그 일정이 갑자기 미뤄졌어. 왜 그런지 모르겠군. 누가 그림을 받을지 알아야 딜을 걸어 볼 텐데 말이야.」
무하마드 왕자는 누가 그림을 상속받는지 알아내 거래를 할 속셈인 모양이었다.
「펜로즈 시리즈는 전부터 갖고 싶었거든. 밥 앤더슨이 워낙 까다로운 화가였어야 말이지. 자기 그림은 거의 미술관에만 걸고, 개인 소장 개인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자네 아내밖에 없을걸?」
진혁이 눈알을 굴렸다.
‘내가 열흘 후에 간다고 해서 유언 발표 자체가 미뤄졌지.’
한 비서가 대리인을 보내도 되는지 질의했으나 반드시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고 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무하마드 왕자님, 아무래도 저는 뉴욕에 바로 가봐야겠습니다.」
무하마드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하네.」
「요리사들의 교육 프로그램은 미리 이야기한 대로 실행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자네가 요청한 대로 화분에 심은 허브 모종 120개도 주문했다네.」
이 화분들은 요리사들의 개인 공간에 놓을 예정이었다. 평소 다양한 향을 접한다면 향을 구분하는 능력이 더 늘어난다.
「감사합니다.」
「자네, 뉴욕에 가는 김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만일 누가 그림을 상속받는지 알게 된다면 알려달라는 부탁이라면 안됩니다.」
진혁이 고개를 젓자 무하마드 왕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네가 직접 교섭해서 아내에게 선물할 생각인가?」
임진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하마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 자네라면 양보할 수 있지. 하지만 유작으로 남을 그림은 한두 점이 아닐 걸세. 마음이 바뀐다면 나에게도 연락을 주게나.」
무하마드 왕자의 비서가 들어왔다.
「왕자님,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무하마드 역시 임진혁 못지않게 바빴다. 그동안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자가 말했다.
「그럼 뉴욕에 조심해서 다녀오게나. 일주일 정도 일정인가?」
「사흘 내로 처리하고 올 생각입니다.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 ◈
「황미미 회장님의 비서와 연락을 했습니다. 오늘 당장 오시기는 어려우실 거라고 합니다. 아무리 빨리 와도 내일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전갈을 보낼까요?」
「내가 미미 씨와 직접 얘기해보지.」
진혁은 서둘러 왕궁을 떠났다.
무하마드가 호의로 전용기를 빌려주었기에 별도로 비행기를 예약할 필요는 없었다. 호화로운 호텔의 객실처럼 꾸며진 전용기 내부를 보며 한 비서가 혀를 내둘렀다.
「전용기, 전용기 하지만 왕족 클래스는 정말로 다르군요. 궁전 같네요.」
객실 한가운데에는 킹사이즈 침대 사이즈의 쿠션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비서를 위한 별도의 작은 방 역시 딸려 있었다. 기내용 의자 역시 퍼스트 클래스에 있을 법한 고급 쿠션을 사용했으며, 안전 장구 역시 완벽했다.
한 비서는 미니 바에 다가갔다. 오른쪽 창문 옆에 설치된 미니 바는 고급스러운 마호가니 목재로 마감된 유리장이었다. 투명한 장 너머에 병당 가격이 만만치 않은 고급술들이 빼곡하니 놓여 있었다.
「와, 보기만 해도 침이 저절로 나오는데요.」
무하마드 왕자는 마음껏 즐기라고 했다. 한 비서가 군침을 흘리며 미니바에 손을 뻗었다.
「대표이사님 어떤 것부터 드시고 싶으십니까?」
진혁이 제지했다.
「지금 이거 마시는 만큼 전부 빚이다. 어떻게든 받아내려고 할걸.」
「아.」
한 비서가 다시 차렷 자세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승무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전 수칙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4시간의 비행 동안 진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얼마 전 선물 받은 노트와 만년필을 사용해 종이에 글을 적었다.
-사인(死因)이 무엇인가?
-정말로 독살인가?
-독을 어떻게 넣었을까? 이송 중, 또는 먹기 직전
-살인 동기
진혁은 고개를 들어 한 비서에게 물었다.
「그 이전에 나에게 따로 연락 온 것은 없나?」
미니바를 힐끔거리며 침을 삼키고 있던 비서가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임진혁은 팔짱을 끼고서 생각에 잠겼다. 전용기 안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스마트폰을 켜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밥 앤더슨이 마지막으로 보낸 이메일이 있었다. 진혁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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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혁 보게.
이봐, 역시 자네 수프가 최고라고.
오늘도 어머니를 뵐 수 있었어.
자네가 끓여준 수프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거야.
오늘은 그림을 조금 그릴 수 있었네.
어머니의 얼굴과 머리카락, 그리고 머릿수건까지 그렸지.
눈동자와 입술만 그리면 끝나는데, 그게 아쉬워서 망설이고 있네.
자네도 젊고 예쁠 때 사진을 좀 많이 찍어두게. 그리고 디지털 클라우드에 보관을 하는 거야.
그러면 집에 불이 나도 사라지지 않을 거 아닌가.
고용인들은 여전히 헌신적으로 날 돌보고 있네.
가정부 피에르는 수프를 따뜻하게 데워서 떠먹여 주고 있어.
비서 빌은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사적이고 공적인 편지들을 써 주고 있어.
하지만 나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주 잘 알아.
내가 조카 녀석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니까, 자기가 유산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그래서 오늘은 빌에게 말해 줬지.
여태까지 정직하게 일한 만큼 당연히 그 대가를 줄 거지만, 전 재산을 주거나 할 생각은 없다고.
내 그림들은 고용인에게 허드렛일의 대가로 줄 것이 아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갈 거라고 친절하게 알려 줬다네.
빌이 제임스와 피에르에게 바로 말한 것 같더군. 셋이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리는 게 아주 볼만해. 나는 몸에 힘이 없는 거지 눈과 귀가 먼 건 아닐세.
입안의 혀처럼 살갑게 굴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면 정말 알기 쉽겠지만 말이야, 아직까지는 셋 다 친절하고 유능한 고용인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네.
이 편지는 보이스 입력을 통해서 입력했다네.
생각보다 오자가 적은 것처럼 보여.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따라갈 수가 없단 말이지.
그렇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그 어떤 AI도 나 같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 걸세.
다음 수프도 기대하겠네.
감사를 담아,
밥 앤더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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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은 메일 확인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이메일을 받은 줄도 몰랐다. 죽은 자가 보낸 이메일을 보며 진혁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임진혁과 한 비서는 뉴욕의 J.F.K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후우.”
공항에는 미리 연락받은 운전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호텔로 이동하면서 한 비서는 스마트폰을 들어 부지런히 연락하였다.
“유언장 발표는 가능한 빨리 하고 싶다고 합니다. 황미미 회장님께서 오시는 내일 저녁에 바로 한다고 하는군요.”
“피곤할 테니 모레 하자고 하지?”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사립탐정을 고용할 수 있나? 누구를 추천하지?”
한 비서가 물었다.
“어떤 분야의 사립탐정을 원하십니까?”
“그건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보험과 법률 전문, 실종 사건 전문, 유산 전문 등등이 있습니다.”
“유산 전문이 좋겠군.”
“그쪽이라면 핑거든 탐정사가 유명합니다. 따로 섭외해 보겠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던 한 비서가 입을 벌렸다.
“이사님! 뉴욕 경찰국에서 대표이사님을 찾아뵙고 싶다고 합니다.”
“언제?”
“내일 시간을 정해 주시면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유언장 발표 이후에 시간이 난다고 해 줘.”
“알겠습니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요?”
“호텔이 좋겠군.”
한 비서가 섭외한 탐정은 그날 저녁 바로 임진혁을 찾아왔다. 그는 호텔의 응접실에서 탐정을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벨리 로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40세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수염을 깨끗하게 깎았고, 양복을 입었다. 그는 자신이 전직 뉴욕 경찰 출신이라며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하지만 진혁은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고 바로 질문부터 했다.
「뉴욕주의 유산상속법에 대해서 간략하게 듣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이시지요? 한국법과는 달리 고인의 유언장이 우선이 됩니다.」
‘그동안 나에 대해서 조사했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진혁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등등 간략한 정보는 제과제빵 대회 수상 등과 함께 이어져 있어 이미 세상에 공개되어 있었다. 탐정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다.
진혁이 말했다.
「내일 밥 앤더슨의 유산 상속 발표에 가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벨리 로즈는 조금 놀란 것처럼 보였다.
「밥 앤더슨 씨와 함께 첼시 화랑에서 퍼포먼스를 하셨지요. 고인과 정말로 가까운 사이셨군요.」
그는 은근슬쩍 다시 한 번 자신이 임진혁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피력하였다.
하지만 진혁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탐정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리고 밥 앤더슨의 고용인들에 대해서 조사하고 싶습니다. 비서 두 명과 가정부입니다만.」
「이름을 아십니까?」
「성은 모릅니다. 가정부 피에르와 비서 빌, 그리고 비서 제임스입니다.」
「어느 정도로 조사를 원하십니까?」
진혁이 백지 수표를 내밀며 말했다.
「1인당 1만 달러 정도의 조사 비용을 들이면 어느 정도로 조사할 수 있겠습니까?」
「출생지부터 최근 이력까지 빠뜨리지 않고 전부 조사해 오겠습니다.」
「혹시 밥 앤더슨의 부검 결과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현직에 있는 게 아니라서 그건 어렵습니다.」
한 비서는 두 번째 탐정을 불렀다.
「마이클 타카시입니다.」
임진혁은 이 탐정에게도 같은 것을 부탁했다. 그는 유쾌하게 말했다.
「3천 달러 정도 더 쓰시면 부검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죠.」
「물론입니다.」
두 번째 탐정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한 비서가 말했다.
「고용인들을 의심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