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2화
한 비서가 눈을 깜빡였다.
“전원 참석하지 않으면 유언장을 발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럼 기다리는 거지. 어차피 미미 씨도 열흘간은 시간을 못 낼걸.”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과거 황미미의 아래에서 말단 직속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매분 매초를 나누어 일했고, 항상 바빴다.
‘그래도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셨는데,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네. 역시 국제적인 비즈니스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로 사리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건가.’
한 비서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럼 열흘 후에 뉴욕에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아두겠습니다.”
“부탁해.”
비서가 나간 후에, 진혁은 창문을 열었다. 일반적인 가정집의 문 두 개를 합쳐놓은 것처럼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바로 정원이 보였다. 작은 정원의 중앙에는 대리석 조각상이 손에서 물을 뿜는 작은 분수가 서 있다. 그 양쪽 옆에는 크고 작은 식물들이 저마다 녹색 잎을 뽐내며 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보고 싶은 것은 평화로운 정원의 풍경이 아니었다.
진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 보인다.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는 태양,
대낮, 키 큰 건물 없이 나지막한 왕궁에서 올려다보니 드넓고 푸른 하늘이 아주 잘 보였다. 진혁은 두 손을 모으고 창문 앞에 섰다. 더 이상 유리도 햇빛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직사광선 아래 잠시 머리를 숙였다.
『안식의 땅에서 일월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그는 눈을 감고 축문(祝文)을 읊었다. 일월신교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교우의 장례식을 치를 때와 같은 방식이다.
『그늘진 응달에서 벗어나 진정한 빛 아래에 도착하였기를.』
그는 이미 참석하지 못한 장례식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태양 아래 오롯이 혼자 서서 시신이 없는 추도 의식을 치렀다.
『진정한 피안(彼岸)에서 평안하기를.』
정원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고 작은 삐약 소리는 아기 새의 것이 분명했다.
-삐약
곧이어 들려온 소리는 아기 새의 것이 아니었다.
-삐야악 삐야아악
아마도 어미 새가 내지른 소리일 터다. 분수대 옆의 키 큰 나무의 제일 높은 가지 위에는 조그마한 둥지가 있었다. 이제 갓 알에서 깨어난 아기 새들이 저마다 삐약 삐약 소리를 냈다. 어미 새는 느리고 또렷한 발음으로 울음소리를 알려주었다.
마디 마디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여러 번 읊어 주자, 아기 새들이 따라 했다.
-삐약
-삐야악 삐야악 삐야아아악
새가 우는 동안에도 해는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아주 예전에 진혁이 수십, 수백 명의 신도를 묻고 통합 장례식을 거행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변치 않는 뜨거운 태양의 축복을 계속해서 내려 준다.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 새는 어미 새에게 어떻게 울면 되는지 배운다. 우는 소리로 보아서는 2, 3일 정도 된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밥 앤더슨이 죽을 무렵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세 마리의 아기 새가 저마다 제소리대로 삐약삐약 우는 소리는 동요처럼 사랑스러웠다.
-삐약
-삐야악
-삑!
개중에 제일 목소리가 작은 새는 혼자 계속해서 음정을 틀렸다. 어미 새는 인내심 있게 다시 소리를 내주었다.
-삐야악 삐약 삐야아악
-삑삑?
진혁은 아까 받았던 치즈 브레드를 손으로 조금 부수었다. 알레한드로가 구워낸 빵이다.
“자아, 간식을 좀 먹어 볼래?”
물과 달걀, 그리고 소금과 이스트, 밀가루만을 사용해 치즈를 얹어 만든 정통 치즈 브레드다.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만든 치즈 브레드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이 더 맛있게 만들 수 있게 되면 그때 맛보여 주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진혁은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야겠다고 하며 빵을 뺏어왔다.
‘생각보다 괜찮았지.’
무하마드 왕자가 따로 데리고 있는 요리사들 전부 실력이 낮지 않았다. 치즈 브레드도 맛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무하마드 왕자가 좋아하던 짜고 자극적인 맛이 강했다. 단 한 사람의 고객만을 위한 요리를 개발하다 보면, 오직 그 사람의 입맛만을 만족시키느라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조금 더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진혁은 부순 빵조각을 허공에 띄웠다. 보안상 정원에도 CCTV가 설치되어 있다. 그는 CCTV의 사각지대를 향해 빵조각을 둥실둥실 날려 보냈다.
어미 새가 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영문을 모르는 아기 새들이 저마다 재잘거리며 울었다.
-삐야악
-삐약?
-삐약삐약?
잠시 고요해졌다. 그리고 바로 날카롭고 작은 부리가 휙 하고 손톱만 한 빵조각을 낚아챘다.
어미 새는 빵조각을 꿀떡 삼켰다. 부리를 몇 번 움직이더니 흐물흐물해진 조각을 아기 새들의 입에 조금씩 넣어 주었다. 삐약거리던 아기 새들은 입에 무언가 들어오자 조용해졌다.
‘꼭 그 녀석들 같군.’
진혁은 그 광경을 보며 무하마드 왕자와 강마리오를 떠올렸다. 조잘조잘 멋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늘어놓다가도 먹을 것을 꺼내오면 바로 조용해진다.
‘인간이나 새나 비슷하군.’
그는 치즈 브레드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어미 새에게 주기에 적합해 보였다.
다음날, 오전 달리기를 마치고 난 요리사들이 주방에 모였다. 진혁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요리사를 위한 특별 미각 훈련 과정은 미식가를 위한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진혁은 창의적인 요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 구상 과정에 대한 설명이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새로운 메뉴를 구상할 때 어떤 식으로 합니까?」
「모방을 합니다.」
「처음에 빵을 구워 먹은 사람은 버터를 발라 보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빵과 버터를 따로 먹었겠지요. 누군가 빵에 버터를 발라 먹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걸 모방할 겁니다. 여기서 그 ‘모방’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배웁니까?」
「버터를 빵에 바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빵의 맛을 기억하고, 버터를 바르는 것이 나은지 어떤지 떠올리고 상상하며 구상하고 판단해 보는 겁니다. 그러려면 빵의 맛을 기억한 다음에, 곁들일만한 다른 재료들을 맛보고 빵의 맛을 상상해 결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요리사의 미각과 미각 기억력이 중요해집니다.」
요리 학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빵을 실제로 구운 다음에 미리 정해져 있는 몇몇 소스들을 곁들이도록 한다.
「버터가 아니더라도 블루베리 잼이나 딸기잼, 라즈베리 잼이나 꿀을 같이 내놓으면 되는데요.」
「올리브유에 발사믹 식초를 함께 내놓아도 되고요.」
요리사들의 말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기존의 규칙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존의 규칙만을 따르실 겁니까? 새로운 요리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내 이름이 붙은 요리를 만들어 맛의 지평을 개척하고 싶지 않습니까.」
학교에서는 기존의 요리 규칙을 학습시킨다. 그 규칙을 완전히 익힌 다음에야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요리사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요리를 해왔고, 그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페드로가 말했다.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도 기존의 요리에서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야 손님들이 좋아합니다만.」
「함께 써보지 않았던 재료를 추가할 수도 있고 그 재료를 다루는 방식을 다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만족하면 안 됩니다. 다양한 재료들을 시험해 보며 요리의 단계별로 맛을 다시 향상시켜야지요.」
꼬미 요리사 한 명이 말했다.
「버터가 발라진 빵은 그냥 버터가 발라진 빵일 뿐인데요. 너무 단순한 요리고, 함부로 손대기도 좀.」
페드로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끼어들었다.
「식전 빵은 일부러 가장 단순한 거로 내놓고 있습니다. 요리와 요리 사이에 맛을 죽이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버터나 발사믹 식초 그리고 올리브유 말고 다른 걸 내놓으면 오히려 맛을 느끼고 즐기는 데 방해가 될 뿐인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미식가들은 코스 요리 중간중간마다 스파클링 와인이나 탄산수, 그리고 담백한 빵을 먹는다.
방금 먹은 음식의 맛을 씻어내어 미각을 다시 갱신하지 않으면 맛이 섞여, 새로운 음식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 담백한 맛조차 방해가 된다고 여겨 물을 마시도록 권유했다.
「요리사라면 최대한 다양한 맛을 혀로 기억해 두고 언제든지 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혁의 짧은 강의가 끝났다. 이제 실전이다.
요리사들은 저마다 토막토막 난 허브나 향신료를 보고서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이게 레몬인가?」
「시트러스 계열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과학 실험 과목을 수강하는 고등학생들처럼 갈팡질팡했다.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날 무렵, 진혁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알레한드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저. 제 치즈 브레드는 어땠습니까?」
「반응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예상외의 긍정적인 반응에 알레한드로가 신이 나서 말했다.
「치즈가 너무 약하지 않나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조금 더 치즈의 맛을 강조하려면 설탕을 조금 추가하면 어떨까 하고도 생각했는데.」
「인간에게 주려면 그게 낫겠군요.」
「잠깐, 누구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알레한드로가 따져 물어보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무하마드 왕자가 바로 들어왔다.
「진혁! 요리사들 수업은 다 끝났나?」
「예.」
「밥 앤더슨의 소식은 들었나.」
「예.」
무하마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네하고는 꽤 친하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가봐야 하는 게 아닌가.」
「무하마드 왕자님과 한 계약이 먼저니까요.」
무하마드 왕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촉촉하게 젖은 눈을 하고서 진혁의 양손을 맞잡았다.
「나와의 약속을 그렇게 중히 여기고 있었다니 고맙네.」
「아니, 그건.」
장례식도 끝났고, 지금 가봤자 무덤을 참배할 뿐이다.
진혁은 이미 그가 살아있을 적에 어머니의 맛을 재현한 수프를 만들어 주었다. 1주일 이상 먹을 수 있게 넉넉한 양을 만들어 주었고, 요리사에게 레시피도 전달했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만들기 어려운 종류의 수프는 아니었기에 담당 요리사가 제대로 만들어 주었으리라 믿었다. 하나 밥 앤더슨은 따로 편지를 보내어 진혁이 직접 만든 수프가 아니면 어머니의 맛이 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그래서 진혁은 별도로 수프를 만들고 냉동하여 비행기를 통해 밥 앤더슨에게 보내 주었다.
「그럼 독이 든 수프 이야기도 들었나?」
「…독이 든 수프라니요?」
「몸 상태가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의사가 한두 달은 더 살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네. 그런데 마지막으로 수프를 먹고 그대로 사망했다고 해. 독살 의혹이 있어 뉴욕 경찰이 조사 중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