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9화
임진혁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무하마드 왕자가 먼저 말했다.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자네, 알랭 들롱. 내가 뛰라고 했으면 뛰는 거지. 왜 이유를 묻지?」
팔 년을 넘게 일했는데 이름조차 기억해 주지 않았다. 알레한드로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밑에서 일해왔다. 페드로의 경우도 있어서 종종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주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식으로 굴지는 몰랐다.
「페드로 쉐프님께서는 관절이 좋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무리해서 뛰게 하시면 몸이 크게 상하실 텐데, 이렇게 일부러 괴롭히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알레한드로가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 뒤에 서 있던 꼬미 쉐프들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해고당할지도 몰라.’
알레한드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페드로가 거친 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그가 말했다.
「알레한드로, 그만둬. 무하마드 왕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애들을 잘못 교육했습니다.」
무하마드 왕자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진혁이 무하마드 왕자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무하마드는 돌아오는 전용기 안에서 진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다짜고짜 체력훈련부터 하자고 하면 분명히 반감이 있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제가 훈련의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하지만 무하마드 왕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네 스타일대로 설명하면 분명히 말 나올걸. 내가 하라고 하면 할 거야.」
과연 임진혁이 말한 대로다. 무하마드 왕자는 자존심이 상했다. 진혁 쉐프에게 자신이 주방의 요리사들을 잘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오히려 정반대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관절이 좋지 않은데 일은 어떻게 하나?」
무하마드 왕자가 페드로에게 직접 말했다. 페드로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걸을 수는 있지만 뛰기는 어렵습니다.」
진혁이 말했다.
「그러면 누워서 다리만 움직이면 됩니다. 카심, 매트를 가져다주겠나?」
카심이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페드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누워서 다리를 움직이라고요?」
「과체중이기 때문에 관절에 부담이 가서 통증이 오는 겁니다. 근육의 힘을 기르면 관절에도 부담이 덜해질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달리는 동안 매트 위에서 다리를 계속해서 움직이면 됩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핑계를 대서 운동 프로그램에서 빠지려고 했던 페드로가 눈알을 굴렸다. 알레한드로가 말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저희도 오후의 요리를 준비하려면 바쁩니다. 이런 데에 쓸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알레한드로가 성급하게 말하는데 페드로가 제지했다.
「임진혁 쉐프님이 빵을 맛있게 구우시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동처방 전문가가 아니라 제과제빵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조심스럽게 온건하게 말하는데 알레한드로가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페드로가 알레한드로의 발뒤꿈치를 톡 하고 건드렸다.
‘야, 이 자식아! 입 좀 닥쳐!’
알레한드로는 페드로가 아끼는 수 쉐프였다. 하지만 그는 페드로가 보낸 신호를 완벽하게 오해하고 말았다.
‘페드로 요리사님께서도 내 마음을 알고 계셔.’
그는 언성을 높였다.
「빵을 잘 굽는다고 해서 운동을 잘 하리라는 법은 없잖습니까? 저희들이 운동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냥 개인 시간에 운동하라고 말씀하시면 될 일입니다.」
해고당할 것을 각오하고 그는 본심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요리사입니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 고용되었단 말입니다. 달리기를 시키고 싶으면 운동선수를 고용하시지요!」
페드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이 정도까지 격렬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알레한드로는 무하마드 왕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고, 왕자가 얼마나 성격이 더러워질 수 있는지 몰랐다. 그는 죽일 듯한 눈으로 알레한드로를 노려보았다.
‘이 새끼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여기서 지금 폭탄을 터트리냐? 어차피 왕자님은 곧 나에게 돌아오실 거야. 지금은 그냥 무조건 숙이고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답이야. 왜 몰라!’
하지만 페드로의 마음은 알레한드로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알레한드로는 생각했다.
‘헤드 쉐프님도 화가 나셨어. 아무렴, 저렇게 뭣도 모르고 기고만장한 페이스트리 쉐프 놈을 보면 분노할 수밖에 없지. 내가 해고를 무릅쓰고서라도 저 입만 살아있는 놈의 정체를 밝혀야겠어.’
두 이탈리아 요리사가 상반된 생각을 하며 서 있는 가운데 무하마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고용 계약서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기억하고 있나? 내가 지시하는 것에는 뭐든지 따르라고 되어 있지.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한, 내가 지시하는 것들은 뭐든지 하겠다고 서약하지 않았나?」
그가 차갑게 말했다.
「살인, 강간, 화폐 위조만 아니라면 모든 것을 하겠다고 동의하고서. 지금 고작 달리기 따위를 하지 않겠다고 요구하는 건가? 자네는 해고야-.」
알레한드로는 허탈해졌다.
‘고작 이런 말 한마디 했다고 해고당할 일이었나? 난 이곳에서 도대체 뭘 했던 거지?’
무엇을 위해서 몇 년간 그렇게 열심히 일했나.
허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왕궁의 뒤뜰에 정원을 가꾸었다. 처음에는 토마토와 몇 가지 허브를 재배했다. 하지만 사입되는 우유와 치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따로 요청해서 젖소 두 마리를 들여왔다. 송아지 때부터 키운 두 마리의 홀스타인종 암소들이다.
메어리와 엘렌이라고 이름을 짓고 소중하게 키웠다. 소들은 아랍의 더운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를 위한 온실 하우스가 지어졌다. 무하마드 왕자는 ‘직접 만든 치즈’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비용은 투자할 수 있다며 흔쾌히 막대한 양의 예산을 허락해 주었다.
투자해주신 만큼 직접, 최고의 맛을 내고 싶었다.
그는 소젖을 직접 짜서 우유를 만들고, 그 우유로 치즈를 만들었다. 치즈의 명인을 방문해 모차렐라 치즈부터 리코타 치즈까지, 다양한 치즈를 만드는 방법을 전수받았다.
그 과정 역시 전부 무하마드가 지원해주었다.
신뢰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최고의 요리로 보답하고 싶었는데.’
젊고 잘생긴 동양인 쉐프를 데리고 오더니 엉뚱한 핑계를 대며 허약한 헤드 쉐프를 강제로 무리하게 달리게 한다. 그리고 부당한 요구에 항거하는 쉐프들을 해고해버린다.
‘그리고 자기편인 쉐프들을 데리고 오겠지. 무하마드 왕자님 밑에서 천년만년 일하려고 할 거야.’
결국, 옛 헤드 쉐프의 밑에 있었던 자신은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해고당해 버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눈동자에 총기를 잃고 멍하니 서 있는 알레한드로에게 진혁이 말했다.
「무하마드 왕자님은 당신을 당장 해고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임진혁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담담하고 평온한 어투에서 오히려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당장이라는 말은.」
「요리사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 요리?」
「요리를 잘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요리 학교에 입학했을 때, 면접관이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요리를 잘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때 같이 면접을 보던 다른 학생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던가?
「체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려는 거지? 그러니까 운동을 하자고 시키려는 거 아니야.」
알레한드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대답했다.
「물론 체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또 뭐가 필요할까요?」
임진혁은 전혀 풋내기 요리사 같지 않았다. 오히려 면접을 보던 요리학교의 교장 같았다. 거장의 풍모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리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뭐야, 배우 같은 면상을 하고 도대체 여기까지 와서 왜 요리를 한다는 거야.’
그와 다른 쉐프들 그리고 페드로는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무하마드 왕자는 페드로의 요리에 만족했고, 알레한드로의 치즈도 즐겼다. 그런데 그 평온한 일상이 갑자기 부서지고 있다. 이제 해고당하면 다시는 메어리와 엘렌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메어리와 엘렌은 왕궁의 재산.
그가 절대로 데리고 나갈 수 없다.
모두 눈앞에 있는 이 남자 때문이다.
「대답하지 않습니까?」
진혁이 한 번 더 물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눈앞의 남자를 원망하고 있던 알레한드로는 그만 엉뚱한 대답을 해 버렸다.
「메어리와 엘렌이 필요해.」
「예?」
전혀 엉뚱한 대답에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는 ‘맛있는 요리’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그래야 ‘미식 트레이닝’의 필요성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
「메어리와 엘렌은 누굽니까?」
굳어버린 알레한드로를 제치고 페드로가 앞으로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왕궁에서 키우는 암소입니다.」
「아… 뭐, 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를 하는 데에는 소가 필요하다. 식재료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지금 왜 저 대답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진혁이 질문을 하기 전에 무하마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알랭 들롱, 자네는 치즈 요리가 특기였지?」
알레한드로가 대답했다.
「제 이름은 알레한드로입니다.」
「그래, 어쨌든 말이야. 일단 임진혁 쉐프가 구워주는 치즈 케이크를 먹어 보게. 그러면 자네도 달리는 데에 동의하게 될 거야.」
이탈리아 요리는 치즈와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가 없다.
알레한드로는 다양한 종류의 치즈를 아주 잘 다루었다. 페드로가 굽는 피자에 들어가는 치즈의 양을 조절하는 것도, 어떤 치즈가 좋을지 고르는 것도 전부 알레한드로의 일이었다.
금요일 디너 파티에 올라갈 치즈 플래터에서 와인과 어울리는 치즈를 고르는 것도 그가 했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치즈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다.
「그럼 안 달려도 됩니까?」
진혁이 말했다.
「달리는 건 하셔야 합니다.」
무하마드 왕자가 미소지었다.
「치즈 케이크를 구워줄 때 내 것도 세 판 부탁해.」
「혼자서 세 판이나 드실 겁니까?」
「당연하지. 이번에는 왕궁 요리사의 고문 자격으로 왔으니 내가 요청하는 것들은 다 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뭐,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요.」
진혁이 승낙하자 무하마드 왕자가 환하게 웃었다. 알레한드로도 페드로도 무하마드가 이 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왕자님, 치즈 케이크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페드로는 멍한 표정으로 무하마드 왕자를 바라보았다.
무하마드 왕자가 웃었다.
「정말로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말이야, 싫어하는 음식도 좋아하게 만든다네.」
알레한드로가 페드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국에 가 계신 동안 페드로 헤드 쉐프님과 제가 함께 개발한 치즈 브레드가 있습니다. 그걸 한 번 드셔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무하마드 왕자가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이지, 함께 먹어 보겠네. 치즈 케이크를 먼저 먹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