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56화 (554/656)

제 556화

드라마 <천마>는 성공리에 시즌 3까지 방영되었다.

어떻게 보면 광안마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온 세상에 털어놓은 셈이다.

비밀리에 써 놓은 비망록을 아들이 몰래 소설인 양 드라마화시켰으나, 진혁은 그게 아들의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 머리 좋은 놈은 비망록을 숨기려면 얼마든지 철저하게 숨길 수 있었다. 재능 없는 소설가인 아들이 영감을 찾아 헤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수첩을 노출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이야기를 가공해 소설을 썼다. 소설은 황태명의 묵인, 아니 도움 하에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전역에 번역하여 수출되었고 나아가 영상화까지 되어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혈도객과 검림, 그리고 제갈책.

젊고 어리석으며 혈기가 넘쳤던 시절.

지금은 돌아오지 않는 그때의 이야기. 진혁 역시 그것을 보고서 광안마를 찾았다.

「그, 그래.」

황태명이 임진혁에게 장 노인의 존재를 숨긴 것처럼, 장 노인에게는 드라마의 존재를 숨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애초부터 취미가 동굴에 혼자 틀어박혀 조각을 하는 것이다. 황태명 말고 다른 사람들과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나?」

「처음에는 사악한 환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파 놈들의 함정에 걸려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아기로 태어나 누워 있노라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더군요.」

「그랬군.」

「저는 그놈처럼 머리가 좋지 않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나가서 밭일을 하면서, 현실에 치이다 보니 옛 믿음은 점차 흐려져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오리를 만났지요.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알고 있었던 비법을 사용해 구우니 그때 그 맛이 나는 겁니다.」

「호오.」

진혁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장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사고로 조실부모하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놈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놈이 저를 찾아왔다는 쪽이 맞겠지요.」

「어떻게 찾았나?」

「음, 제가 실은 오리를 좀 잘 굽습니다.」

장 노인이 뿌듯하게 말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렇지.」

「원래도 잘 구웠지만, 현대에서는 정말로 훨씬 더 잘 굽습니다. 내가 구운 오리 구이를 먹으면 다 늙어 가던 노인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니까요.」

「허허.」

「이동하는 방랑 오리 트럭이 꽤 유명해지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주방장으로 고용해서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고, 전부 준비해 줄 테니 마음대로 요리만 해 달라는 사람도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개중에서 미친놈이 하나 있어서, 엄청나게 좋은 조건을 내미는 겁니다.」

「그게 뭐였는데?」

「문에 조각을 장식하게 해준다는 거지요.」

진혁이 킥킥 웃었다.

「해와 달 조각 말인가?」

「일월신교는 이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새로운 종교들이 살아 남아 있지만, 위대한 주군의 모든 것이 기록 속에서도 완전히 없어진 겁니다. 옛 학자들을 아무리 찾아다녀도 그저 몇 글자만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찾아낸 단서였죠. 그 문양을 보여주면서 이걸 만들어 줄 테니 오너라, 하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랬겠군.」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신교에 대해서 아는 척, 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저야 위대한 신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진혁이 눈알을 굴렸다. 이 순진한 부하 녀석이라면 바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 같은데 의외다.

「어째서인가?」

「어렸을 적에 멋모르고 몇 마디 했다가 미친놈 취급받은 적이 있으니까요. 주군께서는 영명하고 신중하시어 그런 일이 없으셨겠지만 저는 어리석어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렸던 장 노인은 신교에 대해서 발설하면 누군가 자신을 추적해서 찾아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렇게 위대하고 강성했던 신교가 사라졌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살부의 패륜을 저지른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무공을 가르쳐 주며 친아버지보다 더한 부정(父情)으로 감싸준 분. 그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신교란 현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희망을 버린 채, 그저 부평초처럼 세상을 떠돌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진혁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장 노인은 지나치게 성정이 곧았고 외골수처럼 한 가지만 바라보았다. 능글맞고 속이 깊은 황태명과 달랐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장 노인은 열심히 살아왔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진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렴, 자네가 구운 오리 구이는 천하제일이지. 황제의 숙수가 와도 당해내지 못할 걸세.」

「이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었죠.」

장 노인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런 누추한 곳에 머물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야기가 길어졌다. 장 노인은 골목 안쪽으로 진혁을 안내했다.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들 뒤로, 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목제 침대 틀이 보였다. 예쁘지는 않지만, 만듦새가 튼튼했다. 그 위에는 비단 이불, 요가 깔려 있었다. 노인은 비단 이불을 아낌없이 들어내 바닥에 깔고 진혁에게 앉으라 권했다. 비단 이불 아래에는 진혁도 이름을 알 정도의 최고급 라텍스 매트리스가 깔려있었다. 진혁이 잠시 시선을 매트리스에 두자 장 노인이 부끄러워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수련하는 자가 편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나이가 있다 보니 찬 데서 자면 온몸이 쑤십디다그려. 한서불침이 되지 못한 제 탓입니다.」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가 여든 노인을 달래어, 부축해서 자리에 앉게 했다. 못내 사양하려던 장 노인이 배시시 웃으며 이불 한 끝에 같이 앉았다.

진혁이 말했다.

「…자기 몸을 잘 챙기는 건 좋은 일이야.」

「그래도 이곳이 전에 신교에서 어린 교도들의 육성에 쓰던 곳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내공을 아주 빠르게 쌓을 수가 있어요.」

장 노인은 고작해야 새싹만 한 수준의 내공을 가졌을 뿐이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앞으로 주군께서도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하시지요. 제자가 전심전력으로 보필하겠습니다.」

「…아니, 나에게도 현생의 삶이 있어.」

「주군께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혹시 돈 같은 것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얼마든지-.」

「아니, 아니, 나는 정말로 괜찮아.」

두 사람은 세상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아내에 대한 말도 하게 되었다.

「혼인을 하셨다고요.」

진혁은 아직 그 상대가 황태명의 손녀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는 대답하기 어려운 사실을 회피하며 질문으로 되물었다.

「자네는?」

「일월신교의 위대한 교리를 이해하는 부인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이까지 혼자 살았다고?」

진혁이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자 장 노인이 발끈했다.

「사내에게는 여자 없이 이루어야 하는 대업이 있는 법입니다. 무공을 되찾아 일월신교를 재건하여 주군의 위엄을 세상에 널리 떨치려 하였습니다.」

‘그 도토리보다도 못한 내공으로?’

진혁이 장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 노인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영산을 찾아도 내공을 쌓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공기가 탁하고 오염되어 있어, 이곳을 찾은 후에야 간신히 약간의 진전이 있었지요. 이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남기는 것은 고작 오리고기 요리법 하나뿐인가 하는 후회도 있었지요.」

장 노인이 기운차게 말했다.

「이 장유향, 살아서 주군을 다시 만났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천 번의 삶을 다시 살더라도 내 남은 삶은 주군을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진혁이 진지하게 사양했다.

「아니, 괜찮아.」

하지만 혈도객, 아니 장유향 노인은 듣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바닥에 이마를 대며 엎드려 말했다.

「그러니 지금 저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자네 심장 같은 걸 받고 싶지는 않아.」

그는 진혁이 뭐라고 대답해도 무시하고 자기 할 말만을 했다.

「오리고기 요리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황가가 보낸 주방장들은 언뜻 보면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비결을 알아낸 다음에는 황가에게 유출할 것만 같더군요. 그래서 고집이 세고 욕심이 많은 애들을 골라서 가르쳤습니다. 황가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갖다 바쳐도 절대로 비법을 말하지 않을 놈들 말이죠. 그러니 지금 이 오리 구이의 비법은 총주방장하고 저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려 드리면 주군께서도 알게 되시겠지요.」

진혁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장유향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위엄 없는 자세를 본 장유향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주군께서 그런 자세를 하시면 안 됩니다!」

「자네 지금 내 목소리가 들리나? 가는 귀먹었어?」

「아무래도 나이가 들다 보니 조금 그런 감은 있지요.」

진혁은 목소리를 조금 크게 해서 다시 말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더 이상 주려고 할 필요는 없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저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는데요.」

「하지만 지금의 삶은 자네의 것이야.」

장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닙니다. 모두 주군의 것이죠.」

진혁은 이 고집불통 노인을 어떻게 설득할까 잠시 고민했다.

「….」

똑같이 현대에 다시 태어났는데도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남은 자가 있는가 하면, 이렇게 한 길만을 파고 있는 자가 있다.

자신 역시 일월신교의 교리가 진리이자 세상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현실 세계의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니 일월신교의 교주인 자신보다 부모님의 아들 그리고 진희와 피를 나눈 남매인 자신을 선택했다.

「이 오리 구이에는 특별히 오랫동안 말린 비밀 약초의 가루를 뿌려서 사용합니다.」

진혁은 이미 그 약초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비밀 약초라.」

그가 싱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제가 미리 만들어 둔 약초 가루가 좀 있으니 이걸 사용해서 만드는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잠깐, 총주방장에게도 약초가 어떤 건지는 알려 주지 않았나?」

「레시피 자체는 알지만 어떤 약초인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약초는 제가 직접 밭에서 길러 말린 후 가루로 만든 다음에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어차피 비밀을 알려 주지도 않았군.」

「다른 약초들과 섞기는 했지만, 분석하면 뭔지는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비율은 아무도 정확히 모르니 아직 제 비결은 제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최후의 한 수는 남겨 두었구나.’

과연 강호의 늙은 생강답게 모든 것을 전수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니 약초가 떨어지면 급하게 장 노인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찾으러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겠군.’

진혁이 혀를 찼다. 과거 무림 출신으로서 장 노인이 왜 그렇게 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재료를 찾으러 오는 제자들의 입장 역시 알 수 있었다.

장 노인이 문득 다짐했다.

「황태명 그놈은 아주 뱃속에 구렁이가 득시글한 능구렁이입니다. 주군께서도 그놈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이미 죽었는데 무슨 소용인가.」

「진짜로 죽었는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전에도 몇 번 죽은 척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도 그렇고, 빚쟁이들이 몰려왔을 때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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