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5화
날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내려앉아, 땅을 내리찍었다.
쿵!
흙이 흩날리며 나무가 요동친다. 뿌리 깊은 나무마저 흔들리고, 새들이 소리 없이 날아오른다. 흙 속 깊이 잠들어 있던 벌레들이 깨어나서 달아났다. 인간의 기척은 땅속 깊숙이, 지하 동굴 속에 있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분명한 동굴의 입구가 근처에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진혁은 더 이상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발을 내리찍었다.
쿵!
얇은 흙 천장이 무너지며 숨어 있던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종유석들이 부서진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진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과했나?”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길, 어느 쪽으로 가도 좋다.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막힌 길이 있으면 뚫으면 된다.
‘여기는….’
자연 동굴을 개조해,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침낭과 모포, 그리고 비상식량. 현대의 통조림과 군용 식량으로 보아, 최근에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의 충격 때문에 망가지고 부러진 나무 선반도 있었다. 그 선반에서 굴러떨어졌는지 해와 달을 깎아 조각한 목상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저쪽이군.”
진혁은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발걸음 소리를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는 노인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다시 기를 퍼트렸다. 분명히 고요하던 상대의 심장박동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진다. 노인이 놀란 것이 분명하다.
진혁은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청아.」
그는 혈도객의 이름을 불렀다. 오직 그만이 부르던 호칭이다.
그렇지만 돌아온 것은 반가워하는 음성이 아니었다. 격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태명이 이 몹쓸 놈아! 또 무슨 사기꾼을 보낸 거냐!」
내공이라고는 없는 노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화가 난 나머지 부들부들 떨렸다. 동굴 너머에서 인간의 그림자가 언뜻 비춰 보였다. 종유석 조각이 날아왔다. 약한 힘으로 위협하기 위해 던진 것이다. 진혁은 가볍게 고개만 움직여 피했다.
「청아, 나를 모르겠느냐.」
「황태명! 내 네가 죽지 않은 걸 알고 있었지. 감히 그분을 사칭해 나를 농락하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 소리는 과거 진혁이 내내 들어오던 그 음성과는 달랐다. 말투 역시 다르다.
현대적인 말투였으나 괴상한 억양이 섞여 있었다.
황태명이 완전히 현대에 적응해 고압적인 말투를 쓰던 것과 대조적이다.
옛 방언의 억양이 섞여 있는 울음 어린 절규를 듣고서 진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청아, 네 아버지가 육손이었지.」
이복형제는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시체를 파냈다. 이미 썩어가는 시체의 오른손을 보여주며 육손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신원을 증명했다. 가문의 무공을 익힌 흔적과 육손이라는 사실, 두 가지 증거.
진혁은 차라리 손을 없애 버리지 그랬냐고 말했다.
「차라리 손을 없애 버리지 그랬냐.」
과거 검림이 했던 말.
광안마도 모르는 사실.
그 말이 동굴 전체에 쩌렁쩌렁하니 울렸다. 그러자 노인이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방금 전에 진혁이 일으킨 지진으로 인해 어딘가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이마에 한 줄기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그 녀석도 그건 몰랐는데.」
「….」
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묵묵히 노인을 살펴보았다.
장 노인이라는 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비쩍 말라 뼈와 가죽밖에 없다. 하나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이 자를 여든 노인으로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백만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다쳤나?’
다행히 내장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 받은 충격 역시 단순히 거죽이 조금 다친 것일 뿐이다.
방금 전에 동굴의 천장을 무너뜨리면서, 멀리까지 충격파가 가지 않도록 조절했는데 작은 물건에 긁히거나 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자는 아주 조금, 씨앗만 한 내공을 단전에 가지고 있었다. 하오문의 삼류 잡배 수준이다.
‘황태명은 무공을 몰랐는데.’
진혁은 쉽게 과거의 공력을 되찾았다.
하지만 황태명은 내공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태극권 수련 같은 것을 계속 해왔지만, 그저 양생을 위한 건강 체조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암이 발병하면서 그만두었다.
나이든 놈에게 진혁이 내공을 전수해 주려고 했으나 그나마도 거절했다. 그는 자신이 떠날 때라고 생각했고 미련 없이 가버렸다.
심지어 친구의 생존에 대한 단서조차 흘리지 않고 갔다.
‘몹쓸 놈 같으니라고.’
다시 생각해도 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젊은 시절, 그 머리 좋은 놈이 현대 사회에서 일부러 내공을 쌓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무공을 창시할 정도로 똑똑한 녀석이다. 진혁은 녀석이 만든 천안투마공을 지금도 유용하게 쓸 정도다. 광안마는 당시 천안투마공 말고도 잡기에 가까운 다양한 무공을 창조해냈다.
그래서 그가 일부러 ‘무공을 익히지’ 않았을 가능성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들과 손녀에게도 가르치지 않은 것을 보니 잘 안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거였냐.’
새삼스럽게 광안마에 대한 감정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그는 중국에서 이루어 놓은 수많은 것들을 진혁에게 물려 주었다. 하지만 친구의 존재를 숨기고,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다.
‘왜 그랬냐.’
이 정도의 내공은 노화를 막아주지 않는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건강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니 지금 이 장 노인, 혈도객이 이 나이까지 정정하게 산을 탈 수 있는 것이다.
죽은 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진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상념을 털어버렸다. 대신 눈앞에 있는, 살아있는 자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혈도객, 나다.」
익숙한 어투, 그러나 발화하는 사람은 새파랗게 젊은 어린 청년이다. 장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버지이자 주군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역시 그런 거였냐.’
진혁은 말없이 앞으로 걸었다.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어있는 장 노인을 바로 앞에 섰다.
그리고 그자의 뒤에 있는 서툰 조각들을 발견했다.
나무를 깎은 것도 있었고 무른 돌을 깎은 것도 있다. 완성된 것도 있고 아직 깎고 있는 중인 것도 있었다. 모양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달리고 있는 말, 누군가 사람의 얼굴, 즐겨 쓰던 도끼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하나 해와 달, 일월신교의 상징을 조각한 것이 제일 많았다.
수백여 개가 넘을 크고 작은 조각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진혁이 나무로 깎아 만든 칼을 집어 들었다.
「내 칼을 아주 똑같이 만들었군. 하지만 길이가 조금 짧아.」
「…!!」
「이건 자네 도끼인데? 그런데 도끼 끝에 매달았던 구슬과 술이 빠졌군.」
노인의 눈동자가 천천히 커졌다. 진혁은 말을 이었다.
「직접 발견한 화전옥, 그중에서도 최상품의 청옥을 내가 다듬어 주지 않았나. 절반으로 나누어 반쪽을 내게 주려고 했는데 내가 거절하고 남양 백옥을 내렸지. 그러니 백옥과 청옥, 두 개의 구슬을 달고 다니지 않았나. 나중에 광안마 놈이 짜증 내면서 부하를 차별하는 것은 좋지 않다느니 어쩌느니 해서 비슷한 품질의 남양옥을 구해서 그놈한테도 줬지.」
「…정말로 태명이가 보낸 것이 아니, 아닙니까?」
존댓말 섞인 질문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죽었다. 장례도 치렀지.」
「그 교활한 너구리라면 얼마든지 죽은 척을 할 수 있습니다.」
「관에서 수배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죽은 척을 할 이유가 뭐가 있나?」
옛 시대를 함께 살았던 이여야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장 노인이 욕하듯이 내뱉었다.
「그놈은 머리가 지나치게 좋아 범인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죽었지. 화장해서 뿌렸기에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다.」
담담한 말투에 장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주군께서 제일 좋아하는 탄산음료는 무엇입니까.」
「…맞다. 너희들이 콜라 찾는다고 이상한 한약을 달여오지를 않나, 별짓을 다 했지. 능력은 좋아서 파사국에서 블랙커피를 가져오지 않았나? 오리고기를 먹을 때 말이야.」
그는 부복한 채로 고개만 들고서 애타게 외쳤다.
「…정녕 아버지이십니까? 저의 기원이 하늘에 닿아 저희들을 만나러 다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까?」
이미 진혁을 전적으로 믿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나 진혁은 방금 그 이야기를 듣고서 눈을 깜빡였다. 시간적인 순서가 다르다.
그는 이들을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출발해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그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일단 이마부터 보지.」
장 노인은 감격한 표정으로 이마를 바닥에 대며 오체투지를 했다. 핏방울이 번져 주변에 얼룩졌다.
「역시 주군께서는 부하 한 명까지 소홀히 하지 않는 자상함이 있습니다. 광안마 그 사기꾼 놈하고는 다른 도량이 있지요!」
「됐고 고개부터 들어.」
노인이 순종적으로 이마를 내밀었다. 진혁은 이미 투시하여 큰 상처는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긁힌 상처를 두 번이나 바닥에 대고 있었던 탓에 흙이 들어갔다.
「물은 어디서 구하고 있나? 아니, 아니다.」
바로 옆에 지하수가 시내처럼 졸졸 흐르고 있었다. 진혁은 손을 뻗어 그 물 덩어리를 들어 올렸다. 먼지와 물고기, 흙덩어리와 불순물들을 걸러내고 순수한 물만 남겨 허공으로 떠올렸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강대한 내공을 가진 자가 진기를 운용하는 능력이 절정에 당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다.
강호에서도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증명이다.
노인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으리만큼 흔들렸다.
「주군이시여!」
장 노인이 피를 토하는 것처럼 처절하게 외쳤다. 그는 물 덩어리가 이마의 피를 씻어내는 동안 안달복달하지 못했다.
「아버지시여! 단번에 주군을 알아보지 못한 이 어리석은 부하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를 보고 진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까까지는 안 믿더니?」
「우연히 하나를 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개를, 세 개를 알 수는 없지요. 그 비밀 좋아하는 놈이 대역 배우에게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을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배우가 허공섭물이라는 고도의 무공을 익혔을 리는 더욱더 없고요.」
혈도객, 아니 장 노인이 감격에 벅차서 말했다.
「무공을 되찾으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진혁은 눈을 깜빡였다. 그는 노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얘는… 드라마를 못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