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2화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미미가 말했다.
“앤더슨 씨는 어떠셨어요?”
“수프를 좋아했어.”
“당연하지요? 그럴 줄 알았어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하하.”
“진혁 씨가 만드신 수프를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요. 잘하셨어요.”
진혁은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바다 위, 창공은 한없이 태양에 가깝다. 양기를 모으기 매우 쉬운 장소다.
‘심해의 잠수함 속에서는 음기를 모으기가 더 쉽겠지.’
양과 음.
태양과 달.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더 태양과 가까워지는 감각이 생생하다. 활력이 전신에 솟구치며, 진혁은 저절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비행기를 탈 때면 늘 있는 일이다.
미미는 그런 진혁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여덟 시간 이상이 걸려 항주의 소산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벌써 밤이었다.
‘더이상 항주가 아니지.’
진혁은 현대의 항저우를 처음 보았다.
이미 북경에서 경험하긴 했다. 기와를 올린 대궐 같은 건물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고 초가집들이 둘러싸고 있던 옛 도시는 온데간데없다. 빼곡하게 솟아있는 빌딩 숲은 저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번쩍이며 뽐내고 있다. 8차선 도로에는 자동차가 가득하고, 도시 전체에는 매연이 가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울보다 더 공기가 나빴다.
‘기운이 좋지 않아. 이곳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겠어.’
진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미미가 들떠서 말했다.
“항저우에는 처음 오시지요?”
“처음입니다.”
마중 나온 리무진을 타고서 두 사람은 시내로 향했다. 진혁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차가 고급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하자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호텔이 아니군요?”
“할아버지께서 사둔 아파트에요.”
입주민이 아니면 아예 입구부터 들어갈 수가 없다. 아파트 안에는 방이 여덟 개 있었는데 놀랍게도 부부 침실과 거실을 제외한 여섯 개의 방에 모두 욕실과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미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결혼할 때 한국의 부모님이나 진희 씨가 언제라도 오셔서 머무실 수 있게 내부를 개조했어요.”
“….”
한족들은 손님 접대를 중시했다. 방 하나 하나에 욕실과 화장실만이 아니라 독자적인 텔레비전과 소파, 그리고 침대가 모두 놓여 있었다. 보통 원룸보다 더 넓을 정도다. 손님 방을 둘러본 진혁이 싱긋 웃었다.
“여기에 놀러 오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그렇죠?”
가끔 그녀는 진혁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준비하는 경우가 있었다. 집요할 정도로 치밀하기도 하며 엉뚱하기도 하다.
진혁은 그런 부분이 싫지 않았다.
‘결혼식 자체만으로도 바빴을 텐데 그 와중에 별장 재건축까지 하다니.’
하지만 그녀라면 항주만이 아니라 전역에 있는 모든 건물을 개조했을 것이다. 이곳 하나만 했을 리가 없다. 진혁은 미미의 부동산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 수가 많다는 것만 알았다.
“그럼, 잘 자요.”
◈ ◈ ◈
다음날 오전에는 미미가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했다. 항주까지 출장 온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헤어 스타일리스트 셋이 달라붙어 미미를 꾸며 주었다.
진혁은 팔짱을 끼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미가 오늘 어디에 가는지 알려 주었다.
“항주에는 황 그룹 소유의 식당이 200여 개 있어요.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식당 다섯 군데만 점검할 거예요.”
“그 녀석이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오리고기 식당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하지만 미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50여 년 전의 일이에요. 할아버지께서는 최고의 거지 오리 요리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어요.”
“최고의 거지 요리라.”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흙을 발라 땅속에 묻어서 요리하는 전통 방식을 그대로 따랐죠. 처음에는 간판도 없는 작은 가게였답니다. 한 마리의 오리를 굽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이윤도 적었어요.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고, 점점 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항주 외에도 분점이 생긴 거군요.”
“독립해 나간 요리사님들도 있고, 처음부터 프랜차이즈로 영업하고 싶다고 요청해오신 분들도 계셨지요. 그래서 체인점이 많이 생겼어요. 하지만 본점의 맛을 따라오지는 못하고 있어요.”
오늘 오전에는 다른 날과 달랐다.
주도적으로 일정을 수행하는 미미의 곁에서 진혁이 비서처럼 따라다녔다.
‘이런 일도 하는구나.’
진혁은 왕 비서의 곁에서 비서 1인 것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미미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전부 관찰했다.
‘호오.’
임진혁은 그녀가 스타일리스트나 헤어 아티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최측근에게 대하는 행동을 내내 봐 왔다. 그렇기에 미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스타일 팀원들은 부하보다 친구에 가까운 사람들이구나.’
하지만 다른 부하직원들을 만날 때 그녀는 아주 엄격한 상급자였다.
「이번 분기 보고서는 이게 전부인가요?」
「예!」
매니저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 서 있던 총주방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닙니다, 잠시만요!」
미미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소모품과 자재 구매 내역이 빠져 있는데요」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예산을 적절하게 관리해야 최선의 가격으로 최고의 요리를 내놓을 수 있지 않겠어요? 식자재 구매 내역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될 서류죠. 설마 요행을 바라고 일부러 빼놓은 것은 아니겠지요?」
휘리릭 넘기는 것 같으면서도 그 모든 서류를 전부 확인한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빼놓은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이 일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이 일은 왕 비서가 처리할 거예요.」
그리고 자신이 모든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적절하게 위임하고 자신은 뒤로 빠졌다.
‘아주 실용적이군. 정말로 할아버지를 닮았어.’
진혁은 나름대로 재미있어하며 미미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식당의 주요 지점 두 군데를 돌았고, 역시 황 그룹에서 운영하는 호텔 세 곳을 방문했다. 어디서도 넘치는 환대를 받았으나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인사를 했고, 예기치 않은 서류를 요구했다.
「직원 퇴사율은 얼마나 되나요?」
「이번 분기에 30%입니다.」
「지나치게 높은데요?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인사 담당 이사가 쩔쩔매며 대답을 늘어놓았다.
마지막 호텔까지 순방을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진흙 오리 구이 가게로 돌아왔다. 리무진의 뒷좌석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아 있던 미미가 웃으며 말했다.
「같이 돌아보니 어떠셨어요?」
「재미있었습니다.」
「비서처럼 그렇게 서 계시기만 할 줄은 몰랐어요.」
「오늘 오전에는 참관하러 왔으니까요. 일하는 모습이 멋지던데요.」
「호호.」
미미가 생긋 웃으며 립스틱을 꺼냈다. 그녀는 다홍빛 립스틱을 살짝 덧바르고서 달칵하고 다시 화장품 파우치를 닫았다.
「이 오리고기 가게에서 오리 구이를 먹는 건 두 번째에요. 제가 15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가 데려다주셨어요.」
「그렇습니까.」
「언젠가 이곳에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손님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자신이 원하는 손님은 오지 않았다며.」
「하하.」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중국의 오리고기 요리라고 하면 제일 유명한 것은 북경 오리구이다. 북경 고압(北京??) 흔히들 베이징 덕이라고 하는 이 요리는 특수하게 처리한 오리를 구워내 껍질만 바삭하게 만든 후 껍질만을 먹는다. 황제의 요리인 것이다.
반면에 진흙 오리구이는 거지들의 요리다. 개방의 방주였던 취개 녀석은 오리가 돌아다니는 것만 보면 오리를 훔쳐 왔다. 그리고 땅속에 묻어 놓고 그 위에서 불을 피웠다.
광안마 녀석은 그 오리 요리를 아주 좋아했다. 그렇지만 숙수에게 시켜 오리에 진흙을 발라 구워내라고 한들, 정파 놈들에게 추적을 당하면서 몰래 숨어 먹던 그때 그 오리고기의 맛은 나지 않았다.
긴박감과 초조함, 불안함. 그리고 사흘간이나 굶었기 때문에 느꼈던 극심한 허기. 그것들이 뒤섞여 오리를 더 맛있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저희 가게가 잘 되니까 유사한 가게가 성업하기도 했었어요. 토기를 만들어서 그 안에 오리를 넣고 굽는 거지요. 그럼 토기의 잔열로 오리가 익어요.」
「땅속에서 익는 것과 다를 것 같은데요?」
「당연히 다르지요.」
미미가 생긋 웃었다. 진혁이 문득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그 유사한 가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문을 닫은 지 오래랍니다.」
「하하.」
진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식당은 궁궐처럼 화려한 기와집이었다. 간판이 없기는커녕, 화려한 금빛 한자가 쓰여진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현판의 곁에는 커다란 나무 조각이 있었는데, 진혁은 그 모양을 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허.」
일월신교에서는 해와 달을 숭상한다.
그래서 돌을 깎거나 나무를 조각해 해와 달을 형상화해 모시곤 했다.
이곳에 있는 것이 바로 그 ‘해와 달’의 조각이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낯익은 모양이라 가슴이 뭉클했다.
아마도 황태명은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리라. 일월신교에 적을 두었던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모양새다.
진혁은 다짐했다.
‘나도 만들어서 집에 좀 둬야겠다.’
정문을 통해 들어가자 가운데에 있는 본채와 양쪽에 있는 곁채가 보였다.
자동차가 주차장에 멈추고 두 사람이 내리자마자 연락이라도 받았는지 총주방장과 매니저가 뛰쳐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회장님!」
그들은 국가원수라도 방문한 듯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겉에 걸치고 있던 겉옷을 건넸고, 매니저는 그 옷을 받아 걸었다.
총주방장이 다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용봉관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미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요리는 바로 준비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아주 통통하고 실한 놈을 준비해 뒀습죠.」
용봉관이란 본관의 뒤에 있는 자그마한 별채였다. 단청에는 주홍빛 용이 그려져 있었다. 미미가 속삭였다.
「용봉관은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올 때만 개방한답니다.」
황금색 술이 달린 붉은색 비단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자, 식탁 위에 있는 흉측한 회색 덩어리가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바윗덩어리로 착각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진흙 오리구이로군.」
진혁이 짧게 평했다. 그는 천안투마공을 사용해 흙덩이 안에 있는 오리를 평가했다.
흙을 바르다 못해, 아예 흙에 파묻어 버렸다. 안쪽에는 약초와 향신료를 풍부하게 들어있다.
이 오리는 토기에 넣어 구운 흔한 요리와는 달랐다. 정말로 통째로 흙 속에 넣어서 구웠다.
옛날 취개가 요리하던 것과 완전히 같은 요리 방식이다.
다른 점이 없지는 않았다. 오리는 크고 살집이 좋았다. 작고 빼빼 마른 근육질 야생 오리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큭.」
아직 오리를 먹지도 않았는데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어쩌면 어머니의 수프를 맛본 밥 앤더슨도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하하하!」
진혁은 웃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미가 걱정스레 말했다.
「저 회색 덩어리가 오리 구이에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