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51화 (549/656)

제 551화

진혁은 밥 앤더슨에게 수프 그릇을 건네주기 전에 경고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응?」

「내가 만든 수프가 기준에 맞지 않을 거라고 멋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불쾌합니다.」

「알겠네, 알겠네. 내가 잘못했다고.」

밥 앤더슨은 수프 그릇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릇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진혁이 다시 빼앗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한 번 준 걸 다시 뺏지는 않습니다.」

「하하하.」

밥 앤더슨은 한 수저를 떠올리더니 도로 그릇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릇을 들어 올리더니 혀를 살짝 내밀어 혀를 담갔다.

「내가 침 발랐으니까 이제 다른 사람은 못 먹네.」

「…어린앱니까?」

장난처럼 말하고 나서 밥 앤더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멈추지 못하고 수프를 계속 마셨다. 턱에 한 방울이 흐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동공이 확대되고 코가 벌렁거리며 귀까지 쫑긋거린다. 그릇까지 먹어버릴 기세로 벌컥벌컥 들이마시자 애초에 얼마 많지 않았던 수프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입을 벙긋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진혁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반응이다.

‘환영마라진에 당한 사람들도 이런 반응을 보이긴 하는데.’

진혁은 잠시 기다려 주었다. 십 분이 흘러도 밥 앤더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심장을 빠르게 뛰었다. 흥분과 격정, 그리고 열정으로 가득 찬 소리였다.

앤더슨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열려 있던 창문으로 햇빛이 비쳐 들어와 그 눈물이 잠시 반짝였다.

진혁은 깨끗하게 비워진 빈 수프 그릇을 손에 들었다.

「어떻습니까?」

「…엄마를 봤네.」

「예?」

「옛날에 살던 집이 화재로 전소되어 사진을 전부 잃어버렸네. 그래서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지금 이 수프를 먹으니까, 어머니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어.」

프루스트 효과.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즐겨 먹던 과자의 향기를 맡고 옛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걸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다. 이후 후각을 매개로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일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혁은 이러한 강렬한 풍미가 기억 중추를 자극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자주 봐왔다. 그렇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제가 성공했군요.」

진혁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내기의 결과로, 그림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자네는 아내에게 선물할 그림밖에 안중에 없지?」

「다른 건 그만큼 좋아하지 않더라구요.」

「내가 없으면 뭘 선물할 텐가?」

「치즈 케이크요.」

고민 없이 나온 답변에 밥 앤더슨이 탄식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농담을 건넸다.

「평생 치즈 케이크만 선물할 수는 없지 않나. 다이아몬드 반지라든가, 루비 귀걸이라든가. 나처럼 대가의 그림이라든가, 줄 건 산더미같이 넘칠 텐데 왜 하필 치즈 케이크야.」

다른 사람 앞에서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여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밥은 평소에 전혀 관심도 없던 분야에 대해서 언급하며 트집을 잡았다.

「다른 건 먹을 수 없지 않습니까.」

진혁도 그에게 맞추어 주었다.

「먹어서 없어져 버리는 선물은 그만 줘도 되지 않을까?!」

「맛있어서 좋아하는데요.」

진혁은 미미가 치즈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조그마한 치즈 케이크를 하루에 하나씩 구워 주고 있다. 엄지손가락만 한 스틱 모양의 미니 치즈 케이크는 오로지 미미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쁜 탓에 일하다가 끼니를 거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영양이 풍부하고 건강에 좋은 간식거리를 항상 챙겨주고자 했다.

본디 담당 조리사가 맡아 하던 일이지만, 결혼 이후에 간식만은 진혁이 담당했다.

진혁이 간식을 맡은 이후에 간식을 먹는 양이 훨씬 늘었다고 담당 영양사가 불평했을 정도다.

임진혁은 자신이 매우 훌륭한 배우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서 트집을 잡는 태도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치즈 케이크는 손에 낄 수도 없고 귀에 걸 수도 없네! 벽에 걸지도 못한다구.」

한편 밥 앤더슨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자네보다 나이가 많잖나, 여자도 더 많이 만나봤지.」

이 젊고 잘생겼으며 유능한 친구가 평화롭게 부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전수해주고 싶었다.

그는 방금 전에 정말로 어머니를 보았다.

실로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사진조차 없이 사라진 어머니의 모습.

어렴풋한 흑백 사진의 이미지로 흐릿하게 남아있던 그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대체되었다. 오래된 떡갈나무를 아버지가 직접 깎아서 만든 부엌 가구들 사이에 서 계셨다. 남는 옷감을 이것저것 기워 붙여 만든 두꺼운 앞치마에 발목까지 오는 린넨 스커트를 입고 있으셨다.

거대한 구식 오븐은 항상 달구어져 있어 쉴 새 없이 빵이 구워져 나왔다. 어머니는 빵 굽는 솜씨가 좋아서, 옆집 사람들도 어머니에게 반죽을 주고서 구워 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그리고서 고기나 과일 같은 것을 나눠 주었다.

오른쪽에는 직접 장작을 때야 하는 벽난로가 있었다. 어머니는 때로는 난로 구석에 무쇠솥을 올려놓고는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벽난로 근처에서 요리를 데우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바빠질 때마다 어머니는 난로 앞에 두어 개씩 냄비를 갖다 놓고 동시에 이런저런 요리를 한꺼번에 끓였다.

육수를 내기도 하고 감자를 삶기도 하며, 치킨 수프를 끓이기도 했다.

수프를 끓이며 무심하게 장작을 집어 들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가 신고 있던 투박한 나막신에 있던 생채기, 그리고 발밑에 깔려 있던 오래된 붉은색 체크무늬 러그, 하물며 그때 냄비 옆에 걸려 있던 채소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토마토로군!」

「맞습니다.」

「도대체 치킨 수프에 토마토를 왜 넣으신 거지.」

「어머니의 친구분께서 당시에 토마토를 재배하는데 취미가 붙어서, 어머니께 다량의 토마토를 전해 주셨던 것 같더군요.」

「자네, 설마 조사를 한 건가? 그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 당연히 조사해야죠.」

「그래… 그 마을에 가서 사람들에게 나와 내 어머니에 대해서 캐묻고 돌아다녔단 말이지.」

밥 앤더슨이 시무룩해졌다. 그는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사람들은 말이지, 나하고 어머니에게는 관심도 없었어. 특히 아버지가 쓰러져 죽고 난 다음에는 어머니에게 치근덕거리는 놈들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나를 무시하더니만, 내가 화가로 성공하자마자 느닷없이 편지 같은 걸 보내오면서 옛날의 진정한 우정을 기억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놈들일세! 내가 그 마을에 다시 가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특히나 그 집이 타버리고 난 후에는 더 갈 이유가 없어졌고 말이야.」

진혁이 말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잠깐!」

「왜 그러십니까?」

임진혁은 가방을 챙겼다. 빈 그릇은 밥 앤더슨의 가정부가 알아서 설거지해줄 것이다. 밥은 진혁을 다급하게 붙잡으려 했다.

「지금 어머니의 수프를 만들어 주었지 않나, 내 어머니의 추억에 대해서 좀 들어 줘!」

「저한테 의뢰하신 건 어머니의 수프 맛을 재현해 달라는 거지,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게 아니었는데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자네 아내는 도대체 자네를 어떻게 견디고 있나?」

「저희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내와 잘 지내러 가는 길입니다.」

이제 곧 항주로 비행기가 출발한다. 미미의 전용기는 진혁이 늦어도 기다려 줄 것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더 늦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그림을 전부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했단 말일세.」

밥 앤더슨은 열렬하게 말했다.

그는 방금 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는 감격과 기쁨으로 아직 행복에 젖어있었다.

임진혁이 조금쯤 눈치 없게 굴어도, 급하게 떠나려고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할 필요도 없겠지. 자네 아내가 중국에 훌륭한 개인 미술관을 갖고 있다고 들었네.」

막 자리를 떠나려던 진혁이 고개만 돌려 밥을 바라보았다.

「그림 주십니까?」

「맡겨 놓은 짐 가져가듯이 말하지 말게나!」

「안 주셔도 됩니다.」

「아니, 내가 주고 싶다니까! 제발 받아 가 줘!」

「변호사 통해서 서류 보내십시오.」

「왜 내가 주고 싶다고 애걸을 해야 하는 건가?!?」

「자신의 그림이 그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갔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아내만큼 적합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가난해져서 그림을 팔아치워 버릴 일도 없을 일도 3세대 이내에는 없을 거고. 혼자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미술관을 공개하고 있고요.」

「…공공 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이 제일 옳지 않은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다 내 자식 같은 그림들이니까.」

밥 앤더슨이 개운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걸로 이제 됐네. 어차피 관 속에 같이 갖고 들어가지도 못할 것들. 난 자네가 좋아. 자네 아내도 마음에 드네.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지.」

「이제는 제가 수프도 잘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하하하하! 그런 것 때문에 만들어주겠다고 한 거였나?」

밥 앤더슨이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당연하지, 첫 번째 수프를 먹었을 때부터 이미 인정했네. 그나저나 자네가 무슨 변덕이 생겨서 수프를 만들어주나 했는데, 그런 이유였구만.」

「아닙니다.」

진혁이 발걸음을 옮겼다. 밥 앤더슨이 외쳤다.

「내 그림들을 소중히 다뤄주게! 다른 사람들이 마음껏 볼 수 있게 해 줘.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볼수록 좋은 거라네. 나누면 나눌수록 더 좋아.」

임진혁이 떠나고 난 후, 그는 거품이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휠체어에 웅크리고 앉아 식탁 위를 쳐다보았다.

간병을 겸해 머무르고 있는 가정부 세바스찬이 말했다.

「미스터 앤더슨, 수프를 더 드시겠습니까?」

조금 전에 진혁에게 매달리듯 엉겨 붙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방금 전에 먹은 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어. 다른 걸 먹으면 완전히 잊어버릴 것 같아. 저 청년은 젊은 데다가 바쁘니, 앞으로 나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을 거야. 조금 전에 보여준 것도 엄청난 호의였지.」

그는 한숨을 쉬면서 식탁을 바라보았다.

「그림을 줄 테니까 수프를 더 달라고 할 수도 없어. 그런 식의 교환은 싫어하는 녀석이니 말일세. 순수한 호의로 건네는 것은 받지만, 대가를 원한다면 귀신같이 거절하더라고.」

「방금 그 임진혁 쉐프님의 수프입니다.」

「뭐?!」

「드시고 싶으면 더 드실 수 있게 하라고, 부엌에 한 솥을 더 끓여두고 가셨습니다.」

밥 앤더슨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역시 진혁 쉐프는 마음이 따뜻해.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바로 먹겠네. 당장 주게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