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50화 (548/656)

제 550화

왼쪽과 가운데, 그리고 맨 오른쪽.

밥 앤더슨은 똑같이 생긴 세 종류의 그릇 앞에서 갈등했다.

「어떤 것부터 마셔야 할지 모르겠군.」

기대감과 불안함, 그리고 초조함. 노인은 여러 가지 감정이 얼룩진 표정으로 망설였다. 진혁은 시계를 흘긋 보고서 지정해 주었다.

「이것부터 드십시오.」

가장 왼쪽에 있는 수프였다. 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는 성체라도 받듯이 경건한 표정으로 수프 그릇을 들어 올렸다. 늙고 주름진, 마디진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신중하게 출렁이는 국물에 살짝 혀를 갖다 대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한 미소가 살짝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주 맛있군, 그런데 이건 아니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 <당연한 마음>의 수프를 먹어봤지. 전에 먹어보고 맛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자네가 만들었다는 건 몰랐거든. 어제 그 레시피를 자네가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사 봤어. 맛이 있었지. 그런데 이 수프는 그 수프보다 확연히 월등하군! 왜 이걸 만들어서 팔지 않고 그런 걸 팔고 있나?」

「환자들이 먹을 수 있는 성분을 넣어서, 인스턴트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진혁이 가볍게 설명했다.

「어떤 점이 어머니가 만드신 수프와 다릅니까?」

「잘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네.」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흐린 기억을 더듬어 열심히 설명했다.

「조금 더 톡톡한 맛이야.」

「그럼 이번에는 가운데 수프를 드셔 보십시오.」

「잠깐, 이게 무슨 맛인지는 알려 줘야 하지 않나?」

진혁이 반문했다.

「어차피 어머니의 수프도 아닌데 아셔서 뭐합니까?」

「노인네를 궁금하게 하면 밤에 잠을 설칠지도 모르네.」

「선입견이 없는 편이 좀 더 맛을 느끼기 쉬울 겁니다. 먼저 세 수프를 전부 드시고 나서 이야기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는 두 번째 수프 그릇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다. 하지만 입에 대자마자 먹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것도 아주 맛있네. 아니, 도대체 이런 걸 만들어 팔지 않고 자네는 뭐 하는 건가? 이런 수프를 혼자서 만들어 마시다니 수프 업계에 대한 모독이네. 덕분에 나 같은 사람들이 맛없는 수프를 마시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농담 섞인 투정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어머니의 맛인지 아닌지를 대답해 주시지요.」

밥 앤더슨이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닐세.」

진혁은 실망하지 않고 재촉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수프나 드셔 보시지요.」

앤더슨이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시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지며 길게 한숨 쉰다. 눈앞에 있는 수프 그릇이 타락한 악마의 성물이라도 되는 양 외면하며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음?」

「내가 어머니의 수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세.」

밥 앤더슨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말하는 중간중간 떨리는 숨결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말이야. 힐튼 호텔의 총주방장에게도 부탁해 보고, 수프의 명인이라는 사람도 찾아가 보았지. 치킨 수프를 끓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찾아갔네. 자네한테만 부탁한 게 아냐. 이런 말을 지금 해서 미안하네, 미안해.」

앤더슨은 진혁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진혁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예, 그래서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실패한 어려운 과제를 부탁했는데, 화가 나지 않는가?」

「실패했으니까 맡긴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이 성공했다면 저한테 부탁하지도 않았겠죠.」

「…마지막에 부탁했던 특급 호텔의 주방장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왜 말하지 않냐고 화를 냈네.」

「그리고 자기도 실패했군요. 실력도 부족한데 인성까지 별로네.」

「하하하! 그 사람도 나름대로 뛰어난 사람이야. 그저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고 말하더라고.」

「그렇다면 더 많이 만들어 보면 될 텐데 말입니다.」

「진혁, 자네는 아직 젊어. 그리고 크게 성공했어. 그러니 세상에 불가능한 것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거야. 나도 그 나이 때는 그랬지.」

「….」

진혁은 자신이 젊다고도, 크게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제과제빵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이자 황 그룹 회장의 배우자로서 어디서도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내가 크게 성공했다고?’

그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인들이 소개해 준 일을 열심히 하였고 어쩌다 보니 옛 부하를 만났다. 소중한 인연을 떠나보내고 나서 놀랍게도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크게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된 판단으로 교도 전원의 생명을 한 손에 쥔 교주의 삶.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만 책임지면 되는 지금의 삶.

그는 지금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 임진희나 아버지, 어머니의 삶을 도우며 바꾸려 했다. 하나 그들은 처음에 발돋움할 때 휘슬 소리가 필요했을 뿐,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은 자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진혁이 책임질만한 여지가 별로 없었다.

그의 세계관 속에서 ‘큰 성공’은 타인의 삶을 포함해 생명을 전부 책임지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 진혁이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기준에서 ‘크게 성공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젊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진혁이 짧은 상념을 떠올리는 동안 앤더슨이 과거를 추억하며 아련하게 말했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첼시 갤러리에 그림을 올리고 나니 내가 크게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당시의 나도 지금의 자네처럼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단 말일세? 실패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어. 그림은 그리는 족족 비싼 값에 팔려나가고, 여자들이 졸졸 따라다녔지. 갑자기 목돈이 손에 들어오니 쓰는 것도 쉬웠어.」

「노인네 푸념 들어주려고 여기에 와 있는 게 아닙니다.」

진혁의 말을 무시하고 밥 앤더슨이 말을 이어갔다.

「너무 늦게 알았단 말일세. 세계에서 그림을 최고로 잘 그리면 그걸로 충분하다, 다 된다고 생각했어. 돈은 알아서 들어오고, 앞길이 찬란하게 빛났지. 그런데 건강이 사라지고 나니 더 이상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어. 새로운 작품을 그려낼 만한 의욕도, 용기도 동기도 사라지고 이대로 방구석 퇴물로 늙어 죽어가는 줄만 알았네.」

「….」

진혁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원래 시계를 차지 않았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흘러가는 시간을 짐작할 수 있기에 굳이 시침과 분침을 응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계는 아내가 결혼 예물로 준 맞춤 시계다. 좀처럼 차고 다니지 않았지만, 종종 아내와 함께 다닐 때는 스타일리스트가 차도록 권했다. 오늘 입은 남색 양복도, 시계와 구두 역시 미미가 붙여준 스타일리스트가 코디해준 것이다.

진희처럼 이런 것들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대우를 받으며 조금씩 변해왔다.

하지만 여섯 명의 시녀가 옷을 골라주고 입혀줬던 삶에 익숙했던 진혁은 지금의 생활 환경이 익숙했다. 지금의 삶은 ‘큰 성공’이라기보다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것을 되찾았을 뿐이다. 오히려 절대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 만큼, 아무리 사치스러움과 부유함을 만끽해도 이전보다 덜하다.

‘내 삶은 이미 예전에 지나치게 변했기에 지금은 더 이상 변할 일이 없지.’

지금은 은퇴한 할아버지가 섬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마냥 소소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지금 밥 앤더슨이 새삼스럽게 ‘삶을 후회하는’ 것이 너무나 어리고 우스웠다.

크게 성공했던 예술가의 오만.

삶이 끝나고 죽음이 오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 특유의 무신론적인 믿음.

자신이 더 나이가 많으며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

밥 앤더슨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고 예술가로서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진혁이 교주의 초상화를 맡기고 싶은, 궁중 화가로 추천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재야에 묻혀 괴짜 예술가로 홀로 그림을 그리다가 죽었다면 나름대로 존중해 주었을 것이다.

진혁은 밥 앤더슨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첫인상부터가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표출하지 않을 만큼의 예의는 있었다.

그러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미술 작가다. 그리고 곧 죽을 이다. 그러니 가는 길에 있어서 맛있는 것 정도는 먹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그가 나름대로 연민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진혁이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밥 앤더슨은 이야기를 마쳤다.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스러지고 나는 떠날 날만 남았어. 만일 자네까지 어머니의 수프를 재현해내는 데 실패한다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차라리 먹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게 진짜 어머니의 수프였다고 상상할 수 있잖나.」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럼 잘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수프 그릇을 도로 들어 올렸다. 밥 앤더슨이 벌떡 일어나려다 식탁에 그대로 엎어졌다. 챙강 하고 빈 그릇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또르륵 굴러갔다.

「아니, 무슨 짓인가?!」

「안 먹는다길래 치우려고요.」

밥 앤더슨이 주름진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한쪽 뺨에는 방금 튄 수프 얼룩이 묻어있는 채다.

「아니지! 자네는 이게 어머니의 수프가 맞다고 나를 확신시키면서 먹으라고 해야지!」

「?」

진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만 같다. 그는 수프 그릇을 들고서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명백히 거부하는 행동에 밥 앤더슨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왜 이러는 거야! 전에 펜로즈 삼각형 때는 나한테 꼭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그냥 두고 가! 제발 먹고 싶네!」

애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부러 일정까지 미루면서 만들어 왔는데 먹기 싫다고 하니 치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강제로 입을 열고 목구멍에 넣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는 그렇게 하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노인의 자기 연민에 관심이 없었다.

「나이 먹었으면 솔직하기라도 해야지. 이거 먹고 나서 아니면 다시 만들어 주세요, 하고 말하고 싶은 거 아닙니까? 애매하게 먹지 않겠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사람 간 보지 마시길. 기분 나쁩니다.」

「알겠어, 알겠어! 전부 내가 잘못했네. 지금 마시겠네.」

「싫습니다.」

「임진혁 님! 존경하는 쉐프님! 수프의 장인님! 조금 전에 만들어준 수프 두 그릇만 해도 여태까지 먹었던 재현품들보다 훨씬 어머니가 만드신 것에 가까웠네.」

밥 앤더슨은 온갖 칭찬을 주워섬기며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진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니, 제발! 부디 주십시오!」

‘이걸 줘, 말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