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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549화 (547/656)

제 549화

진혁은 죽어가는 이를 수없이 봐왔다. 그와 가까운 사람도 있었고 먼 사람도 있었다.

황태명, 광안마처럼 자신이 떠날 시간을 알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면서 가버리는 이는 많지 않았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진혁은 밥 앤더슨의 여생을 늘릴 수 있었다.

‘친구라.’

그러나 친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영생하게끔 할 수는 없다.

어딘가에서는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가기 전,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먹고 갔으면 좋겠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밥 앤더슨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뭐야, 말하면 만들어 줄 거야? 괜히 날 낚으려고 하는 거 아닌가.」

「오늘 저녁에는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잠깐 시간이 있으시다면 간단하게 뭔가 만들어 드리죠.」

「자네가 만드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

「…‘아무거나’ 말입니까?」

그는 밥 앤더슨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달콤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케이크를 좋아한다. 단단하고 바삭한 비스킷 종류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밥 앤더슨은 하지만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초콜릿 브라우니를 제일 좋아하니까 그걸 만들어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진혁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보았다.

「제비집 요리 이런 것도 괜찮으십니까?」

「오, 그 비싼 요리를 만들어 주려고? 들어본 적은 있지만 먹어본 적은 없네. 가장 값비싼 요리 재료들 중에 하나라던데. 금보다 더 비싸지 않나.」

밥 앤더슨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새되고 거칠어진 목소리는 갈라지듯이 간신히 흘러나왔다.

「자네는 언제나 내게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가져다주었어. 그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을 가져왔지. 내가 거부하고 거절해도 시대의 흐름처럼 밀려 들어와 강요하지 않았나?」

「제가 그랬다고요?」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밥 앤더슨은 그들이 처음 만났던 때 벌어졌던 일을 상기시켰다.

「내가 그 케이크를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억지로 먹게 하지 않았나. 그걸 먹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야. 형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세상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실히 달라. 오만과 아집 속에서 갇혀 있던 내게, 먹으면서 느낄 수 있는 형태의 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로 임진혁 자네가 알려 주었어.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골라 달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의미였군요.」

밥 앤더슨이 죽기 전에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인가.’

진혁은 대개 한국을 머무르며 중국과 미국을 오갔다. 하지만 다음 미국 출장은 3개월 후로 예정되어 있다. 그때 밥 앤더슨이 살아있을지 어떨지는 오로지 운명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진혁은 백중 구십은 이 자가 죽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윌리엄 쉐프도 조금 더 너그러웠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타인에게 의지를 강제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행동이라면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

곧 흙으로 돌아갈 자에게 어느 정도 관용을 보여도 좋지 않을까.

진혁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먹고 싶은 게 있습니까?」

「있다면 만들어 주나?」

「예.」

「웬일로 임진혁 쉐프가 너그러워졌는데! 뭘 얘기해도 그때그때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들지 않았나.」

밥 앤더슨이 쇳소리처럼 거칠게 성대를 긁으며 웃었다.

「내 그림도 마찬가지야. 누군가 예쁘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해도, 나는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밖에 없다네. 보이는 대로 그리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쁘지 않은 걸 어떻게 아름답게 그리나? 자네도 나랑 똑같아.」

「…똑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래서 메뉴를 고르지 않고 그저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었다. 진혁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먹고 싶은지 몰라서 아무거나 해달라고 한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하! 그거야말로 착각이군. 비단 나만이 아니고 말이지, 예술가란 족속들은 아주 까다로운 생물들이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뚜렷하단 말일세.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척하지 못해. 그냥 자네를 믿는 것뿐일세.」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노인의 두 눈동자를 보고서 진혁이 말했다.

「그래서 드시고 싶은 게 뭡니까.」

「내가 진짜 먹고 싶은 건 자네가 만들 수 없는 거야.」

저절로 승부욕을 일으키는 말에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시면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뜸을 들이며 망설이던 밥 앤더슨이 어렵게 말했다.

「…어머니가 끓여주신 닭고기 수프일세.」

「닭고기 수프라.」

「알아! 나도 자네가 페이스트리 쉐프인 걸 안다네. 수프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심지어 젊고 남자야. 그러니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그 닭고기 수프의 맛을 살릴 수 있을 리가 없지.」

「<다정한 마음>의 치킨 수프를 드셔보신 적이 있습니까?」

임진혁은 알렉스의 회사에서 판매 중인 유동식 브랜드 이름을 댔다.

「당연히 먹어 봤지. 2, 3년 전부터 맛있는 유동식이라고 환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잖아. 뉴욕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라면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걸.」

「치킨 맛도 먹어보셨습니까? 어머니의 치킨 수프 맛은 어땠습니까?」

「시판하는 다른 치킨 수프와는 확실히 달랐지. 맛이 있기는 했어. 그렇다고 해도 달라, 아주 다르다고. 어머니의 맛과는 다르지.」

진혁이 물었다.

「어머니의 치킨 수프 레시피를 갖고 계십니까?」

「오래된 요리책 귀퉁이에 적혀 있어.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도 그 맛이 나지는 않았네.」

밥 앤더슨이 한숨을 쉬었다.

「페이스트리 쉐프를 붙잡고 내가 뭐 하는 짓이람. 이건 누가 날 붙잡고 조각을 해 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지 않나? 자네의 전문 분야가 아니잖아.」

임진혁이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사납게 웃었다.

「<다정한 마음>의 모든 수프는 제가 고안해낸 겁니다. 재료 선정부터 레시피 기획, 그리고 최종 상품까지 전부 다요.」

「뭐?」

「그러니 제가 수프의 전문가가 아니라고는 하지 못하실 겁니다.」

진혁이 단언했다.

「레시피를 보내 주시면, 재료를 찾아보겠습니다. 당시에 수프를 먹었을 때의 온도, 질감, 냄새, 그 모든 것들을 떠올려서 함께 보내 주십시오.」

「그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보여줄 수 있네.」

밥 앤더슨이 휠체어 뒤쪽에 손을 뻗어 낡은 책을 꺼냈다. A4 용지의 절반 정도 크기인 책은 오래되고 낡아 있어 너덜너덜해 보였다. 그는 여러 차례 다시 붙인 것으로 보이는 고무풀 제본을 조심스럽게 펼쳐 한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여기 봐.」

말린 네 잎 클로버가 노랗게 변색되어 끼워져 있는 아래, 누군가가 흘려 쓴 글씨가 보였다. 한때 젖었다가 마른 흔적 위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였다.

「말린 로즈마리, 우유와 마늘, 치즈 그리고 닭 뼈….」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레시피였다. 진혁이 물었다.

「어떤 치즈를 넣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당시에는 치즈를 팔지 않았어. 집에서 생 치즈를 만들어서 그걸 넣었지.」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는 기억나십니까?」

「그건 말일세.」

앤더슨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경청하던 임진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 레시피가 있으시면 직접 만들면 될 것 같은데요.」

그는 너무나 쉬운 도전 과제에 실망한 챔피언처럼 짧게 평했다. 앤더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말이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비밀 재료가 하나 더 있어.」

「그렇습니까?」

「독특하게 톡 쏘는 듯한 새콤한 맛이 있었어. 그런데 그 재료는 우리에게 알려 주지를 않았어.」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주셔야 했습니다.」

다시 흥미를 갖게 된 진혁이 재료 목록을 메모했다.

「오늘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          ◈          ◈

본래대로라면 저녁에 중국으로 바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미국에 하루를 더 머무르신다고요?」

사무실에서 서류를 넘기던 황미미가 물었다. 그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알렉스가 제안을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요. 의외네요.」

「조금 전에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해링턴 클리닉에서 우연히 밥 앤더슨을 만났거든요.」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어떠셨어요?」

진혁은 대답을 주저했다. 타인의 수명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머뭇거리는 기색을 눈치챈 황미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중국 여행을 내일로 미룬 거예요? 원래는 일정이 바뀌는 걸 싫어하시잖아요.」

진혁은 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머니의 치킨 수프를 먹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서 그 수프를 만들어주시기로 하셨군요.」

「레시피에 없는 비밀 재료가 들어갔다고 하는데, 몇 가지 짐작이 가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행을 미뤄서 미안합니다.」

신혼여행도 제대로 가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번에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황태명이 안배해 두었지만, 진혁이 찾아가지는 못했던 장소.

「항주에 가서 오리 구이를 먹기로 하고 예약도 미리 하셨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오너가 저니까 상관없어요. 예약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걸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그보다 그 치킨 수프가 궁금해지네요. 만들어 보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에 몇 가지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내일 오전에 밥 앤더슨을 만날 거라서요.」

「내일 오전이라면, 어디 보자.」

미미가 스마트폰의 캘린더를 확인하고서 말했다.

「저도 일정을 미루면서 내일 오전이 비어 있어요. 그러면 저도 같이 갈까요?」

그녀가 무언가를 먼저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          ◈          ◈

그는 밤 동안 다양한 수프를 실험해 보았다.

그리고 최종 후보군 세 가지로 좁혔다.

「당시 인디애나주 심프턴에서 구하기 쉬웠던 식물들로 후보군을 줄였습니다.」

여기에는 한 비서의 도움이 컸다. 그는 한밤중에 그 동네에 사람을 파견해, 수십 년 동안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을 탐문하도록 했다. 앤더슨과 비슷한 또래였던 노인 두엇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둘이서 살던 앤더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네 식료품점에서 팔던 이국적인 통조림과 뒷마당에서 재배하던 모종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토마토와 할라피뇨, 그리고 칠리. 셋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밥 앤더슨이 놀라서 말했다.

「잠깐, 토마토라고? 그리고 칠리나 할라피뇨라니. 그럴 리가 없어.」

「극히 미미한 양을 넣는다면 새콤하면서도 톡 쏘는 맛을 낼 수 있지요.」

진혁은 미소지으며 세 개의 그릇을 내놓았다. 상앗빛을 띤 맑은 국물이 찰랑거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셋 다 똑같은 수프처럼 보였다.

밥 앤더슨이 코를 킁킁거렸다.

「어머니의 수프에는 닭고기가 전혀 들어 있지 않았어. 그 점은 비슷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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