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8화
그는 이렇게 이야기가 커지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다. 단순히 새로운 레시피를 부탁할 생각으로 자리에 나왔던 CEO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나 혼자 결정할 수가 없어. 이사회에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임진혁이 빙긋 웃었다. 중대한 결정이 있을 때 ‘내가 최종결정권자가 아니다.’라고 미루는 방식은 그 역시 종종 사용해 왔다.
그는 알렉스가 이사회에서 발언권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CEO가 이 계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다른 이들은 별다른 불만 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아야 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다.
진혁은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저희와 함께 사업하고 싶어 하는 다른 회사도 있습니다. C사와 P사가 있지요.」
C사는 미국의 남부 병원 전체를 포괄하며 유동식을 판매하고 있는 오래된 회사다. P사는 서부 지역에서 전통적인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라이벌 회사로, 둘 다 알렉스의 회사를 견제하는 중이다.
이것 역시 미미가 조사해와 알려준 카드였다.
라이벌 회사의 이름을 들은 알렉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임진혁 쉐프님이 직접 레시피를 개발해서 인센티브를 받고 있으시니만큼 저희와 함께-.」
「물론입니다. 저로서도 이왕이면 알렉스 CEO님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탔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제안은 오늘 저녁 6시까지 유효하니 이사회와 충분히 상의해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진혁은 조건을 내걸고 그대로 물러났다.
이들이 거절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황미미는 점차 분야를 넓혀 사업을 확장했다. 중국 전역의 제과제빵 프랜차이즈 지점이 성공함과 동시에, 다른 분야에도 손을 뻗쳐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통이 크고 사업가의 기질이 강했다. 투자할 때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또한, 진혁이 단순히 연구원의 입장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예 우리가 그 회사를 사버리면 어때요?」
그녀는 알렉스의 회사를 인수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알렉스가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자기 집에 땔 땔감이어야 열심히 장작을 패러 다니죠. 그는 자기 회사에 애착을 갖고서 열심히 일하는 타입이니까, 굳이 일을 늘릴 필요는 없습니다.」
「진혁 씨 말이 맞아요.」
그녀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제품 개발은 진혁 씨가 전부 다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여요.」
「그만큼 인센티브를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그는 그저 몇 가지 레시피를 건네주었을 뿐이고 충분한 양의 돈을 받았다. 당시에 그 돈이 없었더라면 가게를 여는 데에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은혜를 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진혁이 잠시 미미와의 대화를 돌이켜보는 사이에 알렉스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적극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6시까지 꼭 긍정적인 대답을 들려드리지요.」
「알겠습니다. 저도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평소대로라면 알렉스가 이후에 식사를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제안 때문에 경황이 없는지 그는 급하게 돌아갔다.
진혁은 운전기사를 대동해 해링턴 클리닉으로 향했다.
그리고 윌리엄 쉐프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병원 카페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오---이! 이게 누구야!」
처음 만났던 때와 똑같이, 클리닉 카페 앞에서 주문을 하고 있던 밥 앤더슨이었다.
그는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미스터 앤더슨.」
「밥이라고 부르라고 몇백 번을 말해야 되나?」
「밥, 얼굴이 핼쑥하군요. 몸이 안 좋은가 봅니다?」
「당연히 안 좋지. 먹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한테 뭔가 맛있는 걸 만들어 주고 싶지 않나?」
뻔뻔한 요구에 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정식으로 주문하려고 해도 아예 주문서도 안 받고 있잖나.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나?」
「최근에는 밥이 소개해 준 사람하고 바쁘게 프로젝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 무하마드 왕자님? 그 사람이랑 뭘 하고 있는데?」
밥 앤더슨이 눈빛을 번득였다.
「또 뭔가 맛있는 놀이를 하고 있나 보군? 나도 끼워주지.」
「당신은 치료를 받기 위해서 여기에 머물러야 하잖습니까?」
「이러다가 죽겠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특실에 갇혀서 죽느니, 신비가 살아있는 아시아로 모험을 떠나겠어. 이대로는 도저히 못 살겠네. 이제 이 무맛 베이글에도 질렸고, 뭔가 단 하나라도 좋으니 맛있는 걸 먹고 싶어.」
밥 앤더슨은 분명히 이전에는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성격도 나빴고, 툭하면 제멋대로 의견을 줄줄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뼈에 가죽만 남아있는 몰골이었다. 전신의 기력이 줄어 들어가는 와중에 오직 눈빛만이 살아있다.
두어 달 전에 만났을 때보다 확연히 기력이 쇠해 있어, 끝이 머지않은 것이 눈에 보였다.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거야.’
현대 의학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를 받아 어떻게 어떻게 하루하루 살아갈 날을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 나날은 천상 병원에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을 포함했다.
자유로운 나그네로 떠돌며 살며 마음껏 그림을 그리던 밥 앤더슨은 그런 나날을 못 견뎌 했다.
「미국에 왔는데 나한테 연락도 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우리, 친구 아닌가?」
「우리가 친구였습니까?」
진혁이 진심으로 되물었다. 밥 앤더슨은 그 말을 농담으로 치부했다.
「당연하지! 우리가 친구가 아니면 그럼 뭔가? 연인도 아니고, 혈연도 아니지. 하지만 서로 가까이 알고 지내면서 예술적인 영감을 주고받지 않나.」
「영감을….」
진혁이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눈앞의 화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생각하는 척 시간 끌지 말아! 자네, 내 덕분에 펜로즈 삼각형 케이크를 만들지 않았나!」
「아, 그런 일도 있었죠.」
「그런 일이라니!」
밥 앤더슨이 형형하니 이글거리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자네의 인생 전체를 떨리게 할 만한 엄청난 경험이었지. 보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만질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그 세 가지를 하나로 합쳐서 눈앞에 형상화시키기 위해서 철학적인 고민을 끝없이 하지 않았나?」
‘안 했는데….’
하지만 예술가의 착각 어린 장광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오랜 사색을 거쳐 마침내 내놓은 예술작품을 다른 이가 먹어야만 그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슬프고도 위대한 일인지! 나도 그걸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롭고도 슬펐지만 만든 자네는 어떠했겠는가. 내 자네의 심정을 속 깊이 이해했기에 비로소 포크를 뻗어서 그 케이크를 맛볼 수 있었던 거라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 어디 손을 댈 수 있었겠나?」
진혁이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여기에 일하러 온 거라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앗, 잠깐만! 기다려! 이봐!」
그는 그 자리를 떠나 윌리엄 쉐프에게 향했다. 키친에 딸린 작은 사무실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해링턴 클리닉 카페의 매출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아주 좋습니다, 더 좋을 수가 없지요.」
「흐음.」
「유일한 문제라면 가게가 너무 좁고, 직원 수도 모자라 충분한 만큼의 빵을 만들 수 없다는 겁니다. 오후 5시 무렵이면 벌써 재고가 떨어지고 맙니다. 초과 근무에도 한계가 있고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사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이건 해결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결국, 손님을 줄이거나 아니면….」
「고정 메뉴인 일부 반죽에 한해 냉동 생지를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윌리엄이 미적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할 수도 있겠죠. 반죽하는 시간만 줄어도 확실히….」
「오리지널 베이글과 무단백 베이글, 그리고 저 나트륨 베이글. 이 세 가지 모델에 대해서만 시험적으로 냉동 생지를 써 보겠습니까?」
「음, 그건 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초기 100개분의 냉동 생지를 샘플로 드리고 갈 테니, 사용해 보고 후기를 알려주십시오.」
윌리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그야 그렇게 하면 편하겠지요. 하지만 냉동 생지가 과연 제가 직접 반죽한 것만큼 맛이 있을까요? 그 생지는 공장에서 만든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만들면서 제가 내내 감독했고, 구워냈을 때 품질 저하가 없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소망시에 있는 빵 공장에서는 생지를 포함해 인스턴트 빵을 계속해서 생산해 전국적으로 유통해 왔다.
진혁은 그 ‘생지’ 단계의 빵을 일부 가져왔다.
만일 미국에서도 이 생지가 먹힌다면, 추가적으로 생산 시설을 늘릴 수도 있었다.
‘확실히 공장에 설치한 오행진도 효과가 있었으니, 이들도 만족할 거야.’
「진혁 쉐프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못내 미적지근한 태도로 윌리엄이 수긍했다.
「그럼 잘 사용해 보고 알려주십시오.」
「그런데 임진혁 쉐프님, 밥 앤더슨 씨하고는 친하십니까?」
방금 전에 ‘친구 선언’을 받은 진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마도요?」
「저분이 이곳에 자주 오신다는 사실이 알려지니까 미술 매거진의 기자 같은 사람들이 자꾸 찾아옵니다. 그러면 이분이 또 흥분해서 뭐라 대거리를 하고, 가게가 시끄러워지는 일이 많습니다. 사실 경비원을 고용해야 하나 싶을 정돕니다.」
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님에게 가게에 오지 말라고 하고 싶다는 이야기입니까?」
「오시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요. 사실은 알아서 피해주시고 제가 배달을 한다면 더 좋겠습니다만. 말이 통하는 분이 아니니까요.」
윌리엄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결국은 밥 앤더슨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밥 앤더슨의 소화기계는 지금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먹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곳의 빵이 유일하게 문제없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다.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윌리엄 쉐프, 밥 앤더슨이 정신 나간 고집불통 늙은이이긴 합니다.」
「아니, 임진혁 쉐프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하지만 여기는 클리닉 내의 베이커리 카페로, 환자분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건 좀 문제가 있군요.」
「예? 예에?」
「밥 앤더슨 씨와는 제가 직접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다음 브랜드 재계약 전에 과연 손님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해야 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진혁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았다.
밥 앤더슨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임진혁을 찾고 있었다. 진혁은 밥 앤더슨의 곁에 섰다.
「미스터 밥.」
「아니, 미스터 앤더슨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그게 뭐야.」
밥 앤더슨이 반갑게 말했다.
「자네가 날 두고 없어진 줄만 알았지 않나! 하긴, 날 두고 갔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
밥 앤더슨을 두고 그냥 가버릴 생각이었던 임진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 화가를 머리끝부터 훑어보았다.
‘한 달? 보름?’
조금만 있으면 죽어 흙으로 돌아갈 자다. 당연한 섭리의 흐름이며 자연의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