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6화
그날 밤.
유키코는 진혁에게 따로 개인 면담을 요청했다. 두 사람은 기나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저택을 떠났다.
마침 진혁의 집을 방문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진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키코 언니가 드디어 말한 거야?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너도 알고 있었어?”
“유키코 언니네 아버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어머니가 병간호를 도맡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어린애랑 갓난쟁이가 있다 보니 병문안 가기도 여의치 않은 것 같더라. 그래서, 언니는 그만두고 일본으로 간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 도쿄 지사를 내려고 했거든. 유키코 씨한테 맡아줄 수 있냐고 물어봤어.”
임진희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뭐? 어떻게 해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데?”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황미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상징적으로 일본 지점을 하나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는 오가고 있었어요. 잘 아시는 분께서 맡아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요.”
“와… 그만두러 온 사람한테 지금 새로운 지점 설립을 떠맡기는 거야? 언니가 진짜 황당했겠다. 그래서 뭐래?”
“생각해 보고 알려준대.”
“언니가? 흐, 당연히 하겠지. 언니는 언니가 가장이잖아. 아버지 병원비라도 보태드리려면 잠시라도 일을 쉴 수가 없을 텐데 말이야.”
말하던 임진희가 놀라서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지금 학교 법인이니 뭐니 하면서 일을 더 늘리지는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굳이 이 시점에 도쿄까지 범위를 넓혀서 일을 늘릴 이유가 없지. 유키코 언니를 걱정해서 일본 지사를 설립하는 거야?”
진혁이 흠흠, 헛기침했다.
“유능한 인재를 잃으면 곤란해. 소망 베이커리와 ‘해와 달’의 빵은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언니가 빵 개발은 진짜 잘 하긴 하지. 유키코 언니가 프리로 뛰면 샘플 보내면서 빵 개발을 총괄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런데 아예 지사 설립까지 한다니, 세상에. 스케일이 큰 건지 작은 건지 모르겠네.”
황미미가 말했다.
“일본에는 유서 깊은 노포 빵집들이 많아요. 그래서 분석팀에서는 일본 쪽에서는 프랜차이즈 빵집을 오픈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먼저 키무라 유통을 통해 일본 전역의 편의점과 슈퍼마켓에 공장제 프리미엄 웰빙 빵을 판매하게 될 거예요.”
이미 두 사람이 전략회의실과 기획실에서 받아온 데이터를 보면서 의논했던 사항이다. 진희가 감탄하며 말했다.
“중국하고는 완전히 전략이 다르네요.”
“맞아. 2년 전 중국에는 고급 카페와 빵집에 대한 수요가 있었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거든. 유키코 씨라면 충분히 현재 ‘해와 달’에서 잘 팔리는 빵들이 일본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개량할 수 있을 거야.”
“허허허…. 그런데 언니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야 언니한테 직접 들었지만.”
황미미는 ‘해와 달’의 핵심 인물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경호원을 붙였다. 그녀는 임진혁과 눈빛을 교환했다.
“어쩌다 보니.”
“흐으으응.”
임진희가 말했다.
“스파이라도 붙여놓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근황이나 경조사는 다 챙기고 있단 말이야.”
“한 비서님이 알려주니까 말이지.”
“비서가 있으니까 좋겠다.”
“네 비서님은 그런 일 안 해?”
진혁이 물었다.
“회사일 관련해서만 하지, 개인 일은 애초에 안 맡겨.”
“흐음.”
임진혁은 흘긋 황미미를 건너보았다. 그녀가 부드럽고 평화롭게 부처와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비서님은 개인 일정도 관리하는 비서님일 텐데요. 교육이 부족했나 봐요. 미안합니다. 제가 한마디 해 둘게요.”
진희가 놀라서 사양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친구들 생일 같은 개인 일정까지 챙겨주려고 하길래 부담스러워서 안 해도 된다고 했어요.”
“호호호, 그런가요.”
미미는 생글생글 웃으며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깊은 밤, 태극권 수련을 끝내고 진희는 집으로 돌아갔다. 진혁이 배웅하기 위해서 건물의 아래층까지 따라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진희는 건물 밖에 나가서야 입을 열었다.
“미미 회장님 말이야, 아까 진짜 무서웠어.”
“미미 씨가? 어디가?”
“…무섭다고 해야 할까, 카리스마 넘치더라. 장 쉐프님이 왜 존경하는지 알 것 같아. 배우라서 그런가, 아니면 경영자라서 그런가.”
진혁이 피식 웃었다.
“배려심 깊고 좋은 사람이야.”
“아니, 당연히 알지. 널 사람 만들어 놨잖아. 그런데 어떻게 좋은 사람이 아닐 수가 있겠어.”
◈ ◈ ◈
리처드 베이커는 홀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바깥에는 황혼이 비쳐 보였다. 크림치즈처럼 노란 해가 점차 빌딩 숲 속에 잠겨 가면서 주홍빛으로 물들어 간다. 이 광경은 과거 그가 보았던 누군가의 치즈 케이크와도 닮아 있었다.
오늘은 베이커스 샵의 2호점이 개장하는 날이다.
그가 각종 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가게를 맡아 주었던 케이시와 멜리사, 두 사람이 아예 독립해서 새로 지점을 내기로 했다. 오픈 때부터 함께 가게를 꾸려나갔던 두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 <베이커스 샵>은 어쩐지 조용하고 쓸쓸했다. 마지막 손님까지 내보내고 가게를 닫았다는 팻말을 내걸자 더욱더 그랬다.
‘막상 짐을 정리하고 내보낼 때는 어서 가라고 보냈는데 말이지.’
이제 <베이커스 샵>은 명실공히 1인 오너 쉐프의 샵으로 다시 거듭났다. 그는 이곳에서 매일같이 오롯이 불과 싸우며 반죽을 하고 빵을 구워내며 손님을 상대할 것이다. 그가 전부터 원해오던 길이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 멜리사와 양아들 케이시, 그리고 장남 브라이언이 반긴다.
하지만 가게에서는 그가 왕이자 시종이고 상인이다.
‘분명히 내가 원하던 길인데 이상하게 외롭네.’
있던 사람이 없어지면 빈자리가 크기 마련이다.
그는 아무도 오지 않을 창문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과일을 꿀에 절이기 시작했다. 대고모님에게 전수받은 레시피, 블랙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다.
「먼저 무화과, 그리고 블랙베리와 블루베리, 그리고….」
거짓말처럼 놀랍게도 풍경이 땡땡 울렸다.
「리처드! 리처드 있나?」
리처드 베이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최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크게 성공해, 국제적인 베이커리 프랜차이즈의 CEO로 유명해진 임진혁이다.
「오! 임진혁 쉐프! 우리 아기 대부와 마리오도 왔군!」
미식축구 선수처럼 거대한 체격의 남자는 진혁과 친구들을 반겼다.
「자, 자. 들어오라구.」
닫힘 팻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내고, 그는 문을 열었다.
임진혁과 브라이언, 마리오가 차례대로 들어왔다.
「오랜만일세.」
「반가워!」
「내 대자 브라이언은 잘 있나?」
임진혁은 양손으로 커다란 화분을 들고 있었다.
「아주 예쁜 선인장이군. 임진혁 쉐프가 선인장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베이커가 진혁이 들고 온 화분을 칭찬했다.
황토색 토분에 담긴 선인장은 진혁이 두 팔로 들어야 할 만큼 키가 컸다. 1미터가 조금 더 덜 되는 높이다. 조금 커다랄 뿐, 그저 평범한 선인장이었다. 녹색과 연두색이 어우러진 바탕에 가시가 삐죽하니 듬성듬성 돋아나 볼품이 없었다. 그나마 봐줄 만한 부분이 있다면 머리 위에 노란 꽃이 조그맣게 활짝 피어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있는 집에 선인장 화분을 가져오다니, 진혁 쉐프가 애가 없어서 그런가 보군.’
리처드 베이커는 한쪽 구석에 놓인 아기 브라이언 베이커의 사진을 힐끔 보았다.
아기 브라이언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는 아빠를 똑 닮았다. 반면에 눈썹과 코, 그리고 눈매는 엄마 멜리사의 판박이였다.
리처드 베이커의 시선을 따라간 세 페이스트리 쉐프 모두 그 아기의 사진을 보았다. 브라이언 신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정말로 똑 닮았네.」
「빨간 머리가 복슬복슬한 게 리처드 베이커 쉐프의 머리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귀엽네.」
마리오가 말하는 사이에 브라이언 신은 리처드를 힐긋힐긋 보면서 입을 벙긋거렸다. 리처드 베이커가 물었다.
「브라이언. 화장실이라면 저쪽이야.」
「아니야.」
브라이언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후후.」
임진혁은 선인장 화분을 바닥이 아니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가 화분을 ‘신성한 먹을 것들이 자리해야 할 식탁 위에’ 내려놓을 리가 없다. 리처드는 문득 깨달은 점이 있어 눈알을 굴렸다.
「푸훗.」
함께 따라온 마리오는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하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리처드 베이커가 탄성을 터트렸다.
「이거, 케이크로구만?」
「임진혁 쉐프가 화분을 가져올 리가 없지.」
「허허, 고마워.」
「2호점 오픈을 축하해.」
「…알고 있었나?」
「인스타그램이니 트위터니 뭐니, 계속해서 광고하는데 모를 수가 없지」
「하하하. 그럼 새 지점에 가서 축하를 해 줘야지, 왜 다 늙은 나 혼자 있는 여기 와서 그러나」
리처드 베이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진혁이 대답했다.
「나간 사람은 몰라, 남은 사람만 알지. 내가 독립해서 혼자 나갔을 때, 아버지가 퍽 외로우셨던 모양이더라고. 나중에 어머니가 알려주시지 않았으면 나도 몰랐을 거야.」
백진영은 반쯤 독립했다. 이천의 도자기 공방 카페에 절반, 그리고 절반은 ‘해와 달’의 망원 본점에 출근하는 중이다.
임진혁 역시 다른 일이 많아 매일 망원 본점에 출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출근하는 날, 백진영이 없을 때마다 그 빈 자리를 느꼈다. 아침마다 한 잔씩 타주던 극상의 아인슈페너가 없는 것만으로도 허전했다.
하물며 매일같이 같은 가게로 세 사람이 출근하다가, 두 사람이 사라지면 어떨 것인가.
한 비서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진혁은 겸사겸사 다른 이들을 데리고 리처드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외로울까 봐 찾아왔다는 건가?」
「새로운 선인장 케이크를 보고서 놀랄만한 사람이 필요해서 찾아온 거지.」
마리오가 낄낄거리며 놀렸다. 브라이언이 덧붙였다.
「이 선인장 케이크는 보기만 신기한 게 아니야. 리처드, 당신이 맛보면 더 놀랄걸?」
「그거 궁금해지는데.」
임진혁이 말했다.
「접시를 가져다주면 내가 잘라서 나눠 주지.」
리처드 베이커는 코를 킁킁거리며 선인장 가까이에 갖다 댔다.
「이거 겉으로 봐서는 전혀 모르겠는데. 퐁당을 다루는 기술이 더 좋아졌어. 아무리 봐도 진짜 선인장 같아.」
「브레드 나이프는?」
「여기.」
임진혁은 칼을 들어 케이크를 잘랐다. 비단결처럼 촉촉하고 검은 케이크의 단면을 보고서 리처드 베이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유롭고 달콤한 여신상이잖아!」
「바로 알아보네! 하지만 꿀을 넣은 아몬드를 좀 더 많이 넣어서 맛은 달라.」
샘플을 시식했던 브라이언이 거들었다.
「블랙베리와 포도, 무화과와 자두, 버찌를 주로 넣었지요?」
과거 대고모가 전수해주었다는 블랙 케이크.
푸딩처럼 촉촉한 후르츠 케이크는 리처드 베이커가 과거 월드 페이스트리 챔피언십에서 만들었던 케이크를 개량한 것이었다. 지금은 동네 빵집에서 흔하게 팔리는 빵을 만들어 팔고 있지만, 그 역시 한때는 세계 대회에 참석하던 정상급 파티쉐다.
리처드 베이커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돌렸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