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44화 (542/656)

제 544화

「낡은 신발이 보기 좋다는 소리가 무슨 소립니까?」

「아니, 아니. 깨끗하게 윤이 나도록 잘 닦여 있잖아요. 오래 신은 티가 나는데 관리가 잘 되어 있달까. 새 신발보다 더 정이 들어있는 느낌이라 아주 좋은데요.」

영상 감독이 진혁이 신고 있는 조리화를 칭찬하자 의상 담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 우리 회사에서 매년 개량해서 내놓는 신상품인데 말입니다. 올해에는 태그 디자인이 변경되고 내부에 메모리폼 쿠션 두께가 바뀌었습니다. 태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촬영으로 달라진 점을 알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게 더 좋다면 이걸로 가셔도 뭐 상관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죠? 조리복은 신상과 구 디자인이 칼라부터 다르기 때문에 눈에 확 뜨입니다. 신발은 상관없지요.」

담당자가 물었다.

「그래도 길이 들어있는, 신던 신발이 신기 편하시긴 하겠지요? 하지만 올해 신모델을 드렸는데 아직 신어보시지도 않으신 건지 궁금합니다.」

빙 돌려 하는 질문에 진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에는 계속 신던 신발을 신고 있습니다. 이번에 촬영할 때 새로 신으려고 따로 빼 두었지요.」

영상 감독이 말했다.

「사실 이번에 새로 나온 모델이 발이 편하기로 유명하거든요. 한 번 신어본 사람은 아예 벗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 신발에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으신가 싶었습니다. 새 신발을 보내드렸는데 이 신발을 계속 신으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사실 이건 아버지께서 특별히 골라서 사다 주신 모델이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저희 회사 제품을 골라서 사다 주셨다니 보는 눈이 있으신데요?」

「처음에 제과제빵사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아버지가 쓰던 신발을 물려주셨는데요, 그 조리화가 너무 불편했습니다. 안쪽에 징이 들어있잖아요.」

담당자가 맞장구쳤다.

「그렇죠. 식칼이나 날카로운 것들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개발할 때 제일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바로 그 파트입니다. 가벼우면서도 안전하게 말이죠.」

「그때부터 조리화 신기를 유독 불편해했습니다. 그런데 제 발 사이즈가 큰 편이라 국내 브랜드에서는 그 사이즈가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일부러 큰 신발을 중고로 구해주시고 두꺼운 양말을 챙겨 주셨습니다. 그때 사 오신 신발이 해리 & 호프만의 조리화였죠.」

아버지가 신고 있던 저렴한 국산 조리화에 비해 거의 두세 배 이상 비싼 가격이었다.

진혁은 발볼이 넓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골탈태를 거친 후에 발이 커지면서 사이즈가 바뀌었다.

손발이 더 커진 것이다.

아버지는 진혁이 군대에서 더 컸다고 생각하며 또 새 신발을 사주셨다. 명절에도 쉬지 않던 아버지가 일할 때는 발이 편해야 한다며 아예 반나절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진혁을 신발 가게로 데려갔다.

서울의 남대문에 있는, 조리화를 비롯해 각종 조리용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전문상점이었다. 점심을 먹을 때에는 5천 원짜리 짜장면 한 그릇도 아깝다며 도시락을 싸 오시는 분이 아들 발에 맞는 신발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데는 돈을 써야 한다며 몰래몰래 아껴둔 쌈짓돈을 꺼내 꼬깃꼬깃한 지폐를 한 장 한 장 꺼냈다. 신발 한 켤레에 20만 원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비싸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두꺼운 양말을 어디선가 구해와서 자꾸 신겼다.

무인의 몸에는 더 이상 그러한 배려가 필요 없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챙겨 주시는 것이 고마웠다.

그는 옛 신발들을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신던 조리화 그리고 자신이 신던 신발, 그리고 새로 선물 받은 신발까지.

해리 & 호프만에서 나온 영상 감독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아끼시는 마음이 감동적입니다.」

「잘 만든 조리화는 평생 신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셨지요.」

아버지 역시 평생 동안 신어오던 신발을 계속 고집하셨다. 이름 모를 국산 회사에서 생산한 조리화였다. 그 회사는 이미 망한 지 오래지만, 구둣가게에서 밑창을 갈아가며 십 년을 넘게 신었다.

‘어머니 구두 사드릴 때 아버지 조리화도 사드리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당시에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정작 아버지도 자신의 조리화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가족 모두가 별생각이 없었다. 진희가 처음 주방에 들어왔을 때도 아버지가 돈을 내서 좋은 조리화를 사주었다. 하지만 둘 다 아버지의 조리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처음으로 좋은 조리화를 신은 것은 진혁이 해리 & 호프만에서 협찬을 받아 직원들의 신발 사이즈를 신청받을 때였다. 할인 가격으로 제공하니 구매하고 싶은 사람은 새 신발을 신청하라고 공고를 붙였더니 아버지가 제일 먼저 신청하셨다.

물론 그걸 보자마자 놀란 진혁이 바로 새로 한 켤레 사서 아버지에게 따로 보내드렸다.

‘미리 챙겨드려야 했는데 말이야.’

영상 감독이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미안합니다, 임진혁 쉐프님. 우리가 상의를 좀 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는 음향 감독과 카메라맨, 그리고 담당자를 끌고서 가게에서 나갔다. 의논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촬영 컨셉을 다시 다 바꾸겠다는 게 무슨 얘깁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닌가. 대를 이어 물려가는 명품, 해리 & 호프만. 굳이 새것을 고집해야 할 필요가 없다니까.」

「…갑자기 이렇게 대본을 변경하시면….」

「….」

그는 진혁이 신고 있는 낡은 신발을 그대로 촬영하고 싶어 했다.

「새 옷이나 새 신발이 중요한 게 아니지, 해리 & 호프만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가져다주는 안정감, 그리고 진혁 쉐프님이 자연스럽고 태평하게 신고 있는 저 착화감, 저걸 놓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영상 감독이 촬영 컨셉을 바꾸자고 하고 다른 이들이 모두 동의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진혁 역시 이견 없이 승낙했다.

「액션, 컷!」

순조롭게 촬영이 끝날 무렵, 낯익은 사람이 양손에 캔을 가득 안고 들어섰다.

「자, 자. 마시면서 하세요.」

외부에 신경을 끄고 있었던 임진혁은 지인의 출현에 조금 놀랐다.

“진영이 형, 집에 안 갔어?”

“네가 새벽까지 남아서 촬영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돌아가냐.”

“평소 인스턴트커피는 악마의 음식이라며 마시지도 않던 사람이 캔커피를 가득 들고 오냐.”

직접 내린 핸드드립 커피만 마시는 바리스타가 밤늦게까지 촬영하는 이들을 생각해 가져온 음료수다. 촬영팀의 인원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백진영이 음료를 넉넉히 가져온 덕분에 한 사람당 두 캔씩 가져가도 남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바리스타님!」

「감사합니다!」

음료를 챙겨 든 촬영팀원들이 저마다 감사 인사를 했다. 백진영이 푸근하게 웃었다.

「우리 진혁이 멋지게 잘 찍어 주셨습니까?」

「당연하지요, 아주 잘 나왔습니다.」

영상 감독이 씩 웃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마무리하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팀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백진영이 말했다.

“너 내일은 몇 시 출근이야?”

“5시.”

“…오후 5시?”

“아침 5시.”

“지금 세 시 넘었잖아. 잠은 도대체 언제 자려고?”

“형이야말로 언제 출근하는데?”

“나는 내일 쉬는 날이야. 교대로 근무하잖아.”

백진영이 머쓱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너 본 김에 맥주라도 마시려고 했단 말이지. 할 이야기도 있고 말이야. 이거, 5시에 출근할 사람을 데리고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임진혁은 백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퇴근하고 나서 피곤할 텐데 집에 돌아가지 않고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음료를 사 가지고 왔다. 진혁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서였다.

‘나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으면 그냥 훈련을 하면 될 텐데…,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훈련을 싫어할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있다면, 자신이라면 당장이라도 훈련시켜 달라고 덤벼들 텐데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

더군다나 무료.

친구와도 사이가 좋아질 수 있다.

체력까지 좋아질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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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임진희가 맨날 읊어주는 쇼핑몰 광고 문구 같은데….’

임진혁은 의문을 숨기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기다릴 것 없이 5시부터 미각 훈련을 같이 받으면 되는데.”

“…진혁아, 넌 아주 좋은 친구고 제과제빵사로서도 탑클래스인 데다가 사업가로서도 믿음직하지만 말이야. 너랑 같이 훈련을 하는 건 싫어. 지금도 싫고 나중에도 싫고 평생 같이할 일 없을 거야.”

백진영은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 강력한 거부에 진혁이 눈을 깜빡거렸다.

“알았어.”

“다섯 시면 지금 가서 한 시간이라도 눈 붙여야지. 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그럴 필요는 없는데.”

진혁이 거절하려 하였으나 백진영이 고집을 부렸다.

“그냥 좋다고 해. 그래야 가면서 얘기라도 한마디 더 하지.”

“알았어, 알았어.”

가는 길 내내 진영은 입을 다물지 않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너 운전 기사님 있는 건 나도 알지. 그래도 이 시간에 불러서 나오라고 하면 그 사람이 좋겠냐?”

“야간 근무자는 따로 있어.”

“…아니, 잠깐. 야간 운전기사를 따로 둘 정도로 밤에 많이 돌아다녀? 너 젊다고 그렇게 몸 막 굴리면 나중에 늙어서 고생해. 나도 지금 20대 때랑 30대 때가 다르다고.”

“….”

임진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무림 고수의 경우, 나이가 들어 성취를 할수록 더 몸이 좋아진다. 진혁은 백진영의 몸을 살폈다.

‘과로를 계속 하고 있는 모양인데. 오행진의 효과가 있어 탁기가 더 쌓이지는 않았군.’

비슷한 또래의 다른 남자들보다는 확실히 건강하다. 진혁은 묵묵히 백진영을 바라보며 살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로 위에서 노란색 신호등이 점멸했다. 규칙을 따르는 성격의 백진영이 그대로 정차했다.

그는 힐긋 임진혁을 보더니 놀라 말했다.

“아니다, 내가 눈치가 없었네. 야, 눈이라도 붙여! 10분이라도 더 자. 말 안 시킬게.”

“알았어.”

진혁은 눈을 감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함께 훈련을 하고 싶어하지 않아도 나하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구나.’

일 때문에 바빠서 조금 소원해져도, 계속 친구인 것이다.

훈련소 역할을 하고 있는 아카데미 앞에 도착하자 백진영이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나하고 가영이 결혼하기로 했어.”

청첩장을 받아들며 진혁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주나 했어. 다음 달에 하기로 했다며.”

백진영이 당황해서 말했다.

“뭐? 미리 알고 있었어? 어떻게 알았어.”

“진희가 얘기해 주던데? 가영 씨한테 들었다고.”

“내가 직접 얘기하려고 했다고!”

백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임진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웨딩 케이크는 내가 직접 만들어 줄게.”

“오, 진짜야? 시간 돼?”

“당연하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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