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43화 (541/656)

제 543화

보통 베이커리에서 방송 촬영을 할 때는 아예 하루 영업을 쉰다. 그리고 자연광이 있는 시간에 촬영을 한다.

하지만 진혁은 가게 영업시간에는 촬영하지 않기를 원했다. 손님들이 불편을 겪지 않고 직원들 역시 바쁜 시간에 방해받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와 달’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영업한다. 영업 준비 시간도 있으니 촬영을 아예 새벽이나 늦은 밤에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무리한 조건이지만 <해리 & 호프만>의 담당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물론입니다. 밤, 아무도 없는 부엌이라는 배경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임진혁 쉐프님께서 평소에 작업하시는 장소이니만큼, 보다 자연스럽겠군요. 그리고 잠재 고객들에게 좀 더 생동감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단순히 음식을 먹으러 오시는 고객님들이야 모를 수 있지요. 하지만 저희 고객님들은 쉐프님들이십니다. 조리복과 조리모, 조리화를 최고급으로 갖추며 주방의 환경을 최고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시지요. 그런 분들께서 실제 세계 최정상급 쉐프님들이 실제 주방에서 어떻게 해리 & 호프만의 조리복과 조리모, 조리화를 활용하시는지 보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열성적이야?’

보조 담당자가 말했다.

「주방의 배치, 사용하는 집기, 그릇 등등… 보여주고 싶지 않으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희가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진혁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단 하나였다.

가게에 사방을 맞추어 곳곳이 새겨놓은 오행진이다. 보통 바닥면에 깔아놓았기 때문에 카메라를 어디에 설치하더라도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짧게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카를로비바리 사와 달리, 해리 & 호프만과의 사진 촬영은 문제 하나 없이 순조로웠다.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진혁은 모처럼 수요일에 ‘해와 달’ 망원 본점에 출근했다.

향긋한 원두 향기가 진혁을 반겼다.

“진영이 형.”

벌써 나와서 가게 불을 켜고 원두를 볶고 있던 백진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야, 이렇게 수요일에 널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주에 사흘은 보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전에는 일주일 내내 봤는데 말이야.”

“대회 준비할 때는 한 달 넘게 못 봤잖아.”

“그때는 대회가 끝나면 본다는 기약이라도 있었지. 요즘은 아랍 왕족분과 함께 사업하느라 바쁘다며.”

사업한다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함께 하는 프로젝트가 있다고 언급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네가 잘나갈 거라는 생각은 했어.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까지 크게 성공할 줄 몰랐고… 아니. 아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진영이 아끼는 오래된 핸드 그라인더의 손잡이는 붉은색 나무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려 원두를 갈았다. 전동 그라인더가 더 균일하게 분쇄되지만, 백진영은 항상 핸드밀을 고집했다. 그는 그라인더를 천천히 돌리면서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갈면 좋을지 결정하는 순간순간을 즐겼다.

“내가 가게에 못 박혀 있는 동안 너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하잖아. 나만 뒤처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진혁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형이 언제부터 틀어박혀 있었다는 거야? 나를 만나기 전에도 국제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했잖아. 그리고 아시안 바리스타 대회에 나가서 트리플 우승컵을 타기도 했고. 지금도 홍콩에서 한다는 대회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뭐가 뒤처졌다는 거야.”

백진영이 피식피식 웃었다. 커피 향이 은은히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네가 엄청나게 잘 나가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오븐에 빵을 넣고 나서 진혁은 고개를 돌려 백진영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얘기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지.”

평소에 당당하던 진영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이 사람도 참 많이 달라졌지.’

예전에 보았던 체구가 작고 기죽어 있으며 시무룩한 표정의 바리스타는 이제 없다. 등을 바르게 펴고 검은 양복을 입고서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커피를 내리는 남자가 있을 뿐이다.

지금 풀이 죽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도 과거에 비하면 한결 낫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리를 심하게 절었는데 말이야.’

임진혁은 한 번에 그의 다리를 고쳐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백진영이 일하는 커피 머신 앞에 특별한 진을 새겼다. 온몸의 기혈에 쌓인 탁기를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도록 하였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일하면서 백진영은 자연스럽게 회복되었다.

체력이 좋아지면서 더 많은 대회에 출전하고, 제자들을 키우는 데에 주력했다. 진혁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 역시 자신만의 분야를 넓히는 중이다. 진혁은 백진영이 자신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전혀 없었다.

“원래 새벽에 일찍 와서 수다 떨고 끝나고 같이 게임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네가 너무 바쁘잖아.”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30분.

이때에만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다른 직원들이 오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청소를 하고 빵을 굽는다.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전에는 훨씬 더 자주 있는 시간이 길었다. 전에는 퇴근하고 만나서 함께 게임을 하거나 야식을 먹기도 했다.

진혁이 결혼하고 백진영이 김가영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임진혁이 중국과 미국, 이탈리아를 오가며 사업을 하기 시작하자 본점에 머무는 시간은 더 줄었다.

이제는 가게에 있는 시간에만 잠깐 본다. 하지만 가게는 사교 활동을 하기 위한 장이 아니고, 서로 일을 하다 보면 인사만 하는 수준이다.

‘최근에 무하마드 왕자를 훈련시키면서 형을 만나는 시간이 많이 줄긴 했어.’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도 같이 하자.”

백진영이 뜻밖의 대답에 황당해하며 말했다.

“아랍 왕족하고 하는 사업을 같이 하자고? 그분이 커피가 필요하시대?”

“그런 사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미각을 예민하게 하는 훈련을 하고 있어.”

“…? 너야 전부터 미각 좋은 사람 찾는다고 했었지. 그런데 아랍 왕자님이 자기 미각을 좋게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는데?”

백진영이 의아해하며 관심을 보이자 진혁이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분도 음식을 맛있게 먹는 데 관심이 있거든. 그래서 내가 짠 훈련 프로그램대로 운동하고 자연식을 먹으면서 적응하는 중이야. 지금 두 달째인데 경과가 아주 좋아. 형도 미각을 훈련시키고 싶으면-”

진혁이 설명하는 이야기를 듣던 백진영이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점차 커지더니 뱃속 깊은 속에서부터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너무 웃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트림하듯이 꺼억꺼억 웃으며 숨도 쉬지 못하는 백진영의 등을 진혁이 살살 두들겨 주었다.

“왜 이렇게 웃어대?”

지나치게 웃으면 눈물이 나게 마련이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백진영이 말했다.

“야, 임진혁. 나는 니가 변한 줄 알았어.”

“변하다니?”

조리복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전용기 타고 다니고, 기사 데리고 외제 차 타고 다니고. 왕족이나 사업가들하고 어울리느라 나나 다른 애들하고는 말 나눌 시간도 없는 줄 알았지.”

“…? 아닌데.”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백진영은 임진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해보면 진혁은 태도가 달라진 적이 없었다. 세계적인 조리복의 모델이 되어도, 대회에서 우승을 해도, 이전과 똑같았다. 그저 조금 더 바빠졌을 뿐이다.

“그래, 아닌 것 같다.”

백진영이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미각 훈련에는 관심 없어? 형도 후각이 나쁘지는 않으니까, 하면 좋을 거야.”

진혁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백진영이라면 믿을 수 있다. 훈련 커리큘럼을 유출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며 성실하게 모든 훈련에 따라올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무하마드 왕자의 미각을 따라올 수는 없다. 그러나 진혁은 자신을 위해 백진영의 미각을 훈련시켜 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리스타로서 자신의 후각을 무기처럼 예리하게 갈고 닦는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백진영은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너 전에 도을이나 동진이하고도 좀 더 미각이 뛰어나야 한다고 달리기니 뭐니 시키면서 생풀 먹였잖아. 설마 그 왕자님한테 그걸 시키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정확히 뭘 하는 건데?”

“훈련에는 왕도가 없어.”

“아니 그러니까 그 왕자님, 아니 왕자님도 아니지. 난 40대가 넘은 남자분들에게 왕자님이라고 하는 건 좀 그렇더라. 왕족님께서도 그 달리기랑 풀씹기를 다 하고 있다고?”

“응.”

백진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그거 못한다.”

“그거 하면 나랑 주 3회는 더 만날 텐데.”

“너 만나려고 지금 이 나이에 그렇게 죽어라 달리기할 필요가 뭐가 있냐. 그냥 만나서 치킨 먹고 맥주 마시고 술 마시면 안 돼? 네가 무슨 바른 생활 전도사도 아니고. 난 저녁에 트레이너하고 PT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아, 그때 그 PT 계속 하고 있어?”

“가영이 만날 시간이 그때밖에 없잖아. 둘이 같은 트레이너한테 PT 받고 있거든.”

“보기 좋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쉬워하며 말했다.

“언제라도 미각 훈련에 참여하고 싶으면 얘기해. 형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다른 사람은 안 받지만, 형에게는 특별히 열어 둘게.”

“아니. 됐어. 절대로 사양할게.”

그날은 평소처럼 손님이 몰렸다. 임진혁이 오픈 키친에서 근무하는 날은 미리 홈페이지에 공지해 둔다. 진바라기를 포함한 단골손님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와, 낮과 오후 내내 정신없이 바빴다.

“진혁 쉐프님이 일하시면 좋긴 한데 너무 바빠요.”

강운종이 한마디 하자, 백진영이 킥킥거렸다.

“그래도 얘가 3인분의 일을 하잖아.”

“그리고 3배의 손님이 들어오죠.”

“매출은 오르니까 사장님만 미소짓고.”

“직원들은 괴롭고 말입니다.”

“자, 자. 정리하고 다들 퇴근해.”

“오늘은 뒷정리를 혼자서 하시려구요?”

“이제 촬영팀이 올 거니까, 혼자 하는 편이 편해.”

“그래도 남은 반죽 양이 너무 많은데요.”

“진혁이 저렇게 말할 때는 그냥 들어가는 게 나아. 자! 들어갑시다!”

백진영이 다른 직원들을 데리고 먼저 퇴근했다. 진혁은 다음날을 위한 반죽을 시작했다. 허공에서 밀가루와 달걀, 설탕이 날아다니며 춤을 추다가 저마다 만나서 덩어리지고 다시 뭉치어 그릇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이 순간이 좋았다.

‘좋아, 오늘도 잘 됐다.’

한 시간 후면 해리 & 호프만이 촬영팀들이 올 것이다. 그는 협찬받은 새 조리복으로 갈아입었다. 조리모 역시 새것으로 바꾸었으나 조리화는 이전 모델을 신었다.

「신발은 좀 낡은 편이 좋죠. 그래야 계속 신고 있었다는 티가 나니까요.」

「그렇지, 옷이 더러워진 건 비위생적이지만 적당히 낡은 신발은 보기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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