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41화 (539/656)

제 541화

“하지만 카를로비바리의 나이프가 제일 낫지 않나.”

“스위스의 군용 나이프 브랜드에서 이번에 새로 런칭한 신상 브랜드가 있습니다. 샘플을 보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비바리와 함께 일한 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이번에는 카를로비바리와 함께 일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비즈니스 미팅은 카를로비바리 한국 지부의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진혁이 요구한 사항에 대해서 모두 수긍했다. 하지만 재능있다던 촬영 감독은 진혁에게 원하는 것이 많았다.

「솔직히 이전 CF는 너무 짧지 않았습니까? 5초? 10초? TV 방영용이라고 하지만, 레모네이드에 입만 대고 끝난 격 아니냐구요. 이번에는 단편 영화 같은 컨셉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면서 5분 정도로 편집을 합시다. 하루 정도 비워주시면 알아서 하지요. 결과물 나온 거 보면 아주 껌뻑 넘어가실 검다.」

진혁은 사진 촬영에 협조적인 모델은 아니었다. 필수적인 몇 장의 사진을 찍는 것 말고는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다.

「계약 시간은 2시간입니다.」

「아니, 연기를 해보신 적도 없잖습니까. 5분짜리 영상 편집을 위해서 일주일씩 매달리기도 하는데 지금 하루는-.」

「2시간 내로 찍을 수 있다면 괜찮습니다. 제 시간은 비쌉니다.」

데이비드 영이 발을 동동 굴렀다.

「진짜 기가 막힌 예술 작품이 나올 거라니까요. 작년에 찍으신 영상을 봤습니다. 칼을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고, 눈빛 역시 매서우시던데! 하와이에서 바닷가를 배경으로 찍으면 아주 그냥-.」

진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동하는 시간도 포함시키면 며칠 이상 걸리겠군요. 비용에 따라서 협의할 의사가 있습니다.」

한 비서가 옆에서 보충해주었다.

「임진혁 쉐프님은 현재 한국의 지방을 비롯해 미국과 이탈리아, 중국 출장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해외 로케를 원하신다고 해도 향후 3개월 동안은 일정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장소가 아예 서울 내 스튜디오로 못 박혀 있었던 겁니까.」

「예. 계획을 이런 식으로 바꾸면 아예 촬영이 불가능합니다.」

진혁이 선을 그었다.

「평생 기억에 남으실 만한 단편 영화를 보시게 될 겁니다. 최소한 시나리오만이라도 봐주시지 않겠슴까? 진짜, 진짜 읽어주기만이라도 해주십쇼.」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다른 회사하고 같이 할까?’

데이비드 영은 눈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나리오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대책 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 비서가 카를로비바리 회사 측의 담당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담당자가 끼어들어 대안을 제시했다.

「자, 자. 영 감독, 키친 나이프를 사용하는 모습을 꼭 해안에서 찍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말씀하신 시나리오는 저희도 검토했습니다만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모습을 최대한 많이 찍고 싶으신 거지, 배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거로 보이는데요. 또 요즘은 CG와 특수 효과가 아주 잘 되어 있잖습니까.」

「아, 그거야 그렇죠.」

「임진혁 쉐프님은 평소에 주방에서 일할 때 저희 제품을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을 일부 촬영하여 영상에 포함시킨다면 어떻습니까?」

「호오.」

한 비서가 말했다.

「‘해와 달’ 에서는 임진혁 CEO님이 직접 개발하신 레시피만을 사용해 모든 빵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른 빵집들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갖고 싶어 하는 레시피지요. 데이비드 영 감독님이야 제과제빵 레시피에 관심이 없으실 테지만, 카메라맨이나 음향감독 등 여러 사람들이 주방에서 오가면 레시피 유출은 물론이고 청결과 위생 문제가 있습니다. 좁은 주방 속에서 동선이 꼬이면 일하는 데에도 방해가 되고요.」

‘내가 할 말을 다 하고 있군.’

진혁은 흐뭇한 시선으로 한 비서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아버지를 인터뷰하기 위해서 소망 베이커리에서 촬영팀을 불러서 촬영할 때에는 저런 점들이 문제 되지 않았다. 촬영팀 전체가 미미의 황 씨 그룹 소속이었고, 주방 내의 업무가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거제도에서 타르트 집 촬영을 했을 때는 달랐다.

지금은 ‘남춘 타르트’로 개명한 ‘시옷’ 타르트 가게에서 촬영을 할 때 주방에서 일하는 부부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 촬영이 우선이었고, 영상이 잘 나와야 했다. ‘그 부부가 일하는 방식은 형편없었고 근성도 없기는 했지.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우선순위 자체가 달랐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촬영팀은 재미있는 소스를 잔뜩 가져오고 기획 및 편집팀에서 내용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배려는 사라져 버린다.

초보 페이스트리 쉐프가 소변을 지리는 모습이 전국적으로 방영되어 망신을 당하건 말건 그것은 촬영팀이 알 바가 아니다.

하물며 세계 최고의 CF를 찍는다는 감독이라면 콧대 높게 행동하며 흙발로 이곳저곳을 짓밟고 다닐 가능성이 있다.

「그린 스크린과 블루 스크린이 설치된 실내 스튜디오에서 두 시간을 촬영하는 건 어떻습니까. 최근에는 거의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굳이 조절하기 힘든 외부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좋을 게 뭐가 있길래 말입니다.」

한 비서가 몰아붙이자 감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실은 연기력 문제입니다.」

「연기력 말입니까?」

「임진혁 쉐프님이 쉐프로서는 뛰어나지만 말입니다, 연기를 제대로 해 보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린 스크린 배경으로 연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도 어려움을 겪는 일이라고요.」

한 비서가 시나리오 대본을 휘리릭 넘겨 보았다. 그가 잘라 말했다.

「연기를 원한다면 애초부터 영화배우를 섭외했으면 될 일입니다. 지금 보여주신 이 대본을 보면 임진혁 쉐프님이 특별히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만한 부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어디서건 빵을 만드는 것에 충실할 뿐이지요. 그리고 CEO님은 어디서도 빵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도 배우도 아닌데….」

데이비드 영 감독이 무어라 말하려 했다. 담당자가 잘랐다.

「임진혁 쉐프님이야 작년 촬영 때에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만일 제대로 된 영상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감독의 책임 아닙니까?」

「….」

결국, 그린 스크린 배경의 스튜디오에서 2시간 동안 촬영하기로 했다. 진혁과 한 비서가 원하던 대로 추가적인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모델료 인상 대신 중국과 미국에 있는 계열사에 할인된 가격으로 카를로비바리 사의 키친 나이프를 공급받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

촬영은 예정대로 익일 바로 진행되었다.

임진혁의 CF 촬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황미미가 아쉬워했다.

「그린 스크린 배경으로 특수 촬영하는 거라면 저도 많이 해봤어요! 저도 가서 보고 싶은데 아쉽네요.」

그녀는 진혁보다 훨씬 바빴다. 학교 법인 관련 교수 섭외를 비롯해 관련 부처와의 회의 일정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진혁은 미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답을 떠올렸다.

「한 비서에게 부탁해서 촬영하는 모습을 찍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이라면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대로 첨단 기술을 활용해서 배려하는 답이다. 미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임진혁은 촬영 당일 오전에는 무하마드 왕자와 함께 달리기를 하고 오후에 스튜디오로 향했다.

무하마드는 요즘 진혁이 자주 방문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했다.

「그 마리오라는 청년은 나보다 입맛도 둔한데 뭘 자꾸 달라고 까탈스럽지 않나.」

「다음에는 다른 친구들도 데려오겠습니다.」

무하마드 왕자만큼은 아니지만 김도을과 김동진 역시 입맛이 예민한 편이다. 한때 지음 후보였다가 탈락한 젊은 청년들이다. 도을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활약하고 있고, ‘해와 달’의 새로운 메뉴를 홍보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김동진은 조혜정 함께 명동점에서 임진희를 보좌하며 새로운 메뉴 개발에 바빴다.

‘동진이 녀석은 오히려 대중적인 취향을 알아낸다고 법석이었지.’

진혁의 경우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가히 맛의 교향곡이라고 할만한 음식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명동점에서 실제로 빵을 개발하고 판매하면서 김동진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진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건강에 좋은 빵을 최대한 식감 좋게 만드는 데에 집중했다. 그 길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기 이전에, 진혁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길이었다. 최상급 요리 재료들을 경험하며 미각을 예민하게 하는 길이 아니었다. 이번에 푸드 블록 사업을 하면서 동진이 역시 몇 가지 블록을 내놓았다. 그러나 건강한 재료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맛의 종류가 단조로워져 두 개를 빼고 전부 탈락했다.

‘동진이가 지금 하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원하는 것과 달라.’

무하마드 왕자는 계속해서 혼자 자신을 단련해 왔다. 오랫동안 폐관 수련을 하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대대로 몇몇 정파에서는 산속에서 수련하던 제자를 강호로 보내어 무사 수행을 보낸다. 진혁은 아직 무하마드 왕자를 아랍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귀국한다면 제멋대로 아무거나 먹고 돌아다니면서 혀를 다시 둔감하게 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동안 진혁이 내놓는 요리를 함께 맛보고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는 이들을 몇몇 초청하여 새로운 경험을 하게끔 만들 생각이었다.

이번에 김동진을 만나게 되는 것은 동진에게도, 무하마드 왕자에게도 계기가 될 것이다.

강마리오를 만나며 무하마드 왕자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맛의 범위가 프로페셔널 쉐프 수준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맛보다 건강을 우선시하며 시야가 좁아진 김동진을 만나면 새로운 것을 배울 것이다.

‘진희가 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좋아. 하지만 자기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을 쫓아가기만 하면 문제지.’

진혁은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지점을 열어, 동진이를 독립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하마드 왕자는 진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불쾌해하며 말했다.

「다른 후보를 자꾸 데려오는 이유가 뭔가, 라이벌을 키울 셈인가? 이전에 그럴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오후 훈련도 하지 않고 또 바깥에 돌아다니다니 말이야. 내가 아주 바쁜 사람인데 여기 와 있는 거라네.」

「카심이 잘 봐 줄 겁니다.」

「카심도 말이지, 자네 말을 너무 잘 들어서 탈이야. 그래도 사부가 와서 지켜봐야 제자가 쑥쑥 자라고 하는 일도 다 잘 되지 않겠나.」

진혁은 무하마드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 잘 알았다.

「카심에게 따로 맡겨둔 것이 있으니 오후 훈련을 100% 이상 달성하면 드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자, 어서 가보게나. 일이 바쁘지 않나? 난 훈련하느라 바쁠 걸세.」

무하마드 왕자는 후다닥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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