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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536화 (534/656)

제 536화

진혁은 적당히 둘러댔다.

“요리사분들이랑 바텐더랑 같은 일행이지? 나도 일 맡기고 싶어서. 다음에 본점에서도 파티 한 번 하려고 하거든. 강운곰이 생일도 있고.”

“언제부터 직원 생일도 일일이 챙겨 줬는데?”

“진혁이가 사람을 잘 쓰는구나. 아무렴, 그렇게 챙겨 줘야지.”

아버지가 거들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명함은 또 달라고 하면 되는 건데 왜 진희가 받는 명함을 낚아채니? 네가 그렇게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으면 얘가 연애를 어떻게 하겠어.”

“아우, 엄마! 연애하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말이 잘 통하니까 몇 마디 말 좀 나눈 거 가지고.”

진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불퉁하니 입을 내밀고 있는 딸을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너도 그렇지, 진짜 맘에 들었으면 네가 다시 명함 달라고 했을 거 아니야.”

“맞아요. 맘에 든 거 아니라니까요.”

“진혁이 네가 너무했어.”

“네.”

진혁이 사과했다.

“미안.”

“아, 진짜! 그렇게 순순히 사과하니까 더 기분 나쁘잖아. 잘못한 줄 알면 다시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진희는 화를 내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탁하고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남은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버지는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우리나 네가 평생 진희를 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잖니. 그러잖아도 바빠서 사람 만날 시간 없는 앤데 저렇게 사람도 만나보고 해야지.”

“알고는 있는데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아무나 만나는 건 아니죠.”

“열심히 살면서 여기 일하러 온 사람이 왜 아무나야?”

“빚도 있고, 여하튼 멀쩡한 애는 아니니까 그렇죠. 어딜 감히 진희한테.”

어머니가 물었다.

“빚이 있는지는 어떻게 알아?”

“아는 사람이 말해 줬어요.”

아버지가 신중하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함부로 사람을 판단할 애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말이다.”

진혁이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예?”

어머니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아버지가 근엄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빚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어. ‘왜’ 빚이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상환하고 있는가를 살펴야지.”

아버지는 이야기를 하고서 화장실로 가셨다.

“엄마 결혼할 때 이모들이 엄청 반대했어.”

어머니가 소리죽여 속삭였다.

“왜요?”

“느이 아부지가 그때는 빚이 좀 있었잖니. 가게 얻고 한다고 무리해서, 친구들한테 신세를 많이 졌지. 결국, 다 갚기는 했어. 그중에 제대로 못 갚은 친구가 있어서 나중에 아들한테 갚으려고 했지만 말이야.”

“….”

“아빠가 지금 화가 난 게 아니고, 옛날 자기 생각을 하는 거야. 엄마가 이 사람이랑 결혼시켜 주지 않으면 집 나간다고 협박해서 간신히 허락받은 거였어. 축복받아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

“이모들도 자주 왕래하고, 다 사이좋으신 줄 알았어요.”

“이십 년도 넘게 지났는데, 당연히 사이가 좋아지지. 그래도 처음에는 힘들긴 했어. 지금은 아주 잘 산단다. 너랑 진희만 봐도 그래. 자식 둘 다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내서 남들 다 뭐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그래서 남들 다 부럽다고, 자녀 교육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러 오잖아?”

“….”

임진혁은 침묵했다. 그는 자신이 어머니의 자녀 교육 때문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감정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때 빚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기는 했는데 그렇게 자세하게 듣지는 못했어요.”

“빚이라는 게 도박 빚 같은 것만 있는 게 아니잖아. 부모님 병원비 때문에 빚을 지는 경우도 있고, 재수 없게 보증 섰다가 날리는 경우도 있고. 사업 하느라 얻는 경우도 있지. 경우가 다르니까 그냥 한 마디로 ‘빚이 있으면 안 되지.’라고 말하면 좀 그럴 수 있어.”

“알겠습니다.”

어머니가 진혁을 보면서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부지도 정말로 마음이 상한 건 아닐 거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속상한가 보지.”

“하하.”

“내가 파출부 일 나가기 시작했을 때 진짜 마음 아파하더라. 안 하던 일을 해서 손에 습진이 생기고 피부가 벗겨지는데, 맨날 손에 물 묻히게 해서 미안하다고, 얼마나 사과했는지 몰라.”

어머니가 양손을 펼쳐 보였다. 깔끔하게 손질된 손톱이 눈에 띄었다.

“며늘아기가 이번에 네일 살롱에 초대해 줬어. 다른 사람이 손톱을 손질해 주는 건 처음이었단다.”

“그러셨어요?”

진혁은 손톱 손질에 대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거스러미 따위를 일일이 제거해야 한다는 걸 떠올려 본 적도 없을뿐더러. 손톱을 ‘손질’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했다.

진혁이 다른 사람의 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오직 상대방이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 파악할 때뿐이다. 창을 주로 쓰는 자와 권을 주로 사용하는 자 그리고 쌍절권을 휘두르는 자와 방패를 드는 이의 손에 박히는 굳은살이 전부 다른 것은 당연하다.

진혁은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손에 관심을 기울였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다.

‘이전에 환골탈태하면서 손 피부가 한번 말끔해지셨지. 그리고 다시 거칠어졌구나.’

진혁은 머릿속의 해야 할 일 리스트에 어머니의 피부관리를 추가했다. 물론 미미가 이미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현대 의학과 미용 기술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수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의사를 확인했다.

‘소수마공이 적당할까?’

소수마공은 손끝을 투명하고 하얗게 만드는 무공의 일종이다. 일성을 달성하지 못하면 손을 부드럽고 하얗게 하는 데에 그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 무공을 전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그래서 고운 손을 갖고 싶으시다는 거지요?”

“아파트에 젤 네일이 유행한 적이 있어. 손톱에 반짝반짝 빛나는 젤 매니큐어인가 뭔가를 발라서 기계에 넣어 굽는 거야. 그러면 매니큐어 바르는 거랑 달리 한 달도 넘게 가고, 광택도 다르고 아주 예뻐.”

“….”

임진혁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그가 전혀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영역이었다.

‘미미 씨가 필요한데.’

아니면 진희라도 와서 대화에 끼어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반짝반짝하고 조그마한 인조 보석을 손끝에 붙이기도 하고, 그라데이션이라고 하면서 톤이 다른 색깔을 빨갛고 노랗게 칠하기도 하고, 가끔은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더라. 웨딩 네일이라고 결혼할 때 하는 하얀색과 파란색 매니큐어도 있는데 그것도 아주 예뻤어. 전에 금 씨 할머니 결혼하셨을 때 받으신 웨딩 네일은 금색에 흰색, 그리고 레이스 테마였는데 그것도 아주 예뻤고….”

어머니는 네일의 종류와 개념, 그리고 색칠하는 방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중간에 관심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 당장 진희라도 부르고 싶다. 아까 명함을 괜히 낚아챘어. 그냥 받게 내버려 둔 다음에 글씨를 지우거나 변조해도 되는 것을….’

그는 과거의 어리석은 행동을 생각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너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보내면서 하려고 했던 계획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지금쯤 어머니와 아버지의 추궁과혈을 끝내고 가족 넷이 다 함께 태극권 수련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다들 잔뜩 먹어서 배가 불렀다. 아버지는 술까지 마셔서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진희는 기분이 상해서 위로 올라갔다.

손끝 하나로 세상일이 모두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그는 어머니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릴까요?”

차라리 몸이라도 움직이고 싶었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구, 그럼 좋지. 아주 좋아.”

진혁은 손끝에 힘을 주고서 어머니의 어깨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시작해 견갑골을 지나, 요추까지 내려간다. 등을 살살 타격하기도 하며 두드렸다가 문지르고 잡아당기며 찔러, 인체의 중요한 혈들을 자극하였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기분 좋은 듯한 신음 소리만 간간이 흘릴 뿐이었다.

화장실에 갔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진혁아.”

근래 본 적이 없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진혁은 심상치 않은 느낌에 긴장해 한순간 손을 멈추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노인정에 홍 씨 할머니가 방금 돌아가셨단다.”

“네?”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별일 아니었다. 노인들은 나이 들면 금방 죽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있을 것이다.

노곤하게 늘어져 있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금 씨 할머니랑 제일 친한 그 할머니 말이죠? 어머, 어머. 어떡해.”

“한밤중에 심장마비가 왔단다. 그래도 편히 돌아가셨대.”

어머니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이 층 계단 위를 향해 외쳤다.

“진희야! 진희야. 홍 씨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들은 진희가 우당탕쿵탕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아이고, 어떡해. 금 씨 할머니가 상심이 크시겠어요.”

◈          ◈          ◈

다음 날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하며 진혁은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는 꼭 함께 기 수련을 하자고 해야지.’

하지만 어제 늦게까지 야식을 먹은 가족들은 편안하게 자는 중이었다.

홍 씨 할머니의 타계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착잡해 하셨고, 아버지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결국 진희까지 포함해 넷이서 맥주 열두 병을 더 마셨다.

새벽 네 시까지 마시면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진혁은 새로운 체력 단련 계획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따가 일어나면 태극권 동작부터 다시 가르쳐서….”

다들 잠든 시점에 추궁과혈을 하며 숙취가 없도록 조절했으니, 지금쯤이면 모두 깨어있어야 마땅하다.

대주천을 마친 진혁은 거실로 내려가, 종이에 연필로 태극권 동작 안내서를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가족들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벽 5시, 6시, 7시, 그리고 오전 10시가 되었을 무렵.

진혁은 조심스럽게 진희의 방문을 두드렸다.

“야, 임진희! 일어난 거 다 알아.”

“닥쳐! 난 늦잠 잘 거야!”

“이미 깼잖아?!”

“어제 네시까지 마셨는데 오늘 아침에는 좀 내버려 둬!”

“하나도 안 피곤한 거 알거든?”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분명히 몸이 개운하고 산뜻할 텐데.’

진혁은 임진희의 방문을 여는 것을 포기했다. 강제로 열려면야 열 수는 있지만, 일부러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모님 방문을 살짝 노크해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으으으으음.”

“진혁이 일어났니? 엄마는 조금 있다가 일어날게.”

아침 훈련도 하고 싶고 점심 운동도 해야 하는데 어째서 침대에 계속 있고 싶어 하는지, 진혁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테라스로 나가 홀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

파도가 철썩, 철썩하고 모래사장에 다가왔다가 부딪히고 부서져 물거품이 되어 하얗게 부서졌다.

“오늘 오후에는 꼭 운동하자고 해야지.”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다짐했다.

“아직 2박 3일이 더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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