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4화
아득하게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 그리고 진한 남색 바다.
섬은 별처럼 총총히 바다에 뿌려져 있었다. 푸른 바다 위에서 초록빛 섬들은 드높은 태양 빛을 반사해 보석처럼 빛났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광경에 아버지가 탄성을 질렀다.
“위에서 보니까 진짜 예쁘네.”
“우와아아.”
헬기 조종사가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하강합니다! 흔들릴 수 있으니 손잡이를 잡아 주세요.”
“우와아아아.”
임 씨 가족들은 무사히 헬기에서 내렸다. 헬리콥터 조종사는 인사를 한 후 바로 떠나가 버렸다.
헬기 이착륙장에서 별장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어머니가 비틀거리자 아버지가 잡아 주었다.
“여보, 괜찮아?”
“신기하네요. 한 번쯤은 타볼 만한 것 같아요.”
“두 번은 아니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걸요.”
“하하하.”
헬리콥터 소리가 점점 더 멀어지면서 섬은 고요해졌다. 자동차가 움직이면서 나는 엔진 소리나 경적 소리가 없다. 거리를 걷는 이들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들리는 생활 소음이 전혀 없었다.
진희가 놀라워하며 말했다.
“여기 진짜 조용하다. 소리가 하나도 안 나네.”
부모님은 사이좋게 숙소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앞서 걷고 있던 어머니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진희 너 섬에 처음 와 보니?”
“전에 공주님 결혼식 할 때 섬에 가 봤어요!”
“그 섬은 꽤 크다며.”
“그래서 그런가.”
카리브해의 섬에 있을 때는 이렇게 소수의 사람만 있지 않았다. 백 명 단위의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가며 인부와 자동차가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반면에 지금 이곳에서는 파도 소리와 새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임 씨 가족 이에 별장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고용인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기척도 없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도시에서 살아온 진희는 이 고요함이 생소한 모양이었다.
“이상하게 조용해. 조금 무서울 정도야.”
진희가 양팔로 어깨를 감싸자 임진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조용하지는 않아. 저쪽에서 파도 소리 나고, 이쪽에서는 새 소리가 들리는데.”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진희는 눈을 깜빡였다. 임진혁이 말했다.
“여기 있다가 도시로 돌아가면 오히려 너무 소란스러워서 싫을걸.”
“너도 자연 파야?”
“굳이 고르자면 그렇지.”
“자연은 좋은데, 이렇게까지 가로등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조금 무섭다.”
“가로등 필요해?”
“아니, 아니, 아니!”
진희가 급하게 양손을 저었다. 그녀는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밤길에 산책하시려면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 길을 다듬고 가로등도 짓고 하면 나쁘지는 않을 거야.”
임진혁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앞서 걸어가고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해안가에 별장 근처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기는 한데 산책로를 즐길 만큼은 아니야. 기껏해야 500m 정도일걸.”
“스케일이 너무 커지잖아. 이러다가 화성에 별장 짓겠다.”
“그렇지 않아도 황 씨 그룹에서 우주 산업에도 투자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진짜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야.”
“내 목표는 서울 시내 내 명의의 원룸 오피스텔 사서 반려식물하고 알콩달콩 사는 거였다고. 널 자꾸 보니까 꿈이 점점 더 커지잖아. 이러다가 내 명의의 작은 섬에 별장 짓고 사고 싶어지면 어쩌냐.”
진담 반 농담 반이 섞인 투정에 임진혁이 물었다.
“섬이랑 별장이 갖고 싶어?”
그 질문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사줄지도 모른다.
진희가 질색했다.
“아---니! 그렇게 뭐라도 다 해주려고 하지 마, 나쁜 물 든다.”
“그러지 않을 거잖아.”
“그러지 않을 거지만! 욕심나니까! 아예 얘기를 하지 마세요!”
진희가 양손을 훠이 훠이 저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그렇게 호구처럼 굴지 마라, 알았지? 진짜 걱정된다.”
“호구는 아니야.”
“섬에 별장 짓고 싶다니까 사준다는 게 호구지!”
임진혁이 정정했다.
“사준다고는 안 했어.”
“내가 오해한 거야?”
“섬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일거리를 많이 주면 되지.”
임진혁이 뿌듯하게 말하자, 진희가 입을 딱 벌렸다.
“빈말로라도 절대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일을 해야 돈이 나오지.”
“일은 지금도 충~분히 많이 하고 있어. 심지어 휴가를 왔는데도 일이 따라왔다구. 아니, 그보다 지금 이 와중에 휴가를 나올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운데…, 이게 바로 가족 경영의 폐해인가?”
“응?”
“사실 내가 그냥 직원 A였다면 절대로 지금 시기에 휴가 못 냈을 거 아니야. 사장님이랑 혈연관계니까 당당하게 휴가를 내고 떠나 버리는 거고, 다른 지점 매니저님도 불러와서 대체 근무시키고…, 오 맙소사.”
“그게 왜?”
“이게 바로 인터넷에서 욕먹는 블랙 회사의 특징 아닌가 싶어서.”
남매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면서 길을 걸어갔다. 임진혁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에 군대 갔다 와서 내가 성격이 변했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응.”
진희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진짜 머릿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 있었잖아. 집에서 밥 먹고 설거지는커녕 반찬 통 뚜껑도 안 닫았다고. 집에 들어오면 옷은 허물 벗듯이 아무 데나 뿌려 놔서 나나 엄마가 따라다니면서 주워야 했고. 그런 생활 습관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배려가 넘치는 가족 사랑형 인간이 됐지. 솔직히 너 아닌 줄 알았다.”
임진혁이 물었다.
“그래서 싫었어?”
“싫지는 않지. 그런데 좀 안타깝기도 했어.”
“뭐가?”
“다들 군대 가서 고생한다고 하잖아. 도대체 얼마나 안 좋은 일을 겪었길래 인간이 이렇게 확 달라졌나 싶었지. 내 동기들도 군대 갔는데, 너 같은 애는 없어. 군대에서나 그렇게 했지 집에서도 다 똑같아.”
“푸핫.”
진혁이 그만 웃어버렸다.
“왜 웃어?”
황미미와 부모님에게는 이미 이야기했다. 진희에게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말할 일이 없을 것이다. 백진영이나 유일봉 등,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있으나 그들은 가족이 아니었다. 굳이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이해받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진희에게는 꼭 이야기해두고 싶었다.
‘하나뿐인 남매니까.’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다. 기어 다닐 때부터 항상 옆에 있었고,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할 때도 함께였다.
아직 어리던 시절, 그는 싸움닭처럼 아무에게나 덤비곤 했다. 절대로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희는 쌍둥이 오빠가 주먹다짐하는 것은 싫어했지만, 진혁이가 맞는 건 더 싫어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될 때마다 근처에 숨었다. 그리고 진혁이 질 것 같을 때만 사람을 불러와 주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다.
“얼마나 안 좋은 일인지는 궁금하지 않고?”
임진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 얘기할 생각도 없잖아. 갑자기 어색하게 왜 이래? 이런 얘기 하려고 부른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네가 말하고 싶었으면 벌써 말했겠지. 내가 굳이 캐물어 볼 필요는 없잖아.”
“전에는 물어보려고 했잖아.”
“그때는 궁금했으니까 그랬지. 지금은 궁금하지도 않다, 야.”
“왜?”
진희는 구두 앞코를 내려다보았다. 황미미가 선물해 준 수제 구두다. 금테를 두른 붉은색 송아지 가죽 구두는 진희의 발 크기를 직접 치수를 재 만든 것이었다. 브랜드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했다는 구두이니만큼 편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예뻤다.
구두를 신을 날이 별로 없이 매일 작업화를 신고 주방에 서다 보니 막상 실제로 신은 것은 두어 번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정말로 편해서, 같은 구두를 한 켤레 더 사고 싶어졌다.
그래서 두 번째 구두를 사려고 알아보다가 그녀는 깜짝 놀랐다. 진희는 개인적으로 그 디자이너에게 다시 연락할 수조차 없었다.
그 디자이너는 대중들에게 시판하는 구두를 팔지 않는 사람이었고, 일 년에 몇몇 가족에게만 구두를 만들어 주었다. 금액 역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다. 하지만 돈 때문이 아니라 신용 때문에, 진희 혼자서는 절대로 그 디자이너에게 구두를 주문할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은 진희에게 여러 가지 상념이 들게끔 했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이제는 나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현대라는 시간적 배경도 같고 서울이라는 공간적 배경도 같잖아. 심지어 하는 일도 비슷하고.”
임진혁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되물었다. 한때 가족과 다른 시간적, 공간적 배경 하에 있었던 그에게 있어 ‘다른 세계’라는 말은 조금 극적으로 느껴졌다.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구두 말이야, 미미 씨가 결혼하면서 나한테 선물해 준 거야. 알아?”
“몰랐어.”
“이 구두를 신으면 너무 편해서 다른 구두를 신을 수 없어.”
진희가 빙긋 웃었다.
“그런데 나는 이 구두를 직접 살 수가 없어. 내가 사서 이런 구두를 신을 수도 없고, 답례로 사서 회장님한테 선물해 드릴 수도 없어.”
“내가 대신 사서 줄게.”
“아니지, 아니지. 봐 봐. 헬기를 타고 별장에서 호화로운 휴가를 즐기면, 이다음에 불편한 민박집에서 즐기는 여행은 어색하고 초라해질까 봐 무서워.”
“돈이 모자라면 내가 보태 주면 되잖아.”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데 네가 해 주는 건 괜찮아. 내가 갚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갚을 수 없는 신세를 일방적으로 지면 안 되지. 의존하게 되잖아.”
임진혁이 말했다.
“누나한테 쓰는 건 돈 안 아까워.”
“아, 내가 잘못했다고! 그놈의 누나 소리 좀 집어치워!”
진희가 성질을 냈다. 임진혁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언제는 무조건 누나라고 불러 달라며.”
“그때는 내가 너보다 정신 연령이 다섯 살은 높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지금은 아니고?”
“응, 군대 갔다 오고 나서 훨씬 어른스러워졌어. 가끔 아빠가 두 명 생긴 거 같다니까.”
진혁이 입을 뗐다. 그는 이번에는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군대에 갔다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냐면….”
별장에 도착한 어머니가 양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얘들아, 어서 와라! 요리사님이 벌써 요리를 다 해놓으셨다고 하네.”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는 바비큐 그릴이 설치되어 있었다. 요리사는 미리 연락을 받아서 시간에 맞춰서 굽고 있었다. 머리가 크고 실한 새우, 입이 꽉 다물린 크고 작은 조개들이 점차 익어 색깔을 달리해가고 있다.
지글지글 굽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금방 가요!”
진희는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골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너 그러다 넘어질라.”
임진혁은 진희의 속도에 맞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다음에 이야기해야겠다. 3박 4일이나 되니까 말할 시간이 있겠지.’
하얀 리넨 테이블보가 깔린 야외 테이블에는 형형색색 선명한 빛깔을 뽐내는 과일 샐러드가 장식되어 있었다. 조그마한 얼음 조각도 있었다.
“솜씨가 좋군.”
아버지가 근엄하게 평했다. 요리사 한 명은 해물을 굽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접대를 하였다.
“음료수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제대로 된 메뉴판까지 갖춰져 있어, 마치 고급 호텔에 온 것 같았다.
“저는 레모네이드요!”
진희가 즐겁게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