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33화 (531/656)

제 533화

진희는 퀭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간 진짜 빨리 가네.”

그녀는 아주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 명동점에 파견되어 온 일봉에게 밤낮으로 인수인계를 했다. 확실히 일봉은 진희가 구울 수 있는 빵들은 다 만들 줄 알았다. 진혁에게 제대로 훈련받아서 오히려 맛있게 굽는 빵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새롭게 개발해낸 웰빙 빵들은 처음부터 가르쳐주어야 했다. 가르칠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명동점 주방 내에 식재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 재고가 어느 정도며 언제 어디에 물품을 주문해야 하는지는 쉽게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것은 매장 내의 인간관계였다. 직원들 스케쥴표를 짤 때 같이 붙여 놓으면 안 되는 직원과 꼭 함께 일하게 해야 하는 직원들은 누구인지 알려 주어야 했다.

“멸치 녀석은 처음에는 눈치 보는 것 같다가 기어오르는 면이 있어서, 장 쉐프하고 붙여놓으면 별로 안 좋더라구요. 그래서 일부러 떼어 놓고 있어요. 나쁜 애는 아닌데, 내 말만 잘 들어요.”

일봉이 심각하게 말했다.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 거 아닌가요? 장 쉐프님이 금방 가실 분이라고 무시하는 거잖아요.”

“그런가? 그럴 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본점 운종이는 진혁이 아니라 누가 와도 꾸벅꾸벅 잘도 인사하는데 말입니다. 처음에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는 운종이 녀석이 콧대가 높고 멸치는 말을 잘 들었거든요. 너구리도 그렇고. 그런데 이제는 반대네.”

“그럼 제가 교육을 잘못 했나 봐요.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자리를 비워도 되나.”

“처음 하루는 붙여 줘요. 실제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제가 좀 봐 볼게요.”

“일봉 매니저님한테 제가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이거는 제가 하는 게 나아요. 진혁이 형이 와서 보면 더 큰 일 날 걸요? 형이 순해 보이지만 화나면 무섭다구요. 특히 직장 내 상하 관계는 확실해요.”

“어, 그런 줄은 몰랐어요.”

“직장 내 괴롭힘에도 민감하구요. 인간 CCTV도 아니면서 귀는 엄청나게 밝아서, 저번에 본점 알바생 한 명이 나중에 입사한 애 귀 잡아당겼다가 그대로 잘렸잖아요.”

“세상에, 그런 일도 있었어요?”

“그럼요, 본점이 복지도 좋고 돈도 빵빵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을 수 있으니까 일하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미리 들어온 애들이 텃세를 부리려고 했나 봐요. 내 말 안 들으면 여기서 내보낼 거야, 이런 식으로. 그런 애들은 형이 귀신같이 골라내서 자르더라고요.”

“사람 쓰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예전에 수간호사님한테 근무표 바꿔 달라고 얘기할 때는 몰랐는데, 내가 근무표를 짜는 입장이 되니까 고려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요.”

“그보다 진희 점장 누나, 내일 새벽에 출발하신다면서요? 이제 들어가서 주무세요. 남해까지 가려면 차로 갈 거 아니에요?”

당장 제과제빵 레시피를 포함하여 서류 업무도 챙겼는데, 명동점 내의 인간관계에 대한 정보까지 넘기려니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진희는 퇴근 시간을 한참 넘겨서 퇴근했다.

“고작 점장인 내가 이 정도로 바쁜데 진혁이는 도대체 얼마나 바쁜 거야….”

“형은 무슨 터미네이터 같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3인분의 일을 해치우잖아요.”

“하하하.”

마지막으로 휴가 가서 쓸지도 모르는 책에 넣을 자료들까지 챙기고서야 그녀는 가게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럼 휴가 잘 다녀오세요!”

“일봉 매니저님, 잘 부탁해요!”

“걱정 마세요. 점장 누나, 제가 알아서 다 할게요.”

일봉이 순박한 시골 청년처럼 웃어 보였다. 진희는 해맑은 미소를 보며 가게를 떠났다.

◈          ◈          ◈

다음날, 진희는 새벽부터 캐리어를 끌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라. 진혁이 녀석, 어지간히 여행을 빨리 가고 싶나 보네.”

진혁의 말대로 오피스텔 주차장에서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운전하는 사람은 진혁이 아니었다.

보통 미미와 함께 다니는 운전기사였다. 임진희는 깜짝 놀라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운전기사는 진희의 캐리어를 번쩍 들어 트렁크에 실었다. 그녀는 쭈뼛거리며 뒷좌석에 탔다.

‘이거 진짜 익숙해지지가 않네.’

미미가 주로 타는 고급 차량은 승차감부터 달랐다. 푹신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면 차내에 설치된 미니바에 손을 뻗을 수 있다. 작은 냉장고 안에는 차갑게 식어있는 커피와 술이 준비되어 있다.

‘절대로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해와 달’ 명동점의 점장 수입은 적지 않았다. 푸드 블록 사업에서 받은 인센티브를 포함하면 월 천만 원은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돈을 알뜰살뜰하게 모았다.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몰랐고, 허투루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입이 늘었다고 해서 갑자기 개인 운전기사를 고용하거나, 고가의 외제 차량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니다… 진혁이 거다… 괜히 눈만 높아지면 안 된다….’

그녀는 미니바 속에 있는 콜롬비아산 아메리카노 병을 만져보았다. 서늘한 유리병은 손에 감싸일 만큼 작았다. 뚜껑을 따면 향긋한 향기가 풍겨올 것이다.

푸드 블록 사업을 하면서 다양한 커피를 마셔보고 향을 맡아보았는데, 이 커피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향이 깊고 가격이 비쌌다.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차에 싣고 다닌단 말이지.’

임진혁과 황미미 부부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두 사람이 결혼할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그녀는 솔직히 진혁이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다.

‘소개해달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자기 인연은 정말로 따로 있나 봐.’

보세 의류를 입고 짝퉁 삼색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신고서 피시방에서 게임하던 녀석이다. 이렇게나 좋은 여자분과 결혼한다니 정말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미미는 단순히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었다.

부잣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는데도 성격이 좋고 포용력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 진혁이 서툰 부분들을 뒤받쳐주어, 내조란 이런 것이구나 할 정도였다.

미미가 부모님께서 소망하던 것들을 척척 이뤄줄 때는 놀랍고 충격적이어서 더 이상 부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경외감이 들 뿐이다.

‘미미 씨가 너무 잘해서 내가 할 게 없을 정도야.’

어버이날에 금괴를 보내는 올케가 있으니, 현금 100만 원 정도는 티도 나지 않았다. 진희는 나름대로 돈을 발사하는 총을 준비한다거나, 돈을 돌돌 말아 만든 꽃다발 같은 것을 내밀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진짜 금괴 앞에서는 가치가 덜해 보였다.

‘섬이랑 요트를 선물하는 스케일에 맞출 수가 있어야지.’

진희가 평생 동안 전 재산을 모아도 부모님에게 섬에 별장을 지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진희가 아무리 애써도 진혁과 미미 부부만큼 물질적인 효도를 더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밖의 면을 챙겨야 했다.

‘나보다 훨씬 바쁜 진혁이도 가는데, 내가 시간을 못 낸다고 말하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잖아.’

바쁜 와중에도 남해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가게를 지키고 싶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되었고, 다음 시즌의 건강한 빵 개발에도 시간을 투자하고 싶었다.

등이 푹신푹신하니 잠이 왔다.

‘이 차 쿠션 진짜 편하긴 하네.’

그녀는 시트에 등을 기대서는 꾸벅꾸벅 졸았다.

‘그래도 익숙해지면 안 돼. 내 것이 아닌데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진희는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반복해 같은 말을 외우며 눈을 감았다.

◈          ◈          ◈

“이쪽으로 와.”

낯선 장소에 도착한 진희를 임진혁이 반겼다. 진희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야?”

이곳은 그녀가 생각한 장소가 아니었다. 공항도 아니고 터미널로 출발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막연하게 다 같이 진혁의 집 앞에서 모여서 차를 타고 출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예 서울이 아니었다.

그들은 경기도의 한 빌딩 앞에 서 있었다. 진희가 처음 보는 현대식 고층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이 건물 옥상에 프라이빗 헬리패드가 있어. 미미가 아는 분께 부탁해서 빌렸어.”

“아니, 잠깐만. 남해 가는데 헬기를 왜 빌렸는데?”

아버지가 옥상을 올려다보며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헬기로 가면 아주 빠르다고 하더라.”

진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캐리어는 두고 와! 김 기사님이 따로 가져다주실 거야. 늦어도 오늘 점심때에는 도착할 거고, 우리는 아침 시간에 맞춰서 섬에 도착할 거야.”

임진희는 눈앞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중얼거렸다.

“잠깐, 우리나라 헬기 보유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우리 병원도 소방 구급 헬기가 없어서 맨날 도에서 빌렸는데… 개인 헬기 소유자한테 빌렸다고?”

“미미 씨가 비즈니스용으로 하나 사준다고 하는데 괜찮다고 했어.”

“그래… 즐기자. 그냥 즐기는 거야.”

진희가 영혼을 잃고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들떠서 말했다.

“헬기 사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되니?”

“그건 안 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사진 찍은 걸 개인 소장하는 건 괜찮을 겁니다.”

“어머, 어머. 그렇구나.”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켜고서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불러왔다. 최근 유행하는 필터 프로그램이었다. 진희가 어머니를 보며 물었다.

“엄마,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다운받았어요?”

“며늘아기가 가르쳐 줬어. 셀카 찍을 때 이거 써서 찍으면 아주 이쁘게 나온다고 하더라고. 너도 써 볼래?”

“저는 이미 쓰고 있어요.”

“그럼 혼자서만 쓰지 말고 엄마한테도 좀 가르쳐 줘야지.”

“….”

임진희는 어쩐지 패배한 느낌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거로 비교하면 안 되는데.’

그녀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차 타고 가면 되지 헬기까지 빌리냐….”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나 아버지나 늦게까지 야근할 게 분명하니, 가는 시간이라도 덜 피곤하게 빨리 가자고 빌렸다더라.”

“그래도 기름값이니 조종사 인건비니 하면 비싸지 않아? 난 그냥 차 안에서 자도 되는데.”

“전부터 사업상 미팅 때는 종종 빌렸거든. 이번에는 좀 급하게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안 쓴다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

“얼마나 주고 빌렸니?”

“직접 구운 케이크 두 판.”

“….”

그녀는 헬리콥터에 타 본 것이 처음이었다. 사실은 헬리콥터를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우와아.”

“이쪽으로 오세요.”

헬리콥터는 2톤급 5~6인승이었다. 조종사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부터 한 명씩 낙하산을 받았다.

“안전을 위해서 착용하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사용할 일은 없기를 바랄게요.”

간단하게 안전 교육을 받고 나서 임 씨 가족은 헬기에 올랐다.

일단 출발하자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계속해서 울렸다.

바람 소리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진동.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도시.

진희는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와 우와.”

걱정도, 부러움도 질투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드넓은 창공을 활강하는 이곳에서, 경이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는 가족들.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임진혁.

그녀는 사진을 찍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순간을 마음속에 담으려 했다.

‘진혁이는 그냥 가족이니까, 이게 하나도 아깝지 않은 거구나. 다 해주고 싶은 거구나.’

질투할 필요도 없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된다.

“아유, 또 흔들리네.”

어머니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창밖의 광경을 찍으려고 노력했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딸과 아내, 아들을 지켜보았다.

“도착했습니다!”

남해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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