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2화
◈ ◈ ◈
진혁이 제일 먼저 확인한 사람은 임진희였다.
“그래서 가족 여행에 무슬림 왕자님이 따라온다고? 미쳤냐?”
그녀는 짧고 강렬하게 거절해 주었다. 부모님에게 질문할 필요도 없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별로야?”
“당연히 별로지! 그게 가족 여행이냐? 손님 모시고 하는 투어지. 엄마, 아빠한테는 물어볼 생각도 하지 마.”
“왜?”
“네 사업상 중요한 고객이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데리고 가자고 하실 테니까. 싫어도 싫다고 말 못 하실 거란 말이야. 그 상황이 뻔하다, 뻔해.”
“그런 건 아닌데. 같이 가고 싶지 않으면 거절하면 돼. 한국의 집밥을 먹어보고 싶대.”
진희가 코웃음 쳤다.
“그럼 우리 집에 오면 안 되지. 솔직히 우리 엄마 요리 못하잖아. 지금은 밑반찬도 다 혜영이가 해놓는데. 차라리 혜영이네 집에 보내던가.”
진혁이 키득 웃으며 말했다.
“그거 엄마한테 이야기해도 돼?”
장난스럽게 한 농담이었으나 임진희는 정색했다.
“당연히 안 되지! 집에서 쫓겨날 일 있어? 엄마가 하신 요리가 나나 너한테는 맛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그거랑 이건 완전 별개야. 우리는 익숙해졌으니까 지나치게 짠 된장국이나 간이 맞지 않는 김치찌개 같은 걸 엄마의 맛이거니 하고 추억 보정 받아서 먹지만 말이야!”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 그렇지만 그걸 다른 사람한테 먹이면 안 되지. 그 사람 미식가라며? 괜히 불렀다가 그 사람이 엄마 음식 먹고 ‘한식도 별거 없네~ 맛이 없구만~’ 하면 엄마는 또 얼마나 충격을 받으시겠어? 괜히 욕먹는 일 만들어서 하지 말자. 그냥 좋게, 좋게 살자고.”
“알았어.”
“할랄 음식을 먹어야 하니까 한식당에 가기는 어려울 거고. 사실 그 사람 정도면 그냥 한식당 쉐프들을 초청해서 요리하게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도대체 왜 남의 가족 여행에 끼고 싶다는 건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겪어 왔던 맛의 원류에 대해서 탐구해보려고 하는 거지.”
“맛없는 걸 많이 먹게 되면 맛있는 것에 대한 욕구가 상승한다고… 할 수는 없지. 너랑 나니까 이런 이야기 하는 거지, 어디 가서 엄마 요리 못한다고 하지 마. 괜히 엄마 욕 먹이는 짓이야.”
진혁이 말했다.
“안 해, 안 해. 이제 그만 말해도 돼.”
“그러면 네 선에서 알아서 거절해! 그러잖아도 여행 때문에 시간 쪼개느라 바빠 죽겠는데. 이런 쓸데없는 일로 연락하지 말고.”
“그러면 우리가 왕자에게 초대받아서 가는 건 어때? 시드니나 뉴욕, 카리브해의 섬 중에서 골라서 갈 수 있어.”
진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건 좀 혹하긴 하는데, 이동 시간만 해도 너무 길어지잖아. 여행이 아니라 휴가라고.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보면 당연히 가신다고 하겠지. 카카오스토리에서 사진 찍어서 자랑하실걸. 하지만!! 우리 가족 여행에 초대하지는 말자.”
“알았어.”
진혁은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했다.
◈ ◈ ◈
가족 여행 계획을 들은 미미가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같이 가기 어려워요. 대신 보조 비서를 한 명 보내드릴까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미미의 비서들은 전부 학교 법인 일에 매달려 있었다. 한 명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대체해야 하고 필연적으로 야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아 참, 그보다 무하마드 왕자가 이런 제안을 해서 거절했습니다.」
진혁은 오늘 나누었던 대화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진희가 거절한 자세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미미는 전부 짐작한 눈치였다.
「계시지 않는 동안에 한국인 쉐프 다섯 명을 보내면 어떨까요?」
일련의 상황을 듣고 나서 미미가 제안했다.
「으음.」
「처음에는 삼계탕이나 갈비탕, 불고기처럼 외국인들이 좋아하고 무난한 한식부터 소개하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한국식 양념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김치찌개나 나물 반찬, 소시지 야채 볶음이나 된장국 같은 음식을 소개하죠.」
「좋은 해결책입니다.」
「아랍 쪽의 레스토랑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한국 요리사들이 있을 겁니다. 할랄 음식에 대해서 교육하고, 푸드 블록 사업지에서 수입하는 식자재를 소량 공급하면 될 거예요.」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무하마드 왕자님이 원하시는 건 그게 아닐 거예요.」
「음?」
「왕자님은 바보가 아니에요. 지금 한국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지요.」
「미각 훈련을 위해서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죠.」
미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그랬던 때가 있으니 알 수 있어요. 무하마드 왕자도 원하는 것은 전부 다 쉽게 얻었을 거예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은 비슷한 걸 느꼈을 거예요. 무언가를 원하기 전에 갖게 되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없어지게 되어요. 해야 하는 일은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루할 뿐이지요.」
「당신도 그랬습니까?」
「옛날에는 그랬지요.」
그녀가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사람마다 그 욕망은 다른 형태로 발전하게 될 거예요. 저는 연기를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멋진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지요. 지금은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제가 아끼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요.」
「충분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무하마드 왕자의 경우에는 그 욕망이 식욕, 그것도 미식에 집중되어 있어요. 맛있는 것을 더 많이 먹고 싶다는 욕망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단 말이에요? 무하마드 왕자처럼 미각이 예민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면 더 욕망이 가속화될 수 있겠지요. 하물며 충분히 부유하여 세계의 진귀한 음식들을 남김없이 맛봐왔다면 어떨까요. 어느 시점에서는 무엇을 먹어도 더 이상 흥미가 동하지 않을 겁니다. 맛있게 느껴지던 것들도 비슷비슷할 것이고, 더 이상 식사가 즐겁지 않을 거예요.」
진혁은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내공의 숙련에 집착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던 자신.
다른 이들은 교주라는 자리에 즉위한 진혁을 경외하며 존경하였다. 그에게는 세상 천하 부러울 것이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다른 세계에 있었다. 부하들을 가족처럼 여겼으나 진짜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외로움은 겨울처럼 뼈에 사무쳐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다.
「예민하고 섬세한 미각은… 원하는 수준의 음식이 없는 세계에서는 오히려 저주일지도 모르겠군.」
「맞아요. 오마르 왕자님이 무하마드 왕자님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분명히 멀쩡한 음식인데 혼자서 구역질하면서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요. 분명히 누군가 일부러 장난을 쳤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더 음식에 예민한 걸지도 몰라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레귤러였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었겠습니다.」
「지금 진혁 씨랑 같이 있으면서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 보면 알기 쉬워요. 끝없이 계속되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듯한 느낌이 아닐까요. 물속에서 빠졌는데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 거지요. 자기보다 더 미각이 탁월한 데다가, 자신의 미각에 대해서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제갈공명은 유비가 자신을 세 번 찾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고 하지요.」
「….」
「진혁 씨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그렇기 위해서 미각을 갈고닦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고,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사업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지며 손해를 감수하고 한국에 머무르는 중인걸요. 존경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닮고 싶은 거예요.」
「같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에요, 진혁 씨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거예요.」
미미가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 이 자리에 건강히 계셔 주신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어 진혁의 손을 맞잡았다.
「어젯밤에는 유난히 일이 많았어요. 상해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피곤해서 먼저 잠들어버렸어요. 그런데 일어나고 나니 몸이 개운하고 기분이 상쾌했어요. 진혁 씨가 무언가 하신 거지요?」
진혁이 머쓱하게 말했다.
「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덕분에 오늘 했던 비즈니스 미팅도 아주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어요. 컨디션이 좋아지니까 사람들 대하기도 수월했고요. 하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째서입니까?」
미미가 망설이며 말했다.
「진기를 나눠준다는 건 진혁 씨가 그만큼 제 피로를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세요. 저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진혁 씨를 돌봐줄 만한 실력의 의원은 없으니까요.」
그는 황태명을 진료했던 의사에게 따로 건강 검진을 받았다.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중국인으로, 입이 무거운 자였다. 그는 강건하고 튼튼한 진혁의 육체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했다. 그가 봐온 그 어떤 운동선수보다도 더 단련된 육체라고 하였다. 신체의 메커니즘 자체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만일 부상을 입는다면 치료를 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였다.
그 이후로 미미는 진혁을 대할 때 깨지기 쉬운 도자기 그릇을 대하듯이 했다.
조금이라도 무리하지 않게 하였고, 1km 정도의 짧은 거리를 걸을 때도 자동차와 기사를 붙였다.
진혁은 적당히 맞추어 주었으나 내킬 때는 경호원과 운전기사를 따돌리고 혼자서 달리곤 했다.
「항상 건강을 최우선으로 해서 움직이세요.」
자신이 얼마나 튼튼한지 몇 번이고 말해도, 아내와 부모님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무하마드 왕자가 초대한다면, 사하라 사막 쪽은 피하세요. 이 시기에는 너무 더우니 부모님의 건강에 무리가 갈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진혁이 물었다.
「아버지는 좀 어떠십니까.」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지셨어요.」
미미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진혁은 한 달 전 잠시 상해에 출장을 다녀왔다. 그는 미미의 사무실에서 이틀간 집무를 보았다.
사무실의 안쪽에는 비밀 방이 있었고, 그 안에는 세 명의 경호원과 황려권이 머물고 있었다.
방이라고는 해도 숙소와 침실, 주방이 딸린 호텔급 시설이다.
지치지 않고 경호원들을 포섭하려던 황려권은 느닷없이 넘어져 머리를 부딪쳤다. 경호원들은 즉각 미미에게 보고하였고, 의식을 잃은 황려권은 황 씨 그룹 소유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의식을 되찾은 황려권은 과거의 기억을 잊은 듯,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미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느니, 자신의 말을 들으며 돈을 주겠다느니 하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미미는 진혁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혁 역시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았다.
「그럼, 남해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