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0화
“언제 어디로 가려고요?”
임진희가 물었다.
“남해에 있는 별장으로 갈 거야. 네 아버지가 배에도 태워 주신단다.”
아버지가 진혁에게 말했다.
“며늘아기도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하자꾸나.”
진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임진희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아빠, 회장님은 지금 학교 건설 때문에 엄청나게 바쁠걸요?”
진혁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미미를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건 둘째치고, 스케줄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미미 씨가 요새 바쁘긴 한데, 진희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한테도 이야기가 들어왔으니까 그렇지…. 정기적으로 수업을 하는 건 어렵더라고 학기별 특강은 할 수 있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러면 아예 교재를 겸한 저서를 쓰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고. 장 쉐프님이 도와주셔서 목차는 전부 정리했고 이제 틈틈이 쓰는 중이야.”
어머니가 감탄했다.
“진희 네가 책을 쓴다니! 진짜 멋지다. 네가 자랑스러워.”
“제가 이야기 안 했던가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줄 알았어요. 그냥 여태까지 만들었던 레시피 정리하면서 이론적 근거를 주석으로 다는 거예요. 대단한 건 아니에요.”
진희가 뺨을 붉히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저만 쓰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지금 제과제빵학에 대한 책 쓰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다 며늘아기 덕분이지.”
“아버지가 정열적으로 교과서를 집필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니야. 처음에는 며늘아기가 지난 학기 강의자료들을 정리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대답해줬지. 그랬더니 사람을 붙여 주더라. 퇴근하고 나면 그 친구가 집에 와 있어. 아주 똑똑한 친구야. 강의 자료를 건네줬을 뿐인데 어느샌가 출판기획서하고 목차가 다 잡혀있지 뭐냐. 내가 아는 걸 구술하고 나면 하루가 끝나. 가끔은 근거를 찾아주는 과정에서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걸 고쳐 주기까지 한단다. 그러니 나도 공부가 되지 뭐냐.”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젊고 유능한 친구더라. 제과제빵 출판사의 기획 PD라고 했지요? 얼굴도 잘생겼어. 진희 너도 한번 만나보면 좋겠더라.”
“엄마는! 자꾸 남자를 소개시켜주려고 하고 그래요.”
“꼭 그런 건 아니고, 나잇대가 비슷하니까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지.”
“진혁이 소개시켜 주세요. 저 녀석이야말로 책을 써야 하지 않나.”
미미가 가족들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진혁은 새삼스럽게 놀랐다.
“미미 씨가 아버지께서 교과서를 쓰고 계신다고 했는데, 사람을 보내준 지는 몰랐네요.”
“넌 진짜 회장님한테 잘해야 돼.”
아버지가 물었다.
“그러면 진희 너는 책 쓰느라 못 간다는 거냐? 그거는 꼭 서울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잖니. 원고를 들고 와서 느긋하게 쉬면서 글을 쓰면 어때?”
임진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책이랑 가게 일까지 겹쳐지고서 솔직히 바빠서요…. 언제쯤 생각하시는데요?”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아예 다음 주부터 갈까 했어.”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눈빛으로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이도 바쁠 텐데요? 너 지금 일 너무 많다며. 푸드 블록도 그렇고, 맛의 과학 연구도 그렇고. 사업상 일이 너무 많아서 본점에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나가잖아.”
하지만 진혁은 그녀와 의견이 달랐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랜만에 시간을 빼서 여행가신다는데 가야지. 진희 네가 일이 바쁘면 명동점에 누구 한 명 보내줄게.”
임진희가 딱 잘라 거절했다.
“새로 사람 오면 훈련시키는 것만 해도 벅차. 나만큼 하는 사람도 없고.”
푸드 블록 사업을 하면서 만나게 된 페이스트리 쉐프들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진혁은 누구를 보내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후보들을 떠올렸다. 생각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진희가 편하게 생각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일봉이 어때?”
진혁의 말에 어머니가 물었다.
“일봉이 청년이 요즘 시간이 있니? 서울에서 일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카데미에서 애들 가르치고 있어요. 지금은 법인 준비하면서 커리큘럼 짜는 중이라 가게에 나가지는 않거든요. 저희가 여름 휴가 가는 동안에 명동점을 도와주면 도움이 될 거예요.”
“진혁이 너도 가게를 더 오래 비우면… 아니다.”
사장님이 가게를 비운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진희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지금 장 쉐프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잠을 줄여가며 일하는 와중에, 갑자기 휴가를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아버지가 눈치 없이 말했다.
“진희 너도 일봉이한테 빵 만들기를 배웠잖니. 걔라면 믿을 수 있지.”
“어… 어어. 알았어. 인수인계할 걸 정리해 볼게.”
진희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원하시는 날짜를 대강 주세요. 한 비서 통해서 일정 조율해 볼게요.”
“알았다.”
진혁이 말했다.
“엄마, 아빠도 가게 닫으실 필요 없어요. 아예 대체 인력을 파견할게요.”
“그래, 네가 보내면 믿을만한 사람이겠지.”
아버지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일봉이는 아예 서울에서 터를 잡았지?”
“아빠! 일봉 매니저님은 명동점에 올 거예요.”
진희가 다급하게 선언했다. 어머니가 풋 하고 웃었다.
“일봉이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둘이서 쟁탈전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
“아버지, 소망 베이커리에 파견할 사람은 따로 생각해둔 이가 있어요. 제가 연락 드릴게요.”
“알았다, 고맙다. 그럼 3박 4일 정도는 괜찮지?”
“맞춰 볼게요.”
“저도요.”
대략 일정이 정해졌다. 최종적으로 승리한 어머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호도 데리고 갈 거야. 별장이 있으니 반려동물을 데리고 가도 되는지 어떤지 알아보지 않아도 되니 좋네. 혼자 두고 가면 외롭잖니.”
어머니는 음식 사진을 잔뜩 찍었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으면서 즐거워하셨다.
“맨날 가게랑 집만 왔다 갔다 하다가 이렇게 사진 찍을 것도 많으니까 좋구나. 예쁘고 알록달록한 음식이 맛도 좋고 사진에도 아름답게 찍히니까 더할 나위가 없네. 다음에는 또 다른 나라 음식도 먹어보러 가자.”
“그래요, 어머니.”
그리스식 식사는 신선하고 맛있었으며, 좋은 대화거리가 되었다. 임 씨 가족은 온화하고도 평화로운 분위기로 식사를 마쳤다.
◈ ◈ ◈
가족들과 헤어지고 돌아온 진혁은 2층의 가족 침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아까 임진희가 말한 대로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황미미는 최근에 퇴원한 후 한동안 쉬었으나 최근에 다시 학교 설립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수하들이 알아서 하는 것을 총괄할 뿐이지만 업무량이 적지는 않다.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물어봐야겠군.’
그 와중에 아버지나 진희의 커리어까지 신경 써주고 있었다니 고마운 일이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서 진혁은 양손을 뻗어 등에 가져다 댔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지길 바랍니다.’
그는 아까 아버지가 등을 주물러 주던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투박한 손길이지만 따뜻하고 다정했다. 아버지는 손으로 내내 기를 흘리고 있었다.
진기를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친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다. 기를 보내기는커녕 운기조식도 할 줄 모르는 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손끝을 통해 일부 기를 흘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세세한 컨트롤이 부족해 그 기(氣)가 진혁에게 전달되지는 못하고 그저 흘리기만 했을 뿐이다.
악력이 부족해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에 파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아주 대단한 일이다.
초식의 극에 달한 절정 고수라고 해도 진기를 흘려보내는 데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이는 내공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세밀한 조정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병에 담긴 술을 따르는 능력은 그 술의 양과는 관계없는 것과 똑같다.
‘아주 어려운 일인데 말이지. 이전에 물엿을 만드셨던 때도 그랬지. 그때는 훌륭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기본적으로 진기를 흘려보낸다는 것은 좋기만 한 일이 아니다. 본래대로라면 스스로 갖고 있어야 할 자신의 생기를 뽑아내어 흘린다. 효율이 나쁘고 쉽게 피로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헌혈이란 봉사와도 같아 숭고하고 좋은 일이지만 건강이 나쁜 사람이 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하물며 모르는 사이에 진기를 질질 흘리고 다니면서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다면 최악의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
‘이번 남해 여행에서는 아버지에게 진기 조절을 가르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아야겠어.’
미래의 일정을 계획하며 진혁은 미미의 전신을 살폈다. 피로했는지 탁기가 쌓여있었다. 온몸을 어루만지며 전신의 기혈 구석구석에 쌓인 탁기를 조금씩 꺼내어 제거하고 태운다. 퀭하고 피곤해져 있던 안색이 복숭앗빛으로 돌아오며, 피부가 점차 매끈해져 갔다. 가늘어지고 탄력이 없었던 머리카락도 반들반들하고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매끄럽고 찰랑찰랑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 주며 진혁은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마음을 담게 되었을까. 진심(盡心)이기 때문일까. 태극권도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할 정도로, 무공에는 재능이 없으신 분인데.’
오히려 진혁이 무공의 일부나마 가르친 임진희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진희의 태극권 솜씨는 이제 간신히 삼류 잡배의 수준에는 도달했다. 그녀는 피부 미용을 위한 건강 체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길거리에서 만나는 일반인 남성 정도라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다. 즉 호신술로는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구워내는 빵에 진기를 담지 못했다. 물엿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도 물론이다.
‘아버지가 빵을 더 오래 만들어 왔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미미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얕게 잠들어 있던 아내는 더 깊숙한 잠에 빠져들었다. 등에 양손을 대고서 소주천과 대주천을 대행하고 나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소망 베이커리에 파견할 사람은 리처드 베이커가 좋겠어. 마침 휴가도 냈다고 했고, 내 아버지도 보고 싶어 했으니까. 내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기 시작했는지 알고 싶어 했지. 통역을 붙여서 아버지의 빵집에 가게 하면 되겠어.’
리처드 베이커는 디아타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온라인상으로 레시피를 제출해 푸드 블록 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아예 푸드 블록 사업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전부터 아버지의 빵집에 가보고 싶어 하기도 했으니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 ◈ ◈
다음날.
진혁은 아침 일찍 운동을 함께하기 위해 체력 단련소를 방문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무하마드 왕자가 눈을 부라렸다.
「다음 주에 나를 두고 어디를 간다고?」
「남해에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