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8화
「제 쌍둥이, 진희라고 합니다. 저와 함께 페이스트리 쉐프로 일하고 있지요. 아주 유능합니다.」
진혁이 덧붙인 칭찬의 말에 임진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디아타 공주의 결혼식에서 여성 결혼식 파트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군! 늦었지만 고맙네.」
진혁은 오마르 왕자보다는 꼬마를 더 중시해서 살폈다. 라시드는 꽤 건강해 보였다.
「요전부터 라시드 녀석이 아주 건강해졌어. 종종 자네 이야기도 하더라고.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 볼 셈이었는데 말이야, 한국에는 이틀 더 머무를 셈이네. 사업 이야기도 할 겸, 오늘이나 내일 디너를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
오마르는 임진혁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진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푸드 블록 사업에 대해서 긴밀하게 의논해야 하는데.」
이것은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마르 왕자와 무하마드 왕자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박쥐처럼 왔다 갔다 하며 어디에 붙을지를 재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질문이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걸려 있었다.
진혁은 무릎을 굽히고 라시드 왕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견 오마르 왕자를 무시하는 처사로도 보일만 한 행동이었다.
「꼬마 왕자님, 오랜만입니다. 요즘에는 어떻게 지냅니까?」
「비행기 탔어!」
라시드는 전용기의 붉은 비단 카펫이라든가, 창문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구름바다에 대해서 장황하게 묘사했다.
「아바마마랑 같이 있으면 하늘도 날 수 있어.」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넘쳐흐르는 발언이었다. 미묘하게 굳어 있던 오마르 왕자의 안색이 한순간 풀렸다. 진혁은 미미의 조언을 떠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죠, 저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두 분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요.」
「아저씨의 아버지? 어디가 아파?」
소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진혁이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라시드 왕손께서 걱정해 주셨으니 이제 나아지실 겁니다.」
오마르 왕자가 누그러진 기색으로 말했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 조만간 보자고.」
「라시드 왕손께서도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마르 왕자는 수행원들과 함께 사라졌다. 경호원과 보모를 포함해 여덟 명이나 되는 인원이다. 그들이 돌아가자 병원 커피숍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카리스마 있다. 왕족으로 자라서 그런가 봐.”
임진희가 흘깃 보면서 한국어로 말했다. 아까 무시당했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진혁이 말했다.
“아까 나만 초대받아서 기분 나빴지?”
“엥?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다. 오해하지 마.”
임진희가 손을 휘휘 저었다.
“오히려 초대받으면 큰일이지.”
“그래?”
“미혼의 여성을 식사에 초대한다는 건 예비 부인으로 생각한다는 거라고, 디아타 공주가 그랬거든!”
“아.”
그녀가 핸드폰을 들었다.
“검사 끝났대, 이제 올라가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을 올라가자 VIP 검진 센터가 보였다. 일반 검진 센터와는 입구부터 다르다. 고급 호텔처럼 원목과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병원 같은 느낌이 덜했다.
“진혁이 왔냐?”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진용 분홍색 민소매 상의와 헐렁한 바지를 입은 어머니가 손을 흔들며 반겼다.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항상 진혁이부터 챙기구.”
“너는 아까 인사했잖니. 결과는 뭐라니? 너한테는 얘기해 줬어?”
“이건 검사 결과 나오는 데 2~3일 걸려요. 모레 나랑 같이 들으러 오자.”
진혁이 말했다.
“나도 같이 올게.”
“에이, 바쁜데 올 것 없다. 그냥 다 괜찮을 텐데 뭘.”
“결과는 들어 봐야 알죠! 그걸 알아보려고 검사한 거잖아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요새 진짜 좋은걸. 아 참, 그나저나 여기 병원 좋긴 좋더라. 진희 너 일하던 병원에서 검사하던 거랑 달라. 의사랑 간호사도 친절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어.”
“거긴 국립 병원이고 여긴 재단 병원이잖아요. 당연히 차이 나죠. 직원들 월급부터 단위가 다른데.”
임진희가 옛 직장을 옹호하는 사이에 진혁이 물었다.
“아버지는요?”
“지금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어. 나야 너희들 보려고 나와 있었지.”
임진희가 킥킥 웃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서 자연스럽게 탈의실로 향했다.
“엄마! 엄마야말로 지금 옷 갈아입으셔야죠.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진혁은 바깥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고 말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키우고 있는 애제자(?)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잘 달리고 있겠지?’
무하마드 왕자를 위해 깜짝 선물을 남겨두고 왔다. 그가 아까 극찬했던 고구마 타르트다.
‘한 번 더 먹어봐야 아까 뭘 놓쳤는지 알지.’
진혁은 무하마드에게 같은 음식을 계속해서 제공하지 않았다. 똑같은 방식으로 자극을 반복한다면 그에 익숙해져 버린다.
처음 마라탕을 먹은 사람은 생소하고 복잡한 맛에 감동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아침저녁으로 마라탕을 먹는다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세밀하고도 미묘한 맛의 조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미뢰는 친숙한 자극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무하마드 왕자는 자신이 먹는 메뉴가 얼마나 섬세한 계산과 계획 끝에 결정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루 사이에 두 번까지는 괜찮아. 오히려 이번에 익숙한 고구마의 맛을 골라낼 수 있다면, 미묘한 차이에 더 민감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달리고 난 다음에 깜짝 고구마 타르트가 기다리고 있다면, 내일은 더 열심히 뛸 것이다.
진혁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수석 경호원 카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달리기를 마치고 난 후에 다 같이 고구마 타르트를 드세요.」
답장이 바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쉐프.」
진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며늘아기랑 문자 중이냐? 실실 웃고 그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부부 사이가 좋으면 좋지, 뭘 그래. 그동안 잘 지냈냐? 한 달 동안 뭘 했길래 코빼기도 안 비쳐.」
진혁은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미미와 함께 가족 식사를 하고 난 후 거의 한 달 만이다. 최근 제자 키우기에 흠뻑 빠져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아버지, 바지 단추 안 잠그셨어요.」
「아이고.」
아버지는 황급히 허리춤을 추슬렀다. 진혁은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식품과학자들을 초빙해서 음식의 맛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과학자? 요리사나 미식가들이 아니고?」
「가공식품에 맛을 디자인해서 넣는 사람들이 있어요. 과자라든가 아이스크림, 소시지 같은 맛을 내기 위해서 인공 향과 감미료를 넣죠. 맛의 80%는 향에서 나니까, 향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그래서?」
「단맛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것을 좋아하지만 지나치게 달면 먹기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이 린드버그 박사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할 만한 적절한 단맛을 내기 위해서 설탕을 얼마나 넣으면 될지 연구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답이 있다고 하더냐?」
「인종과 성별에 따라서도 다르고 나이에 따라서도 다르더군요. 같은 라틴계라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 가공 음식에 노출되었는지, 아니면 멕시코에서 자라며 멕시코식 가정식을 먹고 자랐느냐에 따라서 또 다르고요.」
아버지가 흥미를 보였다.
「그건 우리 학생들도 재미있어할 것 같구나.」
진혁은 태연하게 아버지의 오른팔을 잡으며 말했다.
「요즘에도 하루에 열두 시간씩 빵집에서 일하십니까?」
분명히 직원도 늘었고, 아버지가 일하는 시간도 줄었을 터였다.
하지만 보지 않은 사이에 무리했는지 오른팔의 관절과 근육이 상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반죽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부분이다.
아직 건강 검진에는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나, 이것이 계속 쌓이면 오른팔에 통증이 생길 것이 분명하다.
「반죽만 조금 하고 있다. 수업도 있고, 애들이 많이 도와주니까 말이야.」
아버지는 슬쩍 오른팔을 빼려 했지만, 진혁이 단단하게 붙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팔 좀 주물러 드릴게요.”
“갑자기 팔은 왜?”
아버지는 머쓱해 하면서도 팔을 빼지는 않았다. 진혁이 주물러주면 몸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어서다.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거 같아서요.”
진혁은 아예 아버지를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도록 안내했다. 팔부터 시작해서 등, 그리고 어깨와 허리까지 정성 들여 꼼꼼히 추나를 하였다. 두드리고 문지르며 전신의 혈이 풀리도록 신경을 썼다.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이 정도로 무리를 하시다니. 환골탈태로 근골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잘못된 자세로 계속해서 반죽을 하면 몸이 천천히 망가질 수밖에 없어. 이건 습관 자체를 바꿔야 해.’
아버지는 이미 노곤해져서 기분 좋은 앓는 소리를 냈다.
“좋구나아아아.”
“아버지, 반죽하실 때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곁에서 같이 근무하며 밤마다 같은 집에서 살 때는 매일 틈틈이 안마를 해드렸다. 하지만 이렇게 기간을 두고 만날 때마다 긴밀하게 전신을 살피지는 않았다. 진혁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졌다.
‘부모님을 뵐 때 비단 안색만 살피는 게 아니라 근육과 관절도 신경 써서 지켜봐야겠어.’
“아구구구, 시원하다. 어쩌면 이렇게 안마를 잘 하냐. 내가 밖에서 스포츠 마사지도 받아봤는데 이런 느낌이 아니더라고.”
진혁은 아버지의 굳은 어깨를 풀어주며 생각했다.
‘밤마다 소망시에 방문해서 몰래 추나를 하는 편이 나을까?’
그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어머니가 옆으로 다가섰다.
“여보, 생판 남이랑 내 핏줄이랑 어디 같겠어. 아들이 해주는 거니까 좋은 거지.”
임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엄마. 진혁이가 좀 안마를 잘 하긴 해요. 저도 종종 받아봤는데 진짜 다르더라고요. 한 번 받으면 일주일은 쌩쌩해요. 저번에 디아타 공주 결혼식 한다고 여럿이 밤새웠는데, 진혁이가 안마 한 번 해주면 다들 쌩쌩해지더라고요!”
“우리 가족만 그런 게 아니야?”
“만인이 좋아해요. 피로 해소의 마법사라고 불릴 정도였어요. 처음에는 대표이사님한테 안마를 받다니 말도 안 된다고 다들 거절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한 번 받고 나면 효과가 너무 좋으니까, 나중에는 진혁이가 나타날 때마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기 어깨에 손을 가져가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서 있던 애들이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기도 하고요. 얼마나 웃겼는데요.”
“아주 기특하네, 쉐프님들이 아주 좋아했겠어. 세상에 그런 상사가 어디에 있냐. 직원들 어깨를 다 주물러 주는 사장이라니.”
어머니가 임진희와 대화하는 동안 아버지는 숫제 눈을 감고 있었다. 긴장해 있던 표정이 완연히 풀렸다. 그 편안한 표정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슬며시 말했다.
“진혁아, 엄마도 어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