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7화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릅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는 데려오고 싶다는 이야기로군.」
무하마드 왕자의 이마에 주름살이 깊게 팼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데 진혁이 말했다.
「동료가 필요하십니까?」
누군가 후보자를 더 데려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임진혁은 다른 후보를 데려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신감을 얻은 무하마드가 불룩한 배를 쑥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지!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다른 후보가 눈에 차겠어.」
「하하.」
진혁이 싱긋 웃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무하마드가 눈을 번득였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저녁 달리기는 안 한다는 거군!」
「그건 혼자서도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수석 경호원이 대신 봐주기로 했습니다.」
「….」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면서 보디가드들은 이제 진혁을 경계하지 않았다.
다만 엄격한 보안 프로토콜은 계속 유지했다. 진혁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주면 두 명이 한 조인 경호원의 경우 선임자만 먹을 수 있었다. 무조건 같은 음식을 피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뛰는 모습을 녹화해서 보내기로 했으니 자세에도 신경 써주십시오.」
「…알겠네, 그렇다면 야식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오늘까지는 고구마입니다.」
「알았어, 알았어. 아까 타르트가 정말로 맛있었으니 오늘은 참을 수 있네.」
무하마드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운명에 기꺼이 순응했다.
진혁이 등을 돌리고 걸어가려는 찰나 왕자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일은 또 다른 음식이 있었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부드러운 고구마 요리를 잔뜩 먹었으니 다음에는 단단한 고구마로 요리를 해서 먹어도 좋겠어. 고트 치즈도 오랜만에 먹으니 좋더군. 하지만 카망베르도 의외로 잘 어울리-.」
무하마드 왕자는 자신이 무엇을 먹고 싶은지 나름대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 속에는 꽤 좋은 요리 아이디어가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들어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에 잘라줘야 한다. 진혁은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뵙기로 했습니다.」
◈ ◈ ◈
진혁은 이제 더 이상 전철을 타지 않았다. 여유 있게 나온 덕분에 직접 운전해 병원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었다.
“진혁아! 엄마 아빠는 지금 검사받는 중이셔.”
진희가 손을 흔들었다.
화상 회의와 보고서를 통해 매출 보고서는 받아왔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다.
진혁이 말했다.
“무슨 검사?”
“지금은 인지 검사 세트 하고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치매 위험 연령군이라고 해서 영상검사와 인지검사를 포함해 뇌 건강 검사도 풀세트로 돌리고 있거든.”
“아아.”
얼마 전 미미가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을 발견한 후, 진혁은 가족들의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사람의 육체란 기계와는 달라 쓰면 쓰는 만큼 어딘가 문제가 생기고 삐걱거리게 되는 법이다. 환골탈태를 하였고 계속해서 몸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무슨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엄마랑 아빠 건강 검진하신 지도 오래 됐잖아? 사무직이 아니니까. 회사원이라면 1년에 한 번은 받을 텐데 말이야. 두 분이 건강하시긴 한데 슬슬 검진을 받으면 좋을 것 같아. 이왕 하는 거, 내가 다니던 데 말고 서울의 큰 병원에서 하려고 하는데 어때?”
“좋은 생각이네.”
그래서 진희가 말을 꺼냈을 때 진혁은 흔쾌히 동의했다.
“하는 김에 진희 너도 같이 받자.”
“이제는 완전히 너로 정착했구만…, 나는 괜찮아. 아침마다 혈압하고 기초체온도 꼬박꼬박 재고 있거든. 문제 생기면 누가 뭐라고 해도 바로 병원으로 튀어갈 거니까 걱정 마시죠.”
“누가 전직 간호사 아니랄까 봐.”
“그런데 우리만 받는 게 아니라 너도 받아야지? 너 또 몸 안 챙기고 밤새워서 일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요즘 하는 일이 너무 많잖아. 해외 출장도 자주 가고.”
진혁은 일반적인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건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심폐지구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피부 또한 튼튼하고 질기다. 운동선수들보다 훨씬 뛰어난 몸이다.
이제는 어설프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진혁은 이전에 미미와 의논한 대로 대답했다.
“미미 씨가 챙겨줘서 벌써 받았어. 중국에 있는 병원에서 체크했지.”
“아~ 진짜 미미 씨가 있어 줘서 살았다. 너처럼 무리하는 애를 누가 챙기냐. 결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백팔 배 해야 된다, 진짜.”
“….”
“미미 씨가 너 챙겨 준다고 해도 결국 네 건강은 네가 챙겨야 해. 나이 든 사람들은 알아서 자기 건강 잘 챙기고 좋은 것만 골라 먹고 운동도 해. 오히려 젊은 사람들이 무리해서 일만 하다가 몸 망가져서 오는 경우가 많다구. 그러니까 너무 일만 하지 말고 너도 네 몸 잘 챙겨야 돼.”
“알았어, 알았어. 1절만 해.”
그때 했던 대화 내용이 지금도 생생하다. 진희에게 건강 관련 이야기를 꺼내면 끝도 없는 설교가 시작되어서 곤란하다. 임진희는 진혁과 함께 병원 주차장에서 로비를 향해 걸어갔다.
로비에 있는 커피숍 카운터에 선 진희가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너는 아인슈페너 좋아하지?”
“아니,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래.”
“왜?”
“진영이 형이 타준 아인슈페너를 좋아하는 거라서.”
“아.”
임진희는 한 번에 납득했다. 백진영이 만드는 커피는 놀라울 정도로 향기가 풍부하고 산미가 강해,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지금은 같은 가게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길지 않아 자주 마시지 못한다.
그래도 진혁에게 있어 제일 좋은 커피는 진영이 타주는 아인슈페너였다.
때때로 다른 가게에서 주문해서 마셔본 적도 있지만, 원하는 맛과 달랐기에 더 이상 시도하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진혁이 카드를 내밀었으나 임진희가 자연스럽게 계산했다.
“이런 거라도 내가 내게 해 줘.”
“알았어.”
대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커피는 바로 나왔다.
진혁은 흠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커피였으나, 많지 않은 양의 커피 속에 카페인이 듬뿍 들어있었다.
한 입 먼저 마신 임진희가 짧게 평했다.
“흔한 병원 커피네.”
“병원 커피는 뭐가 달라?”
“보통 밤샘 근무자들이나 간병에 지친 가족들이 마시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세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나도 나이트 근무할 때는 꼭 커피 사 들고 올라가서 마셨거든.”
“아아.”
임진희는 시계를 흘깃 보았다.
“우리 여기서 20분은 더 있다가 올라가야 돼.”
진혁이 말했다.
“요즘 레시피 개발한 거 있어? 좀 봐줄까?”
순전히 호의에서 나온 제안이었으나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대표이사님, 지금은 공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냥 가족 만나러 나왔거든요.”
“아, 뭐.”
진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흔쾌히 화제를 바꾸었다.
“이 커피 맛없다.”
“맛 때문에 마시는 게 아니니까.”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임진희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부모님 검사비용 말이야, 내가 보탤게. 이번에 진짜 풀세트 검사 다 돌려서 두 분 검사비만 천만 원 가까이 나오는데, 어떻게 너 혼자 부담해.”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이번에 아파트 사고 싶어서 돈 모으고 있다며?”
“엄마한테 들었어?”
“결혼할 생각은 안 하고 집 사서 나갈 생각 한다고 걱정이 태산이시던데. 지금 오피스텔이 마음에 안 들어?”
임진희가 깔깔 웃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야, 너무 들어서 문제지.”
“응?”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이 네 집이잖아. 여기서 영원히 살 수는 없지. 나도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
진혁이 눈을 깜빡거렸다.
“명의 바꿔 줘?”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야!”
임진희는 순간적으로 커피를 엎지를 뻔했다.
“뭘 달라는 게 아니야. 나도 충분히 벌고 있다고. 네가 나한테 뭘 해줘야 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 정도는 별거 아니야.”
“너한테는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별거야.”
“아니면 오피스텔 명의를 법인으로 돌려서 직원에게 임대해줘도 되고. 그럼 경비 처리돼서 회사 입장에서도 나아질걸.”
진혁이 나름대로 경영자의 입장에서 제안하자 임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너, 어디 가서 그렇게 막 퍼주면 안 된다. 호구 되기 딱 좋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이렇게 유해지는 것은 오로지 가족의 일일 때뿐이다. 임진희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부모님 사실 건강하시니까 이렇게까지 비싼 검사를 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그런데 이번에 내 친구 혜영이네 아버지가 갑자기 조기 치매 진단을 받으셨거든. 그래서 혹시 몰라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셨으면 했어. 괜히 내 불안에서 나온 거니까 사실은 내가 전부 부담하는 게 맞지.”
“내가 더 버니까 더 내는 게 맞지. 지금 넌 돈 쓰면 부담되는데 난 부담이 덜 되니까 내가 내는 거지.”
진혁이 고집을 부리면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한참 동안 온갖 방식으로 설득하려던 임진희가 양손을 들었다.
“아,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난 모른다.”
“오피스텔은 1가구 1주택으로 취급받지 않으니까 명의 넘겨도 될 텐데. 아니면 아예 그 오피스텔을 사도 되고. 시장가에서 적당히 싸게 넘겨 줄게.”
임진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독립심이 강했다.
“아니, 아니, 아니야.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낯익은 인기척이 느껴져 진혁은 고개를 들었다.
‘쟤가 왜 여기 있지.’
「사탕 꽃 정원사!」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아랍 소년이 괴상한 호칭을 부르며 달려왔다. 경호원들이 그 뒤를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다. 멋지게 명품 양복을 차려입고 수염을 기른 오마르 왕자 역시 보였다.
‘라시드였나?’
디아타 공주의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왕자의 막내아들이다. 이 병원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더니, 진료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한국에 들어온다던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무하마드 왕자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지금, 오마르 왕자의 소식은 미미를 통해서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그중에서 오마르 왕자가 막내아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것이란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왕자들의 해외 순방이 공식 일정으로 공유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마르 왕자는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한 것이 분명했다.
「아니, 이게 누군가. 내 딸의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도와준 임진혁 쉐프 아닌가.」
오마르 왕자가 과장된 태도로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호감을 표시하면서도 경계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반갑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임진희도 얼떨결에 함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 아리따운 미녀분은 누구시지?」
오마르 왕자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진혁은 생각했다.
‘무하마드 왕자의 동향에 대해서 파악하려고 한국에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