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25화 (523/656)

제 525화

삶은 고구마는 달콤하다.

감자보다 더 포슬하며, 당근보다 부드럽다. 특유의 단맛이 강해 자기주장이 확실하다.

하지만 생고구마는 단단했다. 당근과는 또 다른 식감이다.

생야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만 먹는 것은 또 다르다.

얇게 썬 생고구마를 과자처럼 씹으며 무하마드가 투덜거렸다.

「이제 슬슬 다른 것들을 먹어도 되지 않겠나?」

「오늘은 그 점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만한 분을 모실 예정입니다.」

「뭐? 누가 온다고?」

「린드버그 박사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미각에 대해서 제대로 된 논문을 쓰는 사람은 그자밖에 없네. 자네, 역시 그냥 페이스트리 셰프라고는 볼 수 없구만. 미각과 후각에 대한 최신 논문까지 전부 읽고 있다니 정말로 대단해」

무하마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진혁은 약간 놀랐다.

‘그 박사가 정말로 유명한 사람이긴 한가보군.’

린드버그 박사는 한 비서가 섭외한 외부인이었다. 그는 미뢰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맛의 설계자’로도 유명했다.

「그자는 가공식품에 가장 훌륭한 맛을 부여하는 걸로 유명하지! 정말로 기쁘군.」

무하마드는 흥겨워하며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지! 공장에서 생산되는 햄을 생각해 보게. 원재료인 육고기를 분쇄하고 압착하면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지. 본래의 질감과 향기를 잃고 하얗고 물렁물렁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단 말일세. 그렇게 만들어진 최종 결과물에 색소를 투여하고, 잃어버린 향기를 부여하는 사람 아닌가. 그자가 디자인한 햄과 소시지는 천연 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본국에 있는 내 식품 공장의 할랄 치킨과 비프 소시지의 향기도 린드버그 박사가 디자인했지.」

「이미 아시는 분이었군요.」

「그렇지만 린드버그 박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네. 그자는 틀어박혀서 일만 받아서 하기로 유명하지 않나? 뭘 약속했지?」

진혁이 빙긋 웃었다.

「그건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          ◈          ◈

그날 저녁 식사는 고구마의 향연이었다.

달콤한 고구마와 셀러리 수프.

고구마를 곁들인 아라비아식 흑후추, 올리브 오일 양파 샐러드.

으깬 고구마와 마요네즈.

고구마 후무스와 검은콩 고구마 캐서롤.

「훈제 모차렐라 치즈와 검은콩, 그리고 아랍식 향신료가 고구마와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린드버그 박사는 키가 작고 안경을 쓴, 외골수처럼 보이는 노인이었다.

백발을 길게 길러 넘겨 묶었는데, 머리카락에 신경을 쓴다기보다는 그저 자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괴짜 과학자처럼 보였던 그는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음식을 하나씩 맛보면서 점차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두 분은 정말로 맛을 아시는 분이로군요. 맛을 정말로 느끼려면 이렇게 식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거나, 텔레비전이나 책 따위를 보며 식사하려고 하면 감각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되죠. 현대인의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은 미각에 있어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습니다. 음식의 시향을 방해하는 꽃이나 청각을 거슬리게 하는 음악, 그리고 시각을 어지럽히는 인테리어. 아무것도 없이 식욕을 증진시키는 적색 계열의 색깔로 장식된 식탁까지 모두 완벽합니다. 맛을 느끼기 위해서 정말로 준비를 많이 하셨군요.」

매일같이 식사를 하는 이 환경이 살풍경하다고 생각해 왔던 무하마드 왕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린드버그 박사가 설명했다.

「식사를 하면서 다른 행동을 한다면, 우리의 미뢰는 그 기능을 잃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보면서 식사를 할 경우 그 음식의 맛을 30~40% 정도밖에 느끼지 못합니다. 위와 장의 소화력 역시 떨어지죠. 소화 불량과 변비를 예방하고 싶다면, 식사를 할 때에는 식사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설교와도 같은 말에 무하마드 왕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 참. 내 가문에서는 그런 일은 없네. 식사를 할 때 감히 다른 짓을 하려고 하다니….」

진혁과 단둘이 있을 때, 또는 경호원들과 함께 있을 때 하는 행동과는 다르다.

무하마드 왕자는 근엄하고 권위적인 왕족의 태도로 일관했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린드버그 박사가 샐러드에 있는 브로콜리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브로콜리의 쓴맛에 민감합니다. 하지만 성인들이 여러 차례 브로콜리를 먹으면, 미뢰는 더 이상 그 쓴맛에 대한 신호를 뇌에 보내지 않게 됩니다. 둔감해지는 거죠. 그러니 미뢰를 민감하게 하려면 혀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맛, 다양한 맛을 자꾸자꾸 지각하게 해줘야 합니다. 맛이 강렬한 가공식품을 끊고, 천연 재료를 다양하게 섭취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모두 무하마드 왕자와 진혁이 하고 있는 것들이다.

무하마드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말일세, 운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되나?」

엉뚱한 질문에 린드버그 박사가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런 연구는 없습니다. 부부 관계를 한 후에 음식을 맛볼 경우에는 향기와 맛이 30~40% 이상 증진된다는 연구 결과는 있는데요. 운동과의 상관관계를 밝힌 연구는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야?」

무하마드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아내들을 불러 올 것 같은 태도다.

진혁이 말했다.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경험 역시 맛에 영향을 끼친다는 소리로군요.」

「맞습니다! 각자의 추억과 경험, 기억이 영향을 끼칩니다. 아까 나왔던 캐서롤 말인데, 저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고구마 캐서롤의 맛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더 맛있게 느껴지지요. 임진혁 셰프님도 추억의 음식이 있으십니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있어서는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된장찌개가 그렇습니다. 다른 데서 먹으면 그 맛이 나지 않지요.」

무하마드 왕자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지.」

그 음식을 통해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다. 패배자가 아니었다. 오마르 녀석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다.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그때의 감미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그 음식을 즐겼다.

「페이스트리 셰프라고 들었는데 이 요리를 전부 직접 하신 겁니까?」

진혁이 빙긋 웃었다.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뿐이고 실제로 만든 것은 다른 셰프입니다. 하지만 지금 나오는 고구마 타르트는 제가 직접 구운 겁니다,」

무하마드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침을 흘렸다.

진혁이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절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는 냅킨으로 서둘러 침을 닦아냈다. 입 안에 침이 너무 많이 있다면 맛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된다.

「기대되는데?」

진혁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접시를 직접 들고나왔다.

구형의 돔을 걷어내자마자 풍겨온 향기는 진하고도 달콤했다.

린드버그 박사가 코를 벌름거렸다.

「고구마 향이 엄청나게 강하군요. 이거 맛이 있을지 걱정될 정도입니다.」

「그렇습니까?」

진혁이 미소지었다.

「그렇죠, 가끔 보면 매우 강렬한 향기를 풍기는 고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이미 향을 전부 날려 버렸기 때문에 막상 고기 자체의 맛은 좋지 않습니다. 이번 고구마 타르트는 어떨까요.」

무하마드 왕자는 임진혁을 흘깃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저 미소처럼 보이겠지만, 왕자는 한 달여간 진혁과 함께 지낸 결과 그의 표정을 비교적 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기분이 상한 것 같은데?’

언뜻 보면 사각형 피자처럼 보였다.

얇은 생지를 겹겹이 쌓아 구워 도톰하니 부풀어 오른 가장자리 안쪽에는, 진한 적포도주빛 소스가 깔려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구마, 그리고 캐러멜라이즈된 양파가 눈에 띄었다.

무하마드 왕자는 진혁이 고구마 타르트를 썰어 접시 위에 얹어 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 와중에도 계속 침을 닦아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하마드 왕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천천히 집중해서 타르트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니 훌륭한 요리사는 선택해야 하는 거지요, 향을 풍부하게 하여 먹는 사람의 식욕을 돋울 것인지 아니면…. 」

반면에 린드버그 박사는 바로 타르트를 집어 들어 한입에 삼켜 버렸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을 뿐이다.

아직 타르트를 입에 넣지 않았던 무하마드가 그 모습을 보고 키득 하고 웃었다.

‘스승이 만든 케이크를 먹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이지.’

최근에 무하마드를 돌봐오던 경호원들도 몇 번 진혁이 만든 음식을 맛보았다.

페드로의 음식을 먹고서 맛있다고 정중하게 칭찬했던 때와는 다르다. 진정 맛있는 음식은 취향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잃게 한다.

그는 ‘맛있다’라는 표현으로 진혁의 음식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전신을 전율케 하는 명작, 영혼을 울리는 맛에 대해서 그저 ‘맛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독에 가깝지 않을까.

무하마드 왕자는 눈을 감고서 입에 타르트를 가까이 가져갔다.

은은한 적포도주의 향, 그리고 포슬하니 보드라운 고구마가 무너지며 쫄깃하고 낯익은 치즈가 뭉클하니 입 안에서 찢어졌다.

도톰한 올리브에 덧붙여 은은하니 달콤한 이 맛 역시 익숙했다.

하지만 그 맛을 사용한 방식은 새롭고도 놀라웠다.

‘크랜베리 소스를 아주 적게 넣었어. 그리고 새콤한 맛을 강조하기 위해 단맛을 사용했는데, 설탕이 아니라 캐러멜라이즈한 양파를 넣은 거야.’

다양하고도 풍요로운 조화는, 새로운 방식의 교향곡을 연상케 했다. 익숙한 악기라고 하더라도 새로운 방식으로 화음을 이루면 생소한 악곡이 된다.

‘고구마와 염소젖 치즈. 거기에 크랜베리와 양파,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조합이야.’

무하마드 왕자는 새삼스럽게 임진혁을 바라보았다.

그가 만나왔던 유명한 요리사는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자기만의 시그니쳐 디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그니쳐 디쉬를 응용하고 개발한, 다양한 방식의 요리를 내놓았다.

하지만 임진혁의 경우에는 그 폭이 무시무시하게 넓었다.

무하마드는 결혼식에서 진혁이 직접 개발한 수백여 종의 요리를 맛보았다.

하지만 이 타르트는 이전에 디아타 공주의 결혼식에서 보았던 음식들과는 또 다른 점이 있었다.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썼지만, 누구라도 접할 수 있는 흔한 재료들이야.’

디아타 공주의 결혼식에서는 최고급 식자재들만을 사용했다.

그래서 무하마드는 내심 진혁이 고급 디저트를 전문으로 설계하는 페이스트리 셰프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타르트는 동네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만 이루어졌다.

흔히 봐 오던 재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배열해, 대조적인 맛을 강조한다.

탱글탱글한 염소젖 치즈는 보통 토마토와 함께 카프레제 샐러드로 내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구운 고구마와도 잘 어울렸다.

린드버그 박사는 옆에서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직까지 미각의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무하마드 왕자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분이 미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모르지만 미식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부족해.’

진혁이 만든 음식을 맛보고 침묵하는 것은 아주 흔한 증상이다.

가끔 기절하거나 폭포수처럼 침을 쏟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장시간 생각에 잠기는 것 또한 드물지 않았다.

서버가 식후 와인을 내놓을 무렵, 린드버그 박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치즈 맛이 좀 다른데….」

진혁이 설명해 주었다.

「일부러 염소젖 치즈를 썼습니다. 우유로 만든 치즈보다 더 탱글하고 담백하며 맛이 부드럽죠.」

「그래… 그랬단 말이지」

린드버그가 눈을 깜빡였다.

입가에 침이 주륵 흘러내렸다.

무하마드 왕자는 여유 있게 냅킨으로 자신의 입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임진혁 셰프의 실력이 이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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