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24화 (522/656)

제 524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맛을 느껴 보면 비교할 수 있지요.」

「우유 푸딩을 먹어도 된다는 거지?」

무하마드 왕자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진혁이 제지했다.

「유제품과 가공식품은 미뢰를 더 둔하게 합니다. 특히 우유는 5대 맛 중 지방이지요. 그러니 이 허브의 맛을 더 강하게 느끼려고 할 때 우유 푸딩을 먹는 건 적절하지 못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무하마드는 실망하거나 풀이 죽지 않았다. 오히려 씨익 웃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다른 자극 없이 따뜻한 물과 함께 마시란 이야기군. 우유를 함께 마셨을 때 내가 차이를 느낄 만한 허브가 아니라는 이야기지. 할라피뇨처럼 맵고 따가우며 고통스러운 건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최근에 구별하기 제일 어려웠던 그….」

무하마드가 중얼중얼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미 진혁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진혁은 묵묵히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희미하게 달콤한 향이 나는데.」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무하마드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신나서 외쳤다.

「스테비아! 이 허브는 스테비아가 분명해.」

「맞습니다.」

스테비아.

학명이 스테비아 리바우디아나(Stevia rebaudiana)인 이 식물은 본디 남미산이다. 정제된 설탕보다 200배 이상 달콤한 허브로, 건강을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서 당 대체재로 사용되고 있다.

달콤한 허브는 스테비아 말고도 있지만, 기껏해야 설탕의 40배 수준이다.

「이제 이 정도는 눈감고도 맞출 수 있지.」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다음에는 눈을 감고 맞춰 보죠.」

진혁이 제자의 성장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한 달 전, 무하마드는 밭에 심어진 허브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쪽파와 잔디를 구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로즈마리와 라벤더도 똑같다고 생각했다. 두 가지가 가까이 심겨 있으면 더 구별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얇게 썬 스테비아 잎까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농담도 못 하나?!」

무하마드가 정색했다.

물론 이때까지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진혁은 무하마드 왕자가 먹는 음식을 전부 통제했다.

첫 사흘간은 임진혁이 직접 고른 생채소에 닭국물이 전부였다. 따뜻한 국물에는 전혀 간이 되어 있지 않았다. 무하마드 왕자는 라마단 기간과도 유사하다며 이 절식 메뉴는 그럭저럭 견뎠다. 그리고 조금씩 소금과 후추 등 조미료를 덧붙여나갔다.

하지만 가공식품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그는 지난 한 달간 가공식품을 아예 입에 대지 못했다. 소시지나 햄, 통조림 식품들을 포함해 모든 장기보관 식품들이 식탁에서 사라져버렸다.

지켜야 하는 것이 식이 뿐이라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혁이 원한 것은 식이 뿐만이 아니었다. 생활 습관 전체를 바꾸어야 했다. 내키는 대로 자고 일어나던 무하마드 왕자는 10대 시절 이후 처음으로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아니,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미각이랑 무슨 관계가 있나?」

진혁은 세상에 이런 어리석은 자가 있나 하는 듯한 눈빛으로 무하마드를 바라보며 설명해주었다.

「밤낮의 변화 또한 자극의 일부입니다. 규칙적이고 통제된 생활을 통해 신체가….」

술과 담배 또한 금지였다. 다행히 그는 담배를 하지 않았으나 종종 자기 전에 와인 한 잔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이 한 달간 그 습관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놀랍게도 진혁은 설탕과 밀가루가 포함된 제과류도 금지했다.

「당분간은 안됩니다.」

「빵 만드는 사람이 왜 빵을 먹지 말라는 건가?!」

무하마드는 진혁이 시키는 대로 하면 맛있는 것을 잔뜩 먹게 될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풀과 약초만 씹는 생활을 겪고 나니 괴로워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묵묵히 일주일가량 자연식을 견뎠다.

하지만 8일째 되는 날에도 아침 식사로 통째로 손질된 당근만 달랑 나왔다.

그는 참다못해 마침내 진혁에게 항의했다.

「이건 너무하지 않나? 초콜릿이 무슨 맛인지도 잊어버리겠다고! 하다못해 일상적인 식사는 하게 해주게나. 매일 같은 똑같은 풀떼기만 내놓는다니, 너무하지 않나? 이제는 당근만 봐도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라고!」

보통 왕족이자 상사, 아버지인 무하마드가 화를 내면 다른 사람들은 움찔하며 말을 들어주곤 했다. 하지만 진혁은 달랐다. 이 정도 시점에 이 정도 항의는 당연히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처럼 태연하게 응대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손질하지 않은 총을 갖고 나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공식품을 많이 먹으면 미각이 둔해집니다. 미각을 예민하게 하려면 자극을 줄이고 조금씩 천연 식품만 먹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하지만 난 맛있는 걸 먹고 싶어! 사람이 숨을 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거야.」

진혁이 말했다.

「그럼 포기하시지요.」

「!」

무하마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돌아간다면 페드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원하는 메뉴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을 것이며, 스스로 만족하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잠들어도 상관없으며, 지금 체육선수처럼 가혹한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

저녁마다 1초씩 시간을 늘리며 새까만 방 속에 들어가 있지 않아도 좋다.

「도대체 그 암실은 왜 들어가야 하는 건가. 그 안에 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그렇기 때문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여러 차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으며 무하마드 왕자는 문 앞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진혁은 붙잡지도 않고 더 이상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오는 기업인들, 그리고 투자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는가!

이것이 왕족에 대한 예우인가.

이런 식으로 보낼 것이라면 애초에 계약서는 왜 만들었는가.

이 시설은 어째서 만들었나.

무엇 때문에 아침마다 함께 달렸는가.

허무함과 억울함, 배신감.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무하마드는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나.」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는 그에게 진혁이 제안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식사만 하시고 떠나시죠.」

원래 무하마드였다면 보통 이만큼 화를 났을 땐 그대로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그때 그 초콜릿 케이크의 맛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진혁이 내놓은 것은 평범해 보이는 주홍빛 빵 조각이었다. 단순한 정육면체 모양의 빵을 들여다보며 무하마드가 말했다.

「고작 이 정도인지 실망스럽군.」

「드셔 보십시오.」

그는 케이크를 한 수저 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 살짝 풍겼다. 이전까지 생채소만 먹던 혀에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닿자 저절로 침샘에서 타액이 흘렀다. 입안에 넘칠 만큼 침이 고였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따뜻하고 포슬포슬하면서도 혀를 부드럽게 감싸주는 감촉.

공기층이 풍부하면서도 단단한 질감.

힘차게 케이크를 씹으며 무하마드는 말을 잃었다.

너무나도 맛있었다.

이전에 먹었던 케이크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또 달랐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향기와 단단하면서도 사르르 녹아내리는 질감 그리고 쌉쌀한 뒷맛까지, 어느 하나도 빠지는 것이 없었다. 입안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만 같다. 조화로우면서도 황홀한 맛이다.

「음?.」

그리 크지 않던 케이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분노는 이미 간데없이 녹아 사라졌다.

무하마드 왕자가 말했다.

「낯설기도 하면서도 묘하게 익숙해, 이건….」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고, 잘 먹었냐고 인사치레를 하지도 않았다.

그제야 무하마드는 깨달았다.

「이 케이크에 들어있는 당근, 한두 종류가 아니군.」

진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음미하며 왕자가 이어 말했다.

「설탕 당근과 베이비 당근, 그리고 블랙 당근, 퍼플 드래곤… 텀벨리나, 태양 당근….」

한두 종류가 아니다. 이 케이크에는 며칠간 맛본 당근들이 전부 들어있었다. 짙은 보랏빛 당근부터 흔히 보는 주홍빛 당근, 그리고 작고 부드러워 다이어트 음식으로 흔히 먹는 아기 당근까지. 흔치 않은 모든 맛이 전부 들어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다양한 맛이 서로 어울려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설탕과 꿀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크림이나 달걀도 빠졌다. 그런데도 부드럽고 유연하며 복합적인 맛이 새로이 소록소록 발견된다.

이런 당근 케이크는 여태까지 먹어본 적이 없었다.

진혁이 가볍게 말했다.

「딥 퍼플 하이브리드와 만화경은 빠뜨리셨군요.」

「아니야! 막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도 계속 떠나고 싶으십니까?」

진혁이 물었다.

무하마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혁이 왜 여태까지 설명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이 요리사는 천재였다. 정말로 고금에 다시 없을 천재로, 아무도 보지 못할 그림을 그리는 자였다. 미각이 예민하다 자부했던 무하마드도 며칠간 당근만을 먹으며 그 맛을 기억해두지 않았다면 이 케이크를 이렇게 즐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눈가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아…!」

제일 짙고 강한 맛이 아직도 입안에 살짝 남아있었다. 퍼플 드래곤 당근이다. 이전에 이 당근을 사용한 태국요리를 맛본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당근만을 사용해, 맛을 한없이 끌어올리는 기획은 아니었다.

「지금 조금만 더 견디면, 미각이 충분히 예민해질 겁니다. 보청기를 통해 간신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청각장애인에게 오케스트라부터 들려준다면 과연 이해하기 쉬울까요? 처음에는 가장 단순한 것들을 조각조각 느끼고 이해해 나가야 합니다. 아직 더 좋아질 수 있습니다.」

「….」

모두 진혁이 말한 대로였다. 설탕과 탄산음료 그리고 모든 가공식품을 끊자 입맛이 변했다.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아.」

말이 된 것 같았다. 아무 장식도 하지 않고 소금을 치지도 않았다. 잘라서 물에 깨끗하게 씻은 생당근을 우적우적 씻으며 무하마드가 한탄했다.

「하도 이것만 먹다 보니 당근이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져.」

「맞습니다.」

진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본래대로라면 그저 질감만 느껴졌을 일반 주홍 당근에서도 은은한 단맛이 났다.

「그것 때문에 며칠간 당근만 먹으라고 시킨 건가?」

「이제 당근은 졸업했으니 셀러리를 먹어 보죠.」

「….」

◈          ◈          ◈

한 달은 너무나도 짧은 기간이었다.

당근은 비교적 맛이 강한 편이었다.

셀러리의 씁쓸한 맛 뒤에 숨은 상큼한 식감 역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진혁처럼 잘게 썰린 허브 조각을 보기만 하고도 무슨 잎인지 맞출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다시 시간이 지나고 진혁이 말했다.

「이제 셀러리도 괜찮아졌으니 이번에는 고구마를 먹어봅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