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521화 (519/656)

제 521화

「고문이라니요. 감각 정화 훈련입니다.」

「이 암실 속에서 보내는 24시간 말이에요, 일반인이라면 못 버텨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습니까?」

「예, 저도 할아버지가 그 훈련을 하게 한 적이 있어요. 약 30초 정도로 시작해서 점차 5분 정도까지 늘렸어요.」

「음.」

「모든 감각이 다 차단된다는 것만으로도 극심한 공포를 느껴 심장이 멎을 수도 있어요. 무하마드 왕자 같은 경우는 나이도 많고 비만이랍니다. 군사 훈련 같은 것도 받은 적이 없고요.」

무하마드 왕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미미가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칠 정도였다.

「음.」

「죽일 셈이 아니라면 강도를 낮추세요.」

「그렇습니까.」

진혁이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이도 많고 몸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던데. 늙어 죽기 전에 미각을 끌어올리려면 좀 더 노력해야 할 텐데.」

「낡은 고무줄을 한껏 잡아당기면 끊어질 뿐이겠지요.」

「그럼 좀 더 강도를 조정해야겠군.」

진혁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미미가 말했다.

「이런 걸 같이 하고 싶어 하시는 거라면 오히려 잘 됐어요. 오마르 왕자에게는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음?」

「함께 사업하는 거라면 모를까, 이런 식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거라면 아주 좋아할걸요? 자기 대신 무하마드의 콧대를 눌러 준다고 기뻐할 거예요. 제가 이야기해 둘게요.」

「그러고 보면 애초에 오마르 왕자가 그 정도 금액을 투자해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던 이유가 무하마드 왕자를 견제해서였지.」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유명하니까요. 정치적으로도 다른 노선을 띄고 있어요.」

왕의 장남과 차남, 두 사람과 동시에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진혁은 미미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부류의 외교적이고 미묘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미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렇게 해 준다면 고맙겠습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미미가 방긋 웃었다.

◈          ◈          ◈

무하마드 왕자는 정말로 약속을 지켰다. 투자 사업 때문에 당분간 한국에 머무르겠다며 성인이 된 아들 둘, 그리고 경호원 열다섯 명, 비서진 서른 명 전부를 데리고 왔다.

아들과 부하들이 머물 수 있게 이태원의 고급 빌라 주택을 단지째 구매하기도 했다.

「아랍의 큰손 왕자가 한국의 주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른 오전, 미미는 진혁이 출근하고 난 후 아침 식탁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꼭 읽어야 하는 기사들은 비서가 체크해서 올린다.

그중에서도 진혁과 관련된 경제지를 넘기며 미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뭘 하러 오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왕 비서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회장님은 알고 계시지요.」

「무하마드 왕자의 투자 매니저는 미스터 파르빈이었지? 적당히 오를만한 매물 몇 가지를 권해 주세요. 떨어질 만한 것도 절반 섞어주고요.」

오마르 왕자를 의식한 조치가 분명하다. 왕 비서가 충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편 진혁은 오전 일찍 설레는 마음으로 이태원의 한 건물에 도착했다.

1주일 동안 소음과 빛을 전부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무리였다.

대신 한 비서가 수배해준 이 건물의 2층과 3층을 쓰기로 했다. 이 건물의 3층은 본래 일반인들이 암흑체험을 하기 위해 지어졌다. 시각장애인 협회에서 일반인들이나 자원봉사자들에게 ‘시각장애’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지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시각과 청각을 차단할 수 있는 설비가 되어 있었다. 한 비서는 시가보다 후한 금액으로 이 시설을 인수했다고 보고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큰 돈을 받은 시각장애인 협회는 좀 더 교통이 편한 곳으로 이사를 했다.

2층은 방 탈출 게임장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칸칸이 놓인 방에는 저마다 수수께끼를 풀 수 있도록 내부 인테리어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진혁은 직접 지시해 위생적이지 못한 가구들을 철거하고, 냉장고와 주방을 설치하도록 했다.

화웅제과제빵기계공업의 사람들이 나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일주일이 지나버렸을지도 모른다.

무하마드 왕자가 오기 전, 진혁은 주변을 점검했다.

새벽에 직접 배송받은 식재료들은 신선하고 향긋했다. 깨끗하게 세척해둔 상앗빛 캐슈너트와 알알이 봉긋한 레드퀴노아, 갓 뜯어온 겨자잎과 근대, 소렐 잎.

자줏빛 케일 잎과 꼬리긴 루꼴라 잎새 등 다양한 녹색 채소들을 준비했다.

알알이 단단한 사과와 배, 귤과 오렌지. 딸기와 포도, 바나나는 물론이며 복숭아와 감귤까지 갖추었다.

아랍에서 흔히 쓰는 향신료들은 따로 요청해서 구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사용할 것은 단 하나다.

임진혁은 뿌리째 손질되어 있는 파릇파릇한 쑥을 집어 들었다.

“제대로 된 쑥을 맛본다면 이후에는 다른 것들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생각보다 성취가 느릴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해보기 전에 무하마드 왕자가 오늘 이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짐작할 수 없다.

‘긍정적인 쪽으로 내 기대에 응해줬으면 좋겠는데.’

왕자가 오기 10분 전.

진혁은 꼼꼼하게 내부를 직접 점검하였다. 암실이라곤 하나 복도 비상문 빛이 흐릿하게 새어 들어오는 문제가 있었다.

‘향만 맡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지. 그러면 시각적인 정보를 차단한 상태로 시작해야 하는데 말이야.’

쌀알 한 톨만큼의 빛도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어제 별도로 지시해 노출되어 있던 일부 전선도 다시 검게 칠하도록 했다. 조그마한 방 안은 불을 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진혁은 흡족한 마음으로 암실을 나섰다.

◈          ◈          ◈

무하마드 왕자는 전날 서울에 도착했다.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전용 마사지사가 따라와 전신을 노곤하게 하는 마사지도 해 주었다.

일부러 아로마 향도 피하도록 지시했고, 좋아하는 향료 목욕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후각을 더 예민하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를 하여 진혁이 초청한 이태원의 건물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미가 리무진을 보내도록 제안했으나, 보안상의 문제로 무하마드 왕자는 자신이 차편을 마련하겠다며 거절했다.

막상 건물 앞에 도착한 차량을 보자 한 비서가 혀를 내둘렀다.

“배로 실어왔나 보군요.”

“저 차를 아나?”

“한정판으로 주문받아서 열 대밖에 생산하지 않은 고급형 방탄 차량입니다. 자동찻값만 10억이 넘을 텐데요, 아마 오마르 왕자는 저 차가 없을 겁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 나잇대 애들이 하는 짓이 다 비슷하지. 예전에는 옥으로 된 장신구나 도자기, 서예가의 글씨, 화초 같은 거로 경쟁했는데 말이야. 요즘은 자동차가 흔한가 봐.”

먼저 수행원들이 차에서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무하마드 왕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많이 기다렸나.」

무하마드를 꼭 닮은 청년 둘 역시 따라 내렸다.

「내 아들들이네. 카림과 사파위야.」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시오.」

「안녕하시오.」

두 아들은 아버지의 태도에 살짝 당황했다.

평소 거만하고 누구라도 낮추어 보는 아버지가 매우 정중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거의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처럼 정중한 태도였다.

타국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임진혁이라는 젊은 청년은 자신들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동양인이었다.

아들 둘이 아랍어로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사업가에게 이렇게 대할만한 분이 아니신데 말이야.」

진혁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무하마드는 심지어 엘리베이터가 없는데도 불평하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이런 건물 따위를 올라가야 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건물에서 만나도록 장소를 바꾸었을 텐데, 이번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버지 왕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높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두 아들은 천천히 아버지 뒤를 따랐다.

진혁은 일찌감치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 역할을 하도록 개조한 거실에는 미미가 직접 수배한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왕자의 취향에도 맞으면서도 현대적인 마호가니 식탁과 의자였다.

한 비서가 미지근한 물을 네 잔 내왔다.

어떤 음료를 원하는지 묻지도 않고서 물부터 내오는 모습을 보고 장남 카림이 무어라 말하려 했다.

「이-.」

하지만 무하마드 왕자가 아들의 말을 제지하고서 말했다.

「계약서는 전부 읽어보았네.」

「여기에 오셨다는 것은 동의하셨다는 뜻이지요? 아드님 두 분도 함께 하십니까?」

진혁이 물었다. 무하마드가 대답했다.

「내 아들들 중 제일 날 닮은 아이들이지. 미각도, 후각도 예민한 편이야.」

진혁이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띠었다.

「두 분도 함께 하시겠습니까.」

「흔쾌히 할 걸세.」

카림과 사파위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권위가 하늘같이 여겨지는 무슬림 집안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이자 직장 상사인 무하마드가 하는 말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어려워도 이 둘은 잘 할 수 있을 걸세.」

그는 잠시 아들들과 비서들을 내보내고 단둘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무하마드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은 진혁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1초도 어둠 속에 혼자 있지 못하겠다고요?」

「이 사실은 비밀로 해 주게.」

무하마드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어렸을 적 극단적인 테러리스트 집단에 납치당했던 적이 있네. 그때 며칠간 우물 속에 갇혀 있다가 구출된 적이 있어.」

「그렇습니까.」

「솔직히 자네가 이것을 알고서 이 기획서를 내밀었나 고민했네. 하지만 그 사실은 당시 나를 돌보았던 유모와 아바마마밖에 모르고 계셔. 그러니 나를 납치했던 테러리스트가 아니면 알 수는 없네.」

「그렇게 오해하실 뻔했군요.」

「당시 테러리스트들 모두 붙잡혀 그들에게 적법하며 마땅한 처분을 받았네.」

표현은 ‘적법하고 마땅한 처분’이지만 눈이 번들거리는 것을 봐서는 최소한 사형이 분명했다. 진혁은 무하마드가 한순간 비친 살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혹여 그들 중 하나가 죽기 전에 소식이라도 흘렸나 하고 사흘간 밤낮으로 조사를 했지. 하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어.」

무하마드가 간곡하게 말했다.

「어둠 속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네. 하지만 내 두 아들은 군사 훈련을 받았고, 신체적으로도 아주 건강하네. 후각과 미각 역시 출중하지. 아들들에게 미각 훈련을 시키고, 내게도 그 음식을 맛보여 주게.」

「….」

「혹시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나? 내가 아주 좋은 요트를 갖고 있는데, 가끔 놀러 오면 좋을 거야.」

진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실망했다는 듯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무하마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축구는 어때? 내가 영국에 축구 구단을 하나 소유하고 있는데, 매년 VIP 티켓을 보내 주겠네. 내가 아주 열심히 키우고 있는 구단인데 말이야. 아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아니면 구단의 소유권 자체를 일부….」

「무하마드 왕자님.」

진혁이 말했다.

「그 두 명의 아드님들도 그 결혼식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특별한 맛을 느끼고서 저를 찾아온 것은 왕자님 한 분뿐이고요.」

「….」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들들은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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