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9화
다른 케이크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단해 보이던 케이크가 입안에 넣는 순간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달콤하되 쌉싸름하며 동시에 청량하다.
「크흐읍.」
존재하지 않는 더듬이가 전신에 곤두서는 것처럼 전율이 스쳤다.
식감은 분명히 아이스크림 같지만, 맛은 달랐다. 유지방을 듬뿍 넣은 아이스크림이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일을 얼려 달게 한 소르베 같은 식감도 아니다. 온도 역시 절묘하게 맞춰져 있었다. 차갑거나 뜨겁지도 않으며 그저 한없이 부드럽다.
눈앞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감각의 향연에 푹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너무나 맛있어서 이 감각이 ‘맛’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할 수가 없을 정도다. 한참 동안에나 그는 감각 속에서 헤엄쳤다.
왕자가 황홀경에 빠져있는 동안 페드로는 고용주인 왕자를 유심히 살폈다.
「하으으.」
그는 왕자가 갑자기 동공이 풀리며 신음을 흘리는 것을 보고서 다급히 달려갔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아니. 괜찮네. 날 내버려 둬.」
페드로가 어깨를 흔들었기 때문에 무하마드는 의식을 되찾았다. 우주 속을 체험하는 것과도 같은 황홀경에서 깨어나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페드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그랬나. 딱 좋은 때였는데.」
「약물이라도 투입한 줄 알았습니다.」
무하마드는 페드로에게 손짓했다.
「나가 있게.」
그는 쩔쩔매며 말했다.
「바로 파스타를 가져올까요?」
「아니, 당분간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좋겠어. 지금 이 감각을 소중히 여기고 싶네.」
무하마드 왕자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본 페드로가 당황하며 말했다.
「면도, 소스도 모두 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됐다니까!」
무하마드는 페드로를 밀어내다시피 해서 쫓아냈다. 그는 짙은 눈썹을 추켜올리고 동공을 번들거리며 진혁에게 달려들 듯이 물었다.
「얼마면 되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생각을 잘못했다.
임진혁에게 페드로에게 가르침을 구하라고 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페드로에게 진혁을 꼬드겨 케이크 굽는 법을 배워오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식감을 개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새로이 케이크를 구워냈을까.
솔직히 말해서 눈앞에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는 어린 데다가 경력도 짧았다. 페드로가 30년 이상 이 업계에서 일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식감의 케이크 앞에서 누가 경력을 따질 수 있겠는가!
세상에 천재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 자일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빵과 과자를 구워온 제과제빵사가 있다고 해도 이 사람에게는 당하지 못할 거야.’
무하마드는 많은 제과점들이 몰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 어떠한 빵이나 과자로 유명해지고 성공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더 이상 새로운 맛을 개발하려 하지 않는다. 기존에 팔리던 제일 맛있는 빵을 반복해서 복제하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출을 얻는 데에 만족한다.
초창기에 무하마드는 왜 어떤 가게들이 그런 식으로 망가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페드로와 다른 요리사들을 고용해 높은 연봉을 주면서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적절한 계기가 필요했다. 수조 속에 미꾸라지만 넣어 운반하려 하면 청어들은 피로에 지쳐 죽어 버린다. 하지만 메기를 넣는다면 메기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미꾸라지들은 싱싱한 상태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무하마드는 자신이 메기의 역할이 되기를 자청했다. 페드로와 다른 열여덟 명의 요리사들은 계절마다 하나씩 새로운 요리를 만든다.
그 요리로 무하마드의 입맛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해고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수없이 많은 음식들을 만들고 다시 바치는 과정에서 기존 음식을 변주한 것만 자꾸 내놓는 이들이 있었다.
무하마드는 그들에게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따져 물었다.
「얼마든지 훌륭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 않나. 왜 이렇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나?」
「이것보다 전의 것이 더 맛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만두고 나간 요리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새로이 개발한 맛있는 음식이 이전에 만들었던 것보다 못한 평가를 받으면 좌절한다. 서너 번 평가에서 D를 받으면 절망해서 그대로 무너져버린다.
‘이 남자는 진짜다.’
임진혁이라는 젊은 페이스트리 쉐프의 경력은 마음에 쏙 들었다. 제과제빵 경력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디저트 서바이벌 쇼라는 프로그램 속에서 미숙하던 디자인 감각을 배워가며 색감을 익혔고 새로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너그러운 마음씨까지 보여주었다. 능력이 부족한데 대뜸 타르트 가게를 열어 놓고 빚더미에 허덕이는 이에게 당장 타르트 굽는 방법만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운동 방법까지 교육했다.
‘이게 다 이미지일 수 있어.’
연출된 방송 프로그램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일지도 모른다.
특별히 한국어 통역을 고용해 단지 자신만을 위한 자막을 붙이면서까지, 무하마드는 임진혁을 면밀히 관찰했다.
어린 진혁이 올린 성과를 보면 나이와 경력, 출신에 비해 너무나도 눈부셔서 마치 만들어진 스타 같았다.
황 그룹의 사위로 맞아들이기 위해 누군가 돈과 시간을 투자해 따로 가르쳤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무하마드는 여러 가지를 더 조사해본 끝에 이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20대 초반 이전의 임진혁은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중국의 거대 기업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
굳이 이렇게 평범한 외국의 가난한 남자에게 돈과 시간을 퍼부어 유명하게 만들고 성공을 향해 달려갈 수 있게 할 이유가 없다. 황 그룹의 무남독녀 정도라면 얼마든지 다른 재벌가의 후계자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데 말이다. 아랍에도 유명했던 중국의 검은 손, 황태명이 무엇을 좋게 보아 손녀딸에게 임진혁을 소개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드라마 팬과 배우로 팬 미팅에서 처음 만난 데다가, 이후에 관계를 진전시켜 간 것도 미미 쪽이었다.
‘처음엔 그냥 운 좋게 신데렐라가 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도통 알 수가 없네.’
임진혁에 대해서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점점 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도 황 그룹의 회장과 결혼한 후에는 공식적인 인터뷰와 서면 발표, 그리고 칭찬과 감탄이 가득한 수상 소식밖에 알 수가 없었다.
밥 앤더슨과 친구 관계로 함께 갤러리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제과제빵 대회에서 최연소로 두 차례나 우승하였다.
디아타 공주의 결혼식을 맡았다.
푸드 블록이라는 기상천외한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다과와 식사가 장식품처럼 숨어있는 결혼식장을 개발해냈고 이것을 더욱더 발전시켜 테마파크의 시설로 만든다고 한다.
‘보통 요리사들 중 요리에 정말로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만 하느라 다른 건 전혀 못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야. 당장 페드로만 해도 숫자에 재능이 없어 자기 가게 냈다가 말아먹고 나에게 오지 않았나. 그런데 이 임진혁이라는 자는 아내 덕분인지 아니면 경영에도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건지 사업적으로도 승승장구하고 있어.’
창의력과 개성,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맛의 길이 확실하다.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능력이 있으며 그 요리를 잘 파는 경영자의 재능 또한 갖추고 있다.
피가 끓는 젊은 사내답게 모험하며 도전하는 인생을 살아왔고, 도전이 있을 때 절대 피하지 않았다.
「연봉 25억… 이 정도면 어떻겠나?」
그러니 자신이 요구하는 것도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옆에서 페드로가 헛 하고 숨을 삼키며 놀라워했다.
연 25억은 지금 페드로가 받는 것과 동일한 금액이다.
하지만 페드로는 그 금액을 받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노력해오며 실력을 증명해왔다.
하지만 페드로의 얼굴이 새하얗게 된 것 따위는 무하마드의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가, 괜찮지 않나?」
진혁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맛이 어떠셨습니까.」
「아주 폭신하고 부드러웠지. 이런 식감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없네. 그리고 우유 맛이 강한 걸 보면 이건 스위스산 초콜릿일 거야, 그렇지?」
무하마드는 미각이 아주 예민했다. 그래서 초콜릿 맛만 보아도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영국의 고급 초콜릿은 코코아 버터 함량이 유난히 높다. 그렇기에 은은한 부드러운 맛이 강하다. 프랑스의 초콜릿은 다른 나라보다 카카오 가루를 넣는 경우가 많아 씁쓰름한 맛이 강하며, 벨기에 초콜릿에는 유크림이 많이 들어 보들보들하다.
「스위스산 초콜릿은 아니지만 유크림은 많이 들어있습니다.」
무하마드가 군침을 삼켰다.
「…자네가 직접 만들었군? 이 비율은 전에 맛본 적이 없어.」
「비슷합니다.」
이번에 푸드 블록을 개발하면서 고용한 쇼콜라티에에게 따로 주문을 넣어 만들었다. 그가 스위스 출신이기는 하니 비슷하게 맞춘 셈이다.
이 정도까지 따라온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진혁이 팔짱을 끼었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다른 재료가 무엇이 들어있는지 맞춰 보시겠습니까.」
「보통 다른 요리사들은 뭐가 들었는지 설명해 주던데 말이야?」
진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실수를 저질렀을 때 부왕이 쳐다보던 것과도 같은 깊은 눈이었다.
얼굴은 젊다. 하나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모습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본 것만 같은 눈빛은 결코 젊지 않았다. 최소한 20대 중반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스위스산 초콜릿으로 추정되는 초콜릿 외에 무하마드 왕자님이 어떤 맛을 느끼셨는지 듣고 싶군요.」
「조금 더 먹어야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는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
진혁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려 했다. 방금 들은 거액의 연봉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돈이 너무 적은가?!」
진혁이 일순 불쌍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무하마드 왕자를 바라보았다.
「돈 문제가 아닙니다.」
여태까지는 돈이나 명예를 흔들어 보이면 누구라도 스카웃해 올 수 있었다.
‘이런! 내가 애초에 잘못 생각했어.’
페드로는 평범한 중산층 출신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5성급 호텔 쉐프까지 올라왔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진혁에게는 뛰어난 사업적인 재능과 그를 믿어주고 뒷받침해주는 든든한 투자자까지 있었다. 당장 지금의 푸드 블록 사업만 해도 그렇다.
디아타의 결혼식에 소요된 1,000억 이상의 비용.
진혁이 자신의 크루들을 포함해 외주 고용한 페이스트리 쉐프들에게 준 인건비만 100억 이상이 들었다.
테마파크 사업을 하면서 오가는 금전의 액수 역시 단위가 다르다.
페이스트리 쉐프일 뿐만 아니라 사업가다.
「잠깐! 내가 잘못했네. 사과하지.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네.」
진혁이 물었다.
「정말로 초콜릿의 맛과 푹신한 질감밖에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아주 미미한 사프란의 향 그리고 거기에 가려진 냄새가 있었어, 잘 모르겠네.」
가려진 냄새가 있다고 할 때는 한순간 눈빛이 반짝였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고 하는 순간, 진혁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너에게 실망했다는 아버지의 미소와도 유사했다.
무하마드는 저절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니,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