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7화
「난 뇌압이 높다고 비행기도 못 타는데 말이야! 이곳저곳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면서 즐기고 있다니!」
진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보면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밥 앤더슨이 무엇을 원하는지 떠올려 보았다.
「새로운 펜로즈 삼각형 케이크는 따로 구워 드리고 가지요.」
「오! 그러면 됐지.」
결국, 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건 하나뿐이다. 절정의 고수들이 다만 한 수 가르쳐주기를 원하며 달려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혁은 이 상황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말했다.
「비용은 예전처럼 아내에게 선물할 수 있는 그림으로 청구하죠.」
「자네. 내 그림 한 장이 어느 정도 가격인지는 알고 있지…?」
「제 케이크도 이제 값이 저렴하지는 않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말이야.」
앤더슨이 씩 웃었다.
「그러잖아도 지난번에 아내분이 관심 있어 하던 그림이 있었어. 내가 자네 이름으로 선물을 보내지.」
◈ ◈ ◈
진혁은 이 왕자를 만나는 것에 그리 기대를 품지 않았다. 일단 첫인상부터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 맛을 느꼈다면 나에게 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을 테니 말이야.’
무하마드 왕자가 경매에서 그림을 낙찰받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아예 접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왕자를 위한 펜로즈 삼각형 케이크를 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진혁이 신경 쓴 것은 단 하나였다.
‘할랄 인증을 받은 유제품을 사용해야 하지.’
이미 아랍인들을 위한 결혼 축제를 준비하면서 어떤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지, 어떤 재료들이 할랄 인증을 받았는지 꿰뚫게 되었다.
오마르 왕자는 <해와 달>의 아랍 쪽 지점을 낸다면 전력으로 지원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테마파크를 위해 푸드 블록을 꾸준히 생산하고 공급해야 하는 상황이라 일단 보류해두기로 했다.
쇠고기와 닭고기 육수, 달걀과 우유 모두 철저하게 할랄 인증을 받은 것이어야 하며, 당연히 돼지고기는 사용할 수 없다.
초콜릿과 코코아 가루 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벨로나산 최고급 초콜릿을 사용해 케이크를 구우며 진혁은 마지막 힌트를 더 넣었다.
‘이 자가 나의 지음(知音)일 수 있을까?’
왕족이건 거지건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훌륭한 미각을 갖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눈치채고 그걸 표현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과연 이걸 알아볼까….’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로 던지는 무인도 표류자의 마음이 이럴까.
진혁은 흥겨운 마음으로 케이크 작업을 했다.
「후~우.」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시간상 영상통화를 하면서 작업하던 중이었다. 사업상 문제로 중국으로 먼저 귀국한 미미는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
「진혁 씨, 즐거워 보이네요.」
「음.」
「아시다시피 무하마드 왕자는 오마르 왕자와 라이벌 관계에요. 한 번의 식사는 상관없지만, 이후 가까이 지내실 거라면 두 사람 중에서 선택하셔야 해요.」
짧지만 묵직한 조언이었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등을 돌린 채 초콜릿 케이크를 반죽하던 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렌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미 씨는 어떻습니까?」
「저는 상관없어요.」
「오마르 왕자와 사업상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까? 뭔가 필요한 게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건 이미 얻었어요.」
「그렇군요.」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건 오랜만에 봐요. 무하마드 왕자와의 식사를 그렇게 좋아하실 줄은 몰랐네요.」
「한 번이면 됩니다.」
「무하마드 왕자는 평판이 나쁜 인물은 아니에요.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가져야 하는 사람이지요. 이번에 진혁 씨를 채용하겠다고 정식으로 스카웃 제안도 여러 차례 보내 왔어요. 한 비서가 서너 번 정도 받았을 거예요.」
「그 얘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로열 페이스트리 쉐프로 채용한다고 하면서 연봉 10억을 부르던걸요?」
진혁이 짧게 평했다.
「적군요.」
미미가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죠? 그 정도 금액으로 내 남편을 사려고 하다니! 저는 무하마드 왕자보다는 오마르 왕자 쪽이 마음에 든답니다. 하지만 둘 중 누구라도 크게 상관없으니 원하는 대로 선택하세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후 진혁은 케이크를 잘 포장해 냉장고에 넣었다.
◈ ◈ ◈
그리고 하루가 훌쩍 지났다.
수요일 점심 날.
진혁의 숙소 앞에 리무진이 한 대 도착했다.
무하마드 왕자가 보낸 차량이었다.
「임진혁 쉐프님이시지요? 무하마드 왕자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존슨이라고 합니다.」
운전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한 태도로 진혁을 대했다. 과잉 친절이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혁은 이 정도의 대우에 황송해한다거나 겸연쩍어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모시며 무릎 꿇고 경배했던 경험이 있기에 이 정도는 우스울 뿐이다.
「곧 도착합니다.」
무하마드 왕자의 뉴욕 자택은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였다.
보안이 철저한 로비를 거쳐 펜트하우스 전용 엘리베이터에 탑승해야 했다. 적갈색 마호가니 목재로 장식된 엘리베이터와 붉은 비단 카펫이 깔린 복도는 마치 호화스러운 아랍의 궁전을 연상케 했다.
미국 한복판에 숨어 있는 작은 이슬람 궁전 같은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다른 수행원이 안내해 주었다.
세 개의 문을 거쳐 실내로 안내받은 후에야 붉은색 터번과 화려한 예복을 걸친 무하마드 왕자가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어서 오시게나.」
그는 화려하게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킁킁거렸다. 누가 봐도 사업가로 보이는 오마르 왕자와는 외양부터 달랐다. 왕족다운 품위가 없어 보였다. 화려한 터번과 비단옷을 걸쳤을 뿐 묘하게 동네 부동산 아저씨 같은 친근감이 있었다.
진혁은 빙긋 웃으며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여기 있습니다.」
「오, 이게 그 유명한 펜로즈 삼각형 케이크인가. 드디어 나도 맛을 볼 수 있겠는데.」
「접시와 칼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좋아, 좋아. 페드로! 여기 준비를 해 줘.」
깨끗하고 하얀 대리석 주방. 고가의 장비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고급 오븐도, 새하얀 냉장고도 모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어 모델 하우스의 샘플 같기만 했다.
실제 거주하며 생활한다기보다 잘 만든 모형처럼 보였다.
「먼저 페드로가 자랑하는 이탈리안 런치부터 맛보지.」
진혁은 눈을 깜빡였다. 밥 앤더슨이 말했던 저녁 식사는 분명히 첼시 갤러리와 밥 앤더슨이 함께 찾아낸 멋진 샌프란시스코 스타일의 파스타 집이었다.
하지만 이 왕자는 운전사를 보내어 행선지를 변경하는 방법으로 진혁을 이쪽으로 데려왔다.
「식당과 갤러리 측에는 양해를 구했는데, 자네만 괜찮다고 하면 상관없다고 하더군. 그 파스타 집의 음식이 궁금하다면 지금이라도 그쪽으로 가도 괜찮아.」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쪽이 더 맛있다고 자신하신다면 한 번 먹어 보지요.」
‘권력자가 제멋대로인 건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하군. 하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설령 누군가 지금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협박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에게는 얼마든지 이곳에서 빠져나갈 만한 능력이 있었다.
「지난번에 갤러리에서 준비한 디너는 나쁘지 않았지만 말이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고. 최고의 파스타를 먹을 수 있는데 굳이 두 번째를 먹을 필요는 없지 않나.」
쉐프 페드로는 먼저 에피타이저를 내놓았다. 탱글탱글하니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는 언뜻 보기에도 희고 깨끗했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를 갈아서 뿌렸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살짝 곁에 뿌렸다. 싱그러운 붉은색이 선명하게 절반 썰어놓은 토마토와 소복이 담긴 루꼴라 잎까지 올려놓았을 뿐이다. 흔한 샐러드지만 올려놓은 모양새가 깔끔하니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요리였다.
이렇게 재료의 가짓수가 적고 요리하기가 쉬운 요리야말로 쉐프의 솜씨를 가장 알기 쉽다. 예쁘게 담아놓은 모양새만 봐도 이 사람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옆에서 자신 있게 지켜서 있는 페드로를 흘끔 보며 진혁은 치즈와 루꼴라 잎, 그리고 토마토를 함께 포크로 찍었다.
「과연 칭찬할만하군요.」
식재료는 아주 좋았다.
진혁이 푸드 블록을 만들 때 사용했던 토마토와 유사한 품종인데 더 신선했다. 루꼴라 잎도 생기가 차르르 흐르는 것이 식사 직전에 갓 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곳에서 직접 재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옥상에 온실이라도 있나 보군.’
진혁은 외부에서 구매하는 식재료를 믿지 못해 스스로 밭을 가꾸는 요리사들을 몇 알았다. 어쩌면 이자도 비슷한 타입일지 모른다. 치즈는 진혁이 푸드 블록에 사용했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킬로그램당 가격이 고기보다 더 나가는 최상급 물소젖 치즈다.
하지만 이 샐러드에서 제일 뛰어난 점은 재료의 신선함이 아니었다. 몇 방울 뿌린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그리고 토마토와 치즈의 조화. 셋이 이루는 맛의 조화가 아주 뛰어났다. 조금만 더 뿌리면 과했을 것이고 덜 뿌렸다면 모자랐을 것인데, 훌륭하게 중용을 지켰다.
「맛있군요.」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페드로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이것 봐라?’
무하마드가 손짓했다.
「페드로의 음식을 먹어 보면 이제 다른 곳 파스타는 먹지 못하게 될 거야. 샐러드도 맛있지만 파스타는 더 맛있고, 함께 곁들여 나오는 부르스케타도 아주 환상적이지.」
부르스케타(Bruschetta)는 둥글거나 각진 빵으로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식전 요리다. 올리브유나 마늘, 소금으로 양념한 후 구워낸다. 토마토소스나 모차렐라 치즈, 닭고기나 소고기 등을 얹어 파니니처럼 구워 먹기도 한다. 그렇지만 파스타와 함께 내놓는다는 걸 보면 별도의 소스를 얹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마늘 빵이라고 부른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굴 일이었던가.’
페이스트리 쉐프 앞에서 다른 쉐프가 만든 빵을 칭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실력을 자랑하자 조금 우스울 정도였다.
「그렇습니까.」
진혁은 느긋하게 와인 잔을 기울였다. 천장에 매달린 LED 조명이 피처럼 붉은 적포도주에 비추어 은빛 점이 한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빵이라면 제가 구운 편이 더 맛있을 겁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하마드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정말로 자신 있나?」
성급하게 움직이는 통에 은수저와 포크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페드로의 샐러드를 맛보고 나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대담해, 하지만 그 자존심만큼 실력이 뛰어날지 궁금한데.」
페드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부르스케타 접시를 내왔다. 그 역시 자신감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나를 위해 일하면 페드로에게서 직접 요리를 배울 수도 있다네.」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귀한 기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이런 식으로 다양한 쉐프들을 고용했으리라.
진혁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일반적인 디너 순서와는 다릅니다만.」
「음?」
「제 케이크를 먼저 드셔 보시는 것도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