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1화
「…예산 낭비야. 일주일 동안을 위해서 300여 명의 인부에게 겨울옷과 장갑, 부츠에 모자. 흐아아. 그걸 다 어디서 수급해서 어떻게 가져와.」
진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 비서, 할 수 있나? 안되면 미….」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한 비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느비에브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그 미 단어가 뭔지 궁금하네. 그 말만 나오면 비서들이 다 태도가 변한다고.」
진혁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 ◈ ◈
한 비서는 추위에 대비한 의복 일체를 신발과 장갑, 모자를 포함해 섭외하는 데에 성공했다. 임시 고용된 인부들은 서늘한 기온에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이며 일했다. 군가에 가까운 씩씩한 노래를 틀며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돌아다니며 인부들을 격려했다.
「네! 그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쪽에 좀 더 올려주세요!」
「신경 써 주세요, 조심히 조심히!」
그동안 진혁은 야외 정원을 조성하는 데에 힘썼다.
그는 슈가 크래프트 식물들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미학전문가와 정원사의 조언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한 대로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꽃의 정원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정원을 원했다.
신부의 고향인 아라비아.
사막에서 주로 피는 꽃들과 이곳 카리브해의 섬들에 자생하는 다양한 꽃과 식물 군상들은 현실에서라면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 꽃들을 전부 재현하여 정원에 창조해냈다.
그가 직접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거대한 놀이공원만큼 넓은 공간에 진혁이 혼자서 꽃과 나무를 만들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진혁은 능력 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고용하여 저마다 꽃과 나무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통과한 식물들만을 정원에 심었다.
정원의 흙처럼 보이는 카카오와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에도 신경을 썼다. 얇은 랩에 감싸여 있는 이 케이크 역시 하나씩 하나씩 집어서 먹을 수 있는 크기다.
하지만 이 정원의 진정한 주인공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들이었다.
마지팬 공예를 통해 만들어진 장미들은 언뜻 보면 실제 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놀랄 정도로 크기가 컸다.
인디언 분홍색의 모로코 장미는 사람 주먹만큼 거대했다.
우아하게 피어난 붉은 꽃 선인장은 인간의 키만큼 높이 서 있었다.
이러한 크기의 차이는 진혁이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정원을 채우고 싶었다.
“그냥 크게 만들지.”
“….”
자잘한 것을 많이 만드는 것과 큰 것을 조금 만드는 것.
두 가지 모두에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진혁은 비밀 서약서를 쓰게 하고서 물엿을 다량 생산하여 공급하였다. 그 결과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꽃과 잎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만들어낸 큼지막한 꽃과 나무들은 보기에도 아주 아름다웠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선명한 파란 장미꽃, 오닉스처럼 새카만 초콜릿 장미.
화사하게 핀 보랏빛 튤립과 무지갯빛 백합.
오렌지 향이 풍기는 캐틀리야 오키드에 아기자기한 꽃술을 길게 뻗은 접힌 꽃잎 히비스커스.
이름도 모를 크고 작은 꽃들이 가득하니 피어있는 모습은 꽃의 여신이 축복을 내린 것처럼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곳은 폐허 같았다.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전쟁터에 나온 병사처럼 필사적으로 줄기에 이파리를 꽂고 꽃잎을 하나씩 붙여갔다.
“여기 작약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어요!”
“이쪽 뿌리에 좀 더 살을 붙이지.”
“앗, 진혁 쉐프님! 언제 오셨어요!
진혁은 새벽 어시장처럼 분주한 꽃밭 이곳저곳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글라디올러스 꽃잎이 완전히 찌그러져 버렸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이 특제 물엿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진혁은 누군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현장에 나타나 상황을 해결해 주었다. 필요한 순간에 번쩍번쩍 나타나는 모습이 홍길동 같기도 하고 전우치 같기도 했다.
「슈퍼히어로 영화 주인공처럼 신출귀몰하네요.」
상황실에서 카메라를 조정하던 앨리슨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벌써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역시 이 정도 되어야 천재 쉐프라고 하는 건가?」
촬영 감독도 한마디 했다.
「주방의 헤드 쉐프들은 어디서 무슨 문제가 일어날지 전부 파악하고 지휘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지금도 그런 건가요?」
오디오 감독이 말했다. 앨리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원래 페이스트리 주방은 좁잖아요? 아무리 넓은 호텔 주방이라고 해도 손님들 있는 데보다 넓진 않잖아요. 홀이 중요하고. 서 있으면 주방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반죽이 서툰지 빵을 태우는지 알 수 있잖아. 그런데 운동장만큼 큰 이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아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그러니까 저 나이에 세계 최정상급 페이스트리 쉐프인 거 아니겠어?」
「그러게, 보통 일은 아니지.」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서는 협회 관계자가 시작 단계부터 참관해야 한다. 협회에서 파견되어 와서 이 놀라운 건축 현장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조사원이 말했다.
「이 건축 현장은… 가장 거대하고 호화로운 케이크에만 올라갈 만한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요?」
「가장 사치스러운 결혼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일단 저 두 개의 모스크부터 말이에요.」
앨리슨이 설명했다.
「아, 저건 이유가 있어요. 아랍 쪽은 남자 결혼식과 여자 결혼식을 따로 한대요. 그래서 정원도 공간이 구분되어 있잖아요.」
조사원이 눈을 크게 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식을 따로 한다구요?」
「네,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 ◈ ◈
“인간을 갈아내면 어떻게든 할 수 있구나.”
며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하다시피 한 임진희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진혁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이길 수 없었다.
“집중력과 잠재력을 발휘한 경험은 다음 단계의 벽을 깨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일월신교의 신도들이라면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애썼을 귀한 조언이다. 하지만 임진희는 진혁의 말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차라리 죽여라, 죽여. 나 한 시간만 자고 싶어.”
“결혼식 보고 싶다며?”
“그러니까 한 시간만 잔다는 거지!”
“좀 더 자도 될 거야. 밤 10시에 시작하니까.”
진혁이 당부했다.
“신부의 결혼식 쪽에서 문제가 생겼는데 해결할 수 없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어, 알았어. 꼭 알아서 할게.”
임진희는 이미 진혁의 중국식 결혼식을 겪어 보았다. 그래서 결혼식 문화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서 몰랐던 것들을 여러 가지 새로 알게 되었다.
“그래도 신랑이랑 신부가 결혼식을 따로 하는 건 역시 이상해.”
역시 잠이 모자란 마리오가 졸면서 말했다.
“남자 여자 다 따로 모아놓은 것부터 이미 틀렸다고요. 어쩐지 결혼을 맹세하는 꽃 아치 같은 게 하나도 없고 중간에 괴상하게 높은 벽이 있다니. 결혼식이라기보다 총각파티에 가까운 느낌이라구요. 시간도 그렇고.”
이 섬은 인근의 다른 섬들보다는 작았다.
작다고는 해도 서울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다. 대략 300㎢ 정도다.
냉동 창고까지 지을만한 여유는 없었기에 배가 선창에 정박하는 즉시 인부들이 매달려 트럭으로 짐을 실어날랐다. 숫제 무역항처럼 수많은 상자들이 오갔던 선창이지만 결혼식 당일은 조용했다. 와인색 벨벳 주단이 깔리고 꽃으로 장식된 선창에는 배와 헬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손님이 아니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기 연주자들은 전부 부른 것처럼 보였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든 현악대부터 트럭째 피아노를 싣고 온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대다수는 붉은색 술과 흰색 리본이 묶인 전통 관악기를 들고 온 연주자들이었다.
여성 전용 결혼식장이자 동시에 신부의 대기실 역할을 하는 우측 모스크.
진희는 최종 점검을 위해 모스크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벽에 박혀있는 눈부신 보석들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오우오아아아아아.”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붉고 푸르게 반짝이는 화려한 보석들은 전부 설탕을 틀에 넣어 찍어낸 것들이다. 하지만 천장에 박혀있는 주먹만 한 크기의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 에메랄드와 루비는 진짜처럼 완성도가 높았다. 크기가 커서 더 가짜처럼 보일 수 있는 슈가젬들은 천장 쪽에, 그리고 작고 자잘한 보석들은 벽과 창문에 배치했다.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시간.
투명한 설탕 유리에 색을 넣어 입힌 스테인드글라스는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이것도 저것도 다 설탕으로 만든 거잖아. 따로 있을 때도 예뻤지만 붙여 놓으니까 더 이쁘다.”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자, 그럼! 이쪽에는 헐겁거나 빠지는 데가 없는지 봐주세요.」
「알겠습니다!」
진혁은 그 시간에 정원과 남성용 결혼식장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새벽 시간, 해가 뜰 무렵이었다.
아직 시간은 오전 9시경.
결혼식이 시작되려면 오후 10시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부와 그 가족들은 오전에 미리 도착했다. 우아한 결혼식장에서 함께 사진을 찍으며 담소를 즐기기 위해서다.
순금으로 자수를 놓은 자줏빛 비단 의상은 꼬리가 길어 질질 끌렸다. 우아한 우윳빛 베일을 걷어 얼굴을 드러낸 신부는 활기차게 말했다.
「진희 쉐프! 아름다운 결혼식장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는 임진혁이라는 걸출한 페이스트리 쉐프가 다 했지요. 아, 아름다우신 공주님의 결혼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실제 왕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다. 진희는 대뜸 대답했다가 예의를 차리는 말을 덧붙였다. 마이 무하바드 빈 라시드 알 막툼이 생긋 웃었다.
「혹시 태권도 하세요?」
아랍식 억양이 전혀 없는 깨끗한 영어였다. 진희는 어조보다 내용에 놀라서 반문했다.
「네?」
「저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꾸준히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에 가서 배우기도 했답니다.」
「진짜요? 저는 어렸을 때 도장에 한 번 가 보고 안 갔어요. 대단하시네요! 아랍에서도 태권도를 하는지 몰랐어요.」
「아슬아슬하게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기회를 놓쳤지만,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여기 저의 첫째 어머니, 그리고 둘째어머니와 셋째어머니세요. 여기는 신랑의 큰어머니와 둘째어머니….」
진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신부의 여자 가족들과 친구만이 아니라 신랑의 여자 가족들도 여성 결혼식장으로 와야 하는구나.’
「어머니라도 친아들의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네요?」
「어머, 당연하지요. 아버지들도 딸들의 결혼식장에 들어올 수 없어요.」
「….」
‘이건 좀 문화 충격인데.’
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안내해드릴 사항이 있어요. 신부님! 그리고 어머님들! 결혼식장의 벽과 식탁, 그리고 테이블에 있는 모든 장식과 가구들은 드셔도 되는 것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