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0화
첫 한 주 동안 제출한 151개의 맛 디자인 중 진혁의 높디높은 기준을 통과한 것은 서른 개도 채 안 되었다.
그것도 그나마 많은 편이었다.
마리오는 호언장담한 대로 삼백 개를 제출했는데 열두 개가 통과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평범한 마데이라 케이크랑 리치 후르츠 케이크 같은 걸 배율만 다르게 해서 잔뜩 낸 거야? 양으로 승부하지 말라고. 맛있는 걸 내놓으란 말이야. 네가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잖아.”
“이 정도 많이 만들면 그중에 진짜 맛있는 게 몇 개는 섞여 있을 줄 알았지!”
진혁은 종류보다 질을 선택했다.
정말로 맛있는 블록들만 고르고 골라서 남겼다. 미미와 진혁을 포함한 미식가 여섯 명이 시식해서 만족스러워한 음식들만을 남겼다.
마리오나 루이스, 진희 등이 제출한 케이크 블록 중에서 사용할 것들은 나름대로 개선해서 취했다.
그 결과 대략 550여 개에 달하는 종류의 케이크 블록을 디자인하게 되었다.
어느 것 하나도 맛으로는 빠지지 않았다.
올리브와 로즈메리 등 허브를 이용한 초콜릿은 물론이며 그 외에도 다양한 케이크가 있었다.
사프란과 오렌지 등 어울리는 향신료를 사용한 케이크.
아니스의 경질 치즈를 사용한 콜드 애피타이저.
토마토와 양고기 미니 파이.
블랙커런트와 아몬드 푸딩.
무화과와 호두 비스킷.
세계 각지의 허브, 그리고 견과류나 과일들.
민트 잎사귀 하나까지 빠지지 않고 전부 최상급의 것을 사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선하고 좋은 상태의 상품을 진혁이 직접 점검해 공장으로 들여보냈다.
“이 농장에서 재배하는 허브는 정말로 질이 좋은데?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을 정도야.”
“그럼 따로 연락해서 이후에도 납품을 받도록 하죠.”
이전에는 한국의 농장에서만 재료를 받아다가 썼다. 항공 운송을 하면서 추가적으로 나가는 비용도 부담스러웠다. 믿을만한 한국의 농장주들과 사람 대 사람으로 계약을 맺어, 신선한 재료를 최우선으로 공급받았다. 하지만 사프란 등 국내에서 재배하기 어려운 향신료는 물론이며 아랍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다양한 허브를 사용하며 재료 풀을 바꾸었다.
젤로스 사의 랑비에는 프랑스 본사에서 최고급 밀가루를 공수해주었다.
「임진혁 쉐프님이 원하신다면 제가 특별히 현지 농장에서 직수입한 최상급 밀가루 샘플을 드리죠. 지난번에 주로 쓰셨던 35번은 물론이고, 135번까지 전부 있습니다.」
「얼마나 있습니까?」
「예? 어, 얼마나라면 어느 정도를 말합니까? 10kg가량 샘플이라면 제가 개인적으로 당장 수배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톤 단위로 말입니까? 1, 2톤 정도입니까?」
「넘버 별로 다르지만 총 3톤 정도는 필요합니다.」
개인이 주문하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이다. 랑비에가 입을 딱 벌렸다.
「앞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많은 양이 필요합니까? 언제까지 필요하십니까?」
「한 달 내로 절반, 그리고 다음 한 달 내로 나머지 반이 필요합니다.」
랑비에는 입을 딱 벌렸다.
「하느님 맙소사! 그 정도 밀가루라면 창고에 있는 것까지 꺼내와야겠군요. 올해 갓 도정한 신선한 밀이 아니라도 괜찮습니까? 그 정도라면 제가 어떻게든 섭외해 오겠습니다.」
「당연히 갓 도정한 햇밀을 찾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다른 업체에 맡겨도 상관없거든요.」
랑비에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업계에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어딘가의 큰손이 갑자기 최상급 재료들을 모으고 있다고…!! 설마 그 사람이 임진혁 쉐프님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혹시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계시는지 제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진혁이 싱긋 웃었다.
「갓 도정한 햇밀을 가져오실 수 있다면 말이지요. 계약서와 비밀 서약서에 사인하실 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식자재를 수급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장 먹을 빵과 케이크라면 국내 생산 농작물이 좋지. 하지만 최고의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산지에서 나는 최상의 재료들이 필요해.”
필요한 것은 프랑스산 신선한 최상급 밀가루만이 아니었다. 호텔 측의 커넥션을 이용해 충분한 양의 이탈리아산 밀과 씨알 굵은 토마토를 구했다.
“호박은 원래 멕시코 남동부가 원산지야. 그쪽에서 제일 신선한 호박을 구했어.”
“가지는 인도산이 좋아. 5-6센티미터 정도에 단단하고 맛이 좋으니까 말이야.”
“아스파라거스는 캘리포니아산으로 부탁해!”
호박과 가지를 비롯한 다양한 채소와 채소들은 각 원산지에서 항공을 이용해 운송되었다.
“철갑상어 알이 진짜 비싸네.”
제일 맛있다고들 하는 천연 벨루가 캐비어의 경우 1kg에 천만 원이 훌쩍 넘는다. 진혁은 이 호화로운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세 종류의 케이크를 만들어냈다. 러시아산 벨루가 캐비어를 600kg가량 구입하는 데에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캐비어 치즈 케이크, 그리고 캐비어 마요네즈 케이크.”
마리오가 입맛을 다셨다.
“캐비어를 곁들인 에그 타르트가 제일 맛있어 보여.”
“탐내지 마라. 이건 시식도 금지야.”
“아, 진짜 맛있어 보인다.”
진혁은 그밖에도 희귀한 재료들을 다량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한 비서가 경매를 통해서 구입해온 이탈리아산 블랙 트러플은 1kg에 2억을 호가했다.
“송로버섯을 이렇게 아낌없이 쓰는 건 범죄야.”
임진희는 블랙 트러플을 아낌없이 숭덩숭덩 썰어내는 진혁의 손길을 보며 한탄했다.
“이걸 진짜 아까워서 어떻게 쓰냐고.”
“맞아, 맞아. 그냥 오일만 써서 향을 내도 되는데 말이야. 이걸로는 초콜릿 우유 크림 케이크를 만든다고 했지?”
“송로버섯의 산미가 강하고 강렬한 향은 초콜릿의 맛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그러니 우유 크림처럼 담백하고 은은한 맛과 함께 해 보려고 했어.”
“하지만 화이트 트러플은 초콜릿 케이크로 한다며. 그 지독할 만큼 강한 향에 초콜릿 맛이 완전히 묻히지 않겠어?”
“화이트 트러플 초콜릿 케이크 안쪽에는 아주 농밀한 다크 초콜릿을 넣었어. 향긋한 초콜릿 그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을 낼 거야.”
마리오가 입맛을 다셨다.
“거기 들어가는 가나쉬 글레이즈는 내가 직접 만들어도 돼?”
“응.”
“시식도 하게 해 줄 거지?”
“그건 안 돼.”
“왜!”
“하나만 먹을 거 아니잖아.”
“….”
마리오가 다짐했다.
“한입만 먹어볼게. 진짜 딱 한 입만.”
“너 일하는 거 봐서.”
귀한 재료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어보려고 탐내는 동료들도 있었다.
진혁은 귀한 재료들은 전부 직접 만졌다.
하지만 제비집과 송로버섯, 철갑상어 알과 식용 금박, 푸아그라 등 귀한 재료를 제외하고서는 전부 ‘공장’으로 보냈다.
‘공장’에서는 따로 고용된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블록을 만들어 포장했다. 말이 공장이지 사실은 거대한 컨테이너 임시주방에 가깝다.
진혁은 중간 중간에 공장에 들러 제작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살폈다.
“아스파라거스는 신선하게 데쳐 주세요!”
“잠깐, 잠깐. 구울 때 12분은 넘지 않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혁이 없을 때에는 루이스가 현장을 총괄했다.
동생이 일하는 회사에서 얼떨결에 같이 일하게 된 그는 잠까지 줄여가며 매일 공장에 머물렀다.
레시피가 바뀌지 않도록, 그리고 신선한 상급 재료들이 제대로 보관되는지 확인해야 했다.
물론 블록을 만들기 전에 전체적인 토대 설계가 선행되었다. 조각가 출신으로 건축가이자 페이스트리 쉐프인 주느비에브 아잠을 초빙하여 도움을 받았다.
「세계에서 제일 커다란, 먹을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겠다고? 그것도 웨딩 컨셉으로?! 당연히 나도 참여하겠어요.」
그녀는 프랑스와 미국의 국제 제과제빵 대회에서 두 번이나 만났지만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진혁에게 흔쾌하게 도움을 주었다.
주느비에브는 진혁이 설계한 건물이 실제적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틀을 짰을 뿐만 아니라, 이미 디자인된 블록들이 어디에 가면 좋을지도 방향을 잡아 주었다.
“모스크는 가능한 오래 세워 두고 싶은 거지? 그러면 유통기한이 긴 초콜릿 바나 스니커즈, 쌀과자 같은 유형의 블록을 이쪽에 짜 넣을 수 있도록 설계하자.”
맛과 향기를 고려하여 그녀가 틀을 짜준 대로 최종적인 생산 개수를 정하고 공장에 전달하면서 정신없이 두 달이 흘렀다.
20여 만개 이상의 케이크 블록들이 속속들이 생산되어 급속 냉동 컨테이너로 들어가고 마지막 한 달도 보름이 훌쩍 지났다.
3개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신생아는 눈을 뜨고 옹알이를 시작하고, 신입사원은 갓 훈련이 끝나고 혼자서 새 일을 맡아 할 무렵이다.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는 3개월이라는 시간.
하지만 진혁과 ‘해와 달’의 크루들에게 3개월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진혁조차 잠을 줄여가며 일해야 했고 다른 이들은 더할 나위 없었다. 결국, 모자란 디자인은 알음알음 공모하기도 하여 육아휴직 중이던 유키코도 팔십여 개의 디자인을 추가로 제출했다.
두 달과 3주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드디어 결혼식 일주일 전이 되었다.
컨테이너들은 배에 실려 카리브해의 작은 섬으로 옮겨진 지 오래다.
결혼식장이 될 장소는 바로 카리브해의 작은 섬이었다.
사막화되어 있던 섬 전체는 이미 깨끗하게 정비되었고 심지어 비와 우박, 눈과 날짐승들을 막기 위한 유리 돔의 건설도 끝났다.
이 건설 비용에도 막대한 양의 돈이 소요되었다.
설탕 유리가 아닌 글라스 돔으로 만들어진 이 안은 건축이 시작되기 전에 철저하게 소독했다. 주느비에브의 도움을 받아 현대적인 환기와 공기순환 그리고 방충 시스템을 갖추었다.
「이렇게 빡세게 해도 눈먼 벌레 한 마리쯤 들어올 법도 한데, 여기는 터가 좋은가 봐. 날씨도 더운데 말이야.」
진혁은 이 결혼식장 전체에는 바퀴벌레나 쥐는커녕, 파리 한 마리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진을 쳤다.
최소한 결혼식이 치러지는 6일간은 개미 한 마리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벽 설치는 전부 끝났어. 벽에 블록 올리는 작업은 현지인을 쓴다고 했지? 코드별로 맞춰서 올려야 할 텐데」
유리 돔과 기본적인 틀이 될 벽들, 그리고 손님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과 휴게 공간들의 틀은 이미 짜놓았다.
하지만 일주일간 이 빈 벽에 초콜릿 블록을 채워야 했다. 인부들이 창고 역할을 하는 배에서부터 짐을 선적할 때부터 주느비에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돔 실내의 온도가 너무 높아. 지금 23도 정도인가? 초콜릿이나 다른 케이크 블록들이 녹아버리면 맛이 변할 텐데.」
진희도 걱정을 덧붙였다.
「생각보다 온도가 너무 금방 올라가. 천장이 뚫린 유리 돔은 예쁘지만 여기 진짜 덥긴 덥다. 이러다간 정원에 조경할 설탕공예 꽃과 식물들도 위험해」
진혁이 흔쾌히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주일간 내부 온도를 영하로 낮추자. 그러면 되지.」
「사람들이 일을 할 수가 없을 거야. 특히나 이 사람들은 사막에서 온 사람들이잖아? 추위에는 더 약할걸.」
진혁이 간단하게 해결했다.
「방한 장비를 입히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