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8화
진혁은 오마르 왕자 본인을 만나 상담을 했다. 다행히 그가 중국에 들를 일정이 있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미미가 언급했던 것보다 더 큰 금액을 불렀다.
「내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금액은 투자하고 싶네.」
「…!」
한화로 1,000억원에 달하는 예산.
그리고 3개월이라는 기간.
그가 디자인에 대해서 물었다.
「떠오르는 모양이 있나?」
「이런 게 있습니다.」
오마르는 기뻐하며 말했다.
「좋아! 아주 훌륭해, 기대하겠네.」
◈ ◈ ◈
상담을 마친 후 한국으로 귀국한 진혁은 <해와 달>의 페이스트리 쉐프들을 불러들였다.
‘어떻게 하면 더 돈을 많이 쓸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최고급 밀가루와 크림, 그리고 비정제 설탕을 써도 몇천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핸드메이드 최상급 초콜릿을 톤 단위로 구매해도 억 단위에 불과하다.
“영국 왕실의 로얄 케이크가 있잖아. 그 선례를 따르자. 비싼 거 잔뜩 올리면 되잖아.”
진희가 의견을 냈다.
캐비어와 금을 올려 만든 왕실의 로얄 웨딩 케이크.
왕자와 여배우의 결혼식 때 만들어졌던 케이크라면 진혁이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그 정도면 45억 정도밖에 안 돼.”
“와~! 그 돈이면 서울에 아파트가 몇 채냐고.”
“이 정도로 금액 차이가 나면 이제 돈이 돈으로 안 보이네.”
여태까지는 훌륭한 재료를 사용해 값을 낮추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손님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손님이 위장에 넣을 수 있는 케이크의 양에도 한계가 있다.
브라이언이 심각하게 말했다.
“진혁, 그냥 보석을 올리는 게 어때? 케이크 만들고 난 다음에 보석을 다시 수거할 수도 있으니까 나쁜 일은 아니지. 뭐, 경비가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하기는 하겠지만 말이야.”
크나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임진혁의 원칙을 알고 있었다.
“너는 케이크에 먹을 수 없는 걸 올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 정도 금액을 쓰려면 귀금속과 보석류를 올리는 게 제일 빠를 거야.”
진혁이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자료 중 한 장을 가리켰다.
황금빛과 은색, 흰색으로 장식된 36층짜리 케이크였다.
“이 영국의 로얄 웨딩 케이크만 봐도 케이크에 사용된 모든 재료가 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이 실제처럼 만들어놓은 꽃은 전부 장식이고.”
진희는 비서진이 준비해 놓았던 자료를 팔랑팔랑 넘겼다.
“서른다섯 명의 페이스트리 쉐프가 함께 만들었다고 했지? 이건 원형 케이크에 저마다 퐁당을 씌우고 층층이 쌓아 올렸어.”
“와, 높이가 6미터라. 이걸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만도 고생이겠다.”
35여 명의 페이스트리 쉐프와 수많은 보조가 3개월에 걸쳐서 케이크를 만들었다. 완성된 후에는 케이크를 실을 수 있는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8대의 차량에 나누어 식장으로 옮겨야 했다.
당연히 비닐 포장되어 냉장 트럭에 케이크를 싣는 과정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 서류를 보며 진희가 혀를 내둘렀다.
“애초에 만들 때부터 어떻게 옮길지도 계획을 세워야겠다. 어느 시점에서 물류랑 유통 쪽 전문가도 합류해야겠어.”
이후 옮겨진 케이크를 조립하는 데만도 12명이 8시간 이상 시간을 들였다. 케이크를 순서대로 쌓은 후에 최종적으로 메인 케이크 디자이너가 다시 장식을 해서 열두 시간 정도가 더 걸렸다.
“와, 이건 3개월이 걸린 게 아니네. 3개월하고 하루가 더 걸린 거지. 애초에 어셈블링을 할 시간을 따로 여유 있게 잡는 게 맞네.”
루이스가 진희에게 물었다.
“하객은 몇 명이었다고 합니까? 케이크가 모자라지 않았을지 궁금한데요.”
“음, 600여 명의 하객을 먹였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맨 위층 기념 케이크만 남겨서 보관했다가 매년 결혼기념일에 한 조각씩 먹는다고 하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국식 후르츠 베이스 슈가 크래프트 케이크는 20년, 30년도 보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아랍 왕자? 그 사람도 케이크를 60년씩 보관하고 싶대?”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일봉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 솔직히 나는 여기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커다란 케이크를 만들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12인치나 일반적인 홀케이크 디자인이라면 생각을 해볼 수 있는데. 아파트 몇 채, 아니 수십 채 가격인 케이크를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상상도 안 가요.”
진혁이 일봉을 바라보았다.
케이크 디자인과 재료에 관한 상담을 위해 프로 쉐프들을 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혁은 이 기회에 ‘해와 달’에 속해있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역량을 키워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더 이번에 우리랑 같이 만들어 봐야지. 너도 언제까지 빵집에서 주문 들어오는 것만 만들 건데? 웨딩 케이크하고 디자인 케이크도 만들어 보고 싶다며. 경험 쌓아두면 두루두루 좋지.”
“그래도 여기서 나만 너무 부족한 것 같은데….”
유일봉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느정도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이나 마리오, 루이스처럼 세계 대회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번 메뉴에 올라갈 법한 빵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이런 기념 케이크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케이크가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케이크에 900억 원이라는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재벌이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진희가 말했다.
“일봉 매니저님만 모자란 거 아니에요, 저도 많이 모자라요. 그래도 여기서 다 같이 만들면 다음 케이크 만들 때는 좀 더 도움 되겠죠.”
“다음 케이크요?”
“진혁이가 이런 식으로 케이크 의뢰받는 게 한두 번이겠어요? 무슨 뉴욕 갤러리에 예술 작품 냈다고 유명해지고, 이제는 부자들이 케이크를 의뢰하잖아요. 다음엔 900억짜리는 아니더라도, 몇천만 원짜리 케이크는 거뜬히 주문 들어올 거 같은데.”
“그야 그렇지.”
임진혁은 진희와 일봉이 나누는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역시 진희가 배우는 게 빨라.’
이제 갓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 수련생은 처음에 기본기부터 다진다. 권을 배운다면 정권 지르기를 천 번 만 번 할 것이다. 검을 배운다면 찌르기와 베기를 하겠지. 그렇게 기본기를 다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같은 것을 반복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고수가 선보이는 초식을 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호화로운 케이크를 더 쉽게 잘 만들기 위해서라면 사실 슈퍼스타 쉐프들을 초청하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팀을 키우고 싶었다.
한 마리 늑대처럼 홀로 강호를 주유하던 도산검림도 무림 대회에 나가서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정파 무공이 있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통해 동료와 친구, 가족들이 저마다 개안(開眼)하여 깨달음을 얻기를 원했다.
동료이기도 하고 부하직원이자 제자이기도 한 이들이 시야를 더 넓히기를 원했다. 이 이번 기회를 통해 직원들이 성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네스북에 올라갈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우며 고급스러운 케이크를 기획하는 데 참여했고 실제로 만들어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경험이 될 것이다.
‘무림대회 견학에 남의 문파 장로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우리 식구 중에서 견문을 넓혀야 하는 애들을 데리고 와야 하는 거야.’
진혁이 데려온 이들은 저마다 서류를 들여다보며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을 교환했다.
“재료만 봐도 눈 돌아간다. 진짜, 언제 이런 재료를 아낌없이 이만큼 쓰겠어.”
임진희는 대강 뽑아놓은 재료 예산표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량 주문하면 할인도 가능하다고 하긴 하더라. 일단 기본 가격만 뽑아놓은 거야.”
“할인해주면 안 되지. 그럼 돈을 더 쓰기 힘들잖아.”
진희의 말에 다른 이들이 킬킬 웃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재료도 그래. 난 요새 건강 빵만 만든다고 메밀가루, 오트밀 가루에 아몬드 가루 같은 거 쓰잖아. 그런데 밀가루와 버터, 달걀을 마음껏 쓰고 아무거나 하라고 하니까 오히려 그게 더 어려운 것 같아!”
루이스는 심각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쓸지 고민해본 적은 많지. 하지만 어떻게 더 많이 써야 할지는 생각나는 게 없네. 손님이 많아도 그 손님들이 전부 케이크만 먹지는 않을 거 아니냐, 다른 음식과의 밸런스도 고려해야 할 거고.”
“다른 연회 메뉴를 알아보고 그에 맞춘 맛으로 해야 할까요?”
진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마리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형!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어디에 있어. 그냥 적게 쓰려고 고민하던 때와 반대로 하면 되지. 최고의 자재로 제일 실력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멋지게 만들면 되잖아. 더 크고 맛있게 하면 되지. 생각만 해도 설레는데?”
진희가 임진혁에게 속삭였다.
“야, 저 두 형제, 뭔가 온도 차이가 심해.”
진혁이 피식 웃었다.
“원래 그래.”
그보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세계 대회에 나가보지 않은 건 둘인가?’
산골짜기에서 폐관 수련을 하면서 무공을 익힌 이들은 자신의 실제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모른다. 이 중에서 국제대회에 나가보지 않은 이는 일봉과 진희, 두 사람이다. 그 둘이 긴장해 있는 것에 비해 다른 이들은 신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조 역할을 할 강운종이나 멸치, 너구리쯤 되면 아예 굉장히 긴장해서 옆에 앉아 눈알만 굴렸다.
이 중에서 진혁이 직접 데려오지 않은 자가 한 명 있었다. 중국에서 파견 형식으로 나와 있는 장 쉐프는 내내 임진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진혁이 물었다.
“장 쉐프님은 말씀이 없으시군요.”
“임진혁 대표님께서 어떻게 결정하실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케이크 전부를 먹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장식용 케이크의 경우 내부를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으로 만들고 겉의 일부만 먹을 수 있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는 그런 건 싫습니다.”
임진혁이 자신의 결론을 이야기하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접시 위에 먹을 수 없는 게 올라가면 짜증 내잖아, 쟤.”
진희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시판하는 설탕 장식 같은 건 맛없으니까 절대 올리지 말자고 몇 번이나 얘기했던 게 아주 귀에 박혔다고요. 그래서 나도 절대 안 올리는데. 형이 나 가르칠 때 맨날 말했잖아요. 케이크에 올라가는 모든 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일봉이 진혁의 목소리를 모방해 똑같이 말하자 마리오가 킥킥 웃었다.
“그 얘기를 우리한테만 한 게 아니라 다른 데서도 하고 다니는구나. 야, 임진혁! 우리가 널 얼마나 오래 봐왔는데 널 모르겠냐.”
루이스가 물었다.
“그래서 어떤 디자인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금액을 전부 사용할만한 대안이 있는 거야?”
임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식장을 지을 거야.”
“…? 결혼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