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6화
미미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괜찮죠. 진혁 씨가 방문하면 윌리엄 쉐프는 영광으로 생각할 거예요!」
「…음.」
병철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차량을 이용해 해링턴 클리닉에 도착하는 데에는 두어 시간이 이상이 걸렸다. 민병철은 내심 갈등했다.
“우리가 가는 걸 윌리엄 쉐프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갑자기 가야 의미가 있지. 그래야 평소에 얼마나 잘하는지 알 수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
결국, 민병철은 윌리엄 쉐프에게 연락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해링턴 클리닉에 도착해서 윌리엄의 브레드 카페까지 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손님이 가득했다.
「손님이 꽤 많군요.」
미미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민병철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진짜 반응이 좋은 가게입니다. 윌리엄 쉐프가 잘 해주고 있어요. 병원에서 퇴원한 손님들도 외래 진료를 보러 올 때마다 들러서 꼭 치료용 빵을 사가는 건 물론이고, 아예 병원 손님이 아닌 사람들도 오고 있습니다.」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현재 소비 계층을 분석한 결과인가요?」
「음, 물론입니다. 현재는 병원 내부 고객이 55% 이래 손님이 25%가량 그리고 나머지가 외부 손님입니다. 지금은 외부 병원에서도 카페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문의해 온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병철이 긴장해서 마치 사업 보고를 하듯 미미에게 뻣뻣하게 말했다. 사적으로는 제수씨가 되지만 공적으로는 외부 회사의 대표이며 나아가서 투자자다. 그는 미미를 대하는 것이 아주 어려웠다.
「보고하셨던 건 전부 봤어요.」
미미가 짧게 말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사업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앤더슨 씨! 주문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야 매일 먹는 거지. 그리고 나한테 뭔가 만들어 주겠다고 한 걸 잊지는 않았겠지?」
「음, 이렇게나 바쁘면 제가 주방을 쓰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내일 따로 만들어서 보내 드리죠.」
앤더슨이 주춤했다.
「내일은 전시회가 있는데.」
미미가 씨익 웃었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음?」
「두 개의 케이크를 구워서 하나는 전시회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앤더슨 씨에게 먹을 수 있도록 드리면 어떨까요.」
놀라운 제안에 앤더슨이 눈을 크게 떴다.
「월계수와 버드나무를 치우고 냉동 시설이 되어 있는 투명한 전시 박스를 올리면 되겠군! 너무나 좋은 생각이야!」
진혁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의 케이크가 뉴욕의 첼시 갤러리에 걸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동안 간절하게 찾아오던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 미술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케이크는 그림이 아닌데요.」
앤더슨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설명해 주었다.
「거기에 있었던 나무와 조명, 빛과 그림자를 포함한 벽과 향기 모두 전시의 일부야. 현대 미술은 단순히 회화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야. 자네의 케이크가 덧붙여진다면 나에게도 영광일걸세.」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자네 이름도 걸고, 케이크도 보존하겠네.」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케이크를 2개 굽지만 하나는 먹지 않고 구경시키겠다는 겁니까?」
그는 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케이크 대회에서 전시용으로 제출하는 케이크의 경우, 스티로폼 모형 위에 식용 초콜릿으로 데코레이션만 따로 해서 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앤더슨을 ‘위해서’ 구운 개인적인 음식이다. 통증도 심해 보이고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그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마음을 다해 구운 빵이다.
「그럼 별로 만들고 싶지 않은데요.」
진혁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미미가 눈을 깜빡였다.
「진혁 씨가 어떤 마음인지 알겠어요.」
앤더슨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네가 이전에 나한테 그 예술품을 먹게 만들지 않았나?! 이번 한 번쯤은 져줘도 되지 않아? 내가 그림도 줬잖아! 꼭 쪼잔하게 이럴 거야?」
그는 숫제 애걸하다시피 애원했다. 민병철이 중얼거렸다.
「그 갤러리에서 케이크가 전시된다면, 페이스트리 쉐프의 작품이 뉴욕의 현대미술로 인정받는 최초의 일이 될 거야. 전무후무한 일이지…, 이건 진혁이 너한테도 나쁜 일이 아니야.」
병철은 나름대로 진혁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혁은 묵묵부답이었다. 앤더슨이 다시 애타게 말했다.
「내가 전시 비용도 전부 부담하겠네.」
미미가 말했다.
「전시 비용의 문제가 아니지요? 누군가를 위해서 만들어준 음식인데 먹지 않는다는 게 싫으신 것 같아요.」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진혁 씨, 이미 생각하신 케이크가 있지요?」
조금 전까지 두 남자의 말을 무시하던 그가 미미의 말에는 대답했다.
「예, 글루텐 프리 초콜릿 케이크입니다. 이전에 보니까 초콜릿의 씁쓸한 맛을 즐기시더군요.」
앤더슨이 코를 킁킁거렸다.
「허.」
미미가 중재했다.
「그 케이크를 얼마 동안 있다가 먹는 편이 제일 맛있나요?」
「바로 먹어도 좋지만, 통상적으로는 48시간 정도 있으며 풍미가 농후해져서 더 먹기 좋습니다.」
「잘됐네요! 그럼 하나는 바로 드시고, 다른 하나는 48시간 동안 전시하셨다가 케이크를 씹어 삼키시는 모습을 퍼포먼스로 해요.」
앤더슨이 입을 딱 벌렸다. 그는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임진혁 쉐프, 자네는 지금 내가 케이크를 먹기를 바라는 거군!」
「당연하지 않습니까?」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자신의 지론을 설파했다.
「아무도 먹지 않을 음식이라면 뭣 하러 만듭니까.」
「예술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거야!」
「케이크는 먹는 거고요.」
「그래그래, 자네가 다 옳아. 그러면 케이크 하나는 바로 먹고, 다른 건 48시간 후에 사람들 앞에서 먹겠네. 그건 어떤가?」
진혁이 흔쾌히 말했다.
「그건 괜찮습니다.」
「좋아, 좋아! 전시에 대한 홍보니 권리니 하는 귀찮은 건 에이전트에게 말해 두겠네. 알아서 잘 해줄 거야.」
미미가 생긋 웃었다.
「에이전트 연락처를 제 비서에게 알려주세요. 동서양을 통틀어 페이스트리 쉐프 최초로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데, 제대로 홍보해야죠.」
앤더슨이 말했다.
「미시즈 임, 정말로 천재적인 발상이야. 이전에 행위예술가 한 명이 전시되어 있는 작품을 먹어버린 적이 있었지, 하지만 먹기 위해서 전시되는 예술 작품은 이게 최초일 거야.」
병철이 아는 척을 했다.
「벽에 붙어 있던 바나나 사건 말이죠.」
「나는 서양화를 그리지만, 설치예술도 하지. 빛과 식물 그리고 그림자도 꾸민단 말일세. 하지만 내가 만든 작품을 먹어보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미미가 눈웃음을 쳤다.
「케이크와 가장 잘 어울리는 포크와 나이프, 그리고 케이크 받침용 그릇을 디자인해야겠군요. 그 부분은 원하시는 점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겠어요.」
앤더슨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냉동 효과가 유지될 만큼 차가우면서도 겉으로 작품이 보일 수 있게끔 전후면이 잘 보이는 전시 케이스를 주문해야 돼. 이거야말로 시간이 걸릴 거야.」
진혁이 티슈에 펜으로 슥슥 그림을 그려 보였다.
「투명한 소재로 전후면과 양면을 드러내고, 하단에서부터 냉기가 올라오도록 하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그 냉기 시설 부분이 문제야. 특별히 맞춤 제작을 해야 하니까.」
미미가 싱긋 웃었다.
「에이전트에게 제 비서를 소개할게요. 진혁 씨가 사이즈만 미리 알려주시면 돼요.」
임진혁이 뺨을 긁적였다.
「대강 이 정도?」
그가 손가락을 들어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어느 정도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전달할게요.」
민병철이 메뉴판을 보고서 말했다.
「나는 여기 글루텐 프리 에그프리 베이글이 좋더라.」
「씹는 느낌이 훨씬 쫀득하죠?」
뒤늦게 직원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윌리엄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민 이사님, 아니 임진혁 쉐프님! 그리고 회장님! 미스터 앤더슨!」
그는 다급하게 양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일 오시는 줄 알았는데요.」
오는 시점에 연락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진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바빠 보이는데 이제 그만 일하러 돌아가도 됩니다.」
「예, 예에. 주문은 제가 직접 받겠습니다.」
앤더슨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먹는 그걸로 주게.」
「알레르기 올 프리 베이글과 그린 샐러드 말씀이시군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미가 싱긋 웃었다.
「양파와 토마토를 곁들인 치즈 베이글이요.」
진혁은 제일 기본적인 메뉴에서 페이스트리 쉐프의 실력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을 먹어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오리지널 베이글로 부탁합니다.」
병철은 고심하다가 다른 메뉴를 골랐다.
「나는 계핏가루와 아몬드를 올린 유제품 무 함유 베이글. 그게 제일 맛있더라.」
윌리엄은 주문서를 받아서 주방으로 사라졌다. 등을 돌린 모습만 봐도 뻣뻣하게 굳어 긴장한 채였다.
주방장이 직접 나와서 인사하는 모습을 본 단골손님들이 신기해하는 소리도 들렸다.
윌리엄의 카페는 하루 세 번 빵을 구워냈다.
한두 시간 전에 구워 놓은 베이글을 살짝 데워서 꺼내 준다.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추가로 드레싱이나 시럽, 잼 등을 제공한다.
「여기 있습니다!」
윌리엄이 접시를 쟁반에 받쳐 들어 바로 가져다주었다. 그가 다가오면서 갓 데워진 빵의 향기가 풍겼다. 앤더슨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이 냄새가 참 좋아. 어머니의 향기 같기도 하고 고향 집 같기도 하단 말이지.」
민병철이 웃으며 덧붙였다.
「흔하지만 가장 강력한 트릭이죠. 아침 출근길에 오른 이들에게 강렬한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요.」
「그렇지, 그렇지. 전시장에서는 낼 수 없지만 말이야.」
진혁이 수긍했다.
「일단 구워낸 빵을 냉동실에 넣는다면 향은 물론이고 맛도 변하게 됩니다. 습기를 흡수하면서 질감이 바뀌고, 냉동실의 냄새를 빨아들여서 불쾌한 향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미처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된 앤더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냉동 보관을 하면 맛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미미가 물었다.
「새로 만든 별도의 냉동고니까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진혁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잘 관리하면 됩니다.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는 이 대화보다 눈앞에 있는 빵에 더 관심이 있었다. 민병철은 자신이 주문한 빵을 집어 한 조각 떼어냈다. 쫄깃한 빵이 탄력 있게 찢어지며 하얗게 죽 늘어났다.
「글루텐 프리는 맛있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는 씹히는 촉감이 조금 달라. 빵보다는 떡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살짝 찐득하지?」
앤더슨이 말했다.
「임 쉐프 결혼식에 참석해서 먹었던 라이스 케이크가 이런 느낌하고 좀 비슷해.」
「이건 밀가루가 아닌 메밀가루를 사용한 베이글이기 때문에 그래.」
진혁이 말했다.
「메밀은 밀도 아니고 쌀도 아니거든. 필수 아미노산을 비롯해서 단백질이 10% 이상 포함되어 있지.」
「언제 그런 것까지 알았어?」
「진희가 공부해서 하나씩 알려주고 있어.」
병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진희는 남자친구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