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5화
「그런 사내 문화가 있다고?」
「진혁 씨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으면 그 주변에서는 다들 긴장하게 되니까, 아마 주변에서는 못 보셨을 거예요.」
「흐음.」
「다들 안심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목표입니다.」
「고마워요.」
그날 저녁, 해링턴 모자와의 만남을 제외하고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다음날 오전에 다시 해링턴 미망인과 마주치자 그녀가 신신당부했다.
「나중에 미국에 오시면 꼭 들러요. 내가 꼭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도록 할 테니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로마에서 바로 미국으로 갈 예정입니다. 해링턴 클리닉을 비롯해 병원에 입점한 카페들을 점검하러 갈 예정입니다.」
해링턴 미망인이 반색했다.
「시간이 되면 그이 무덤에 들러 주어도 좋고, 들르지 않아도 좋아요.」
미미가 방긋 웃었다.
「저도 가능하면 같이 가도록 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정이다. 미미는 좀처럼 먼저 누군가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같이 가도 괜찮겠습니까?」
황미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제가 같이 가고 싶네요.」
◈ ◈ ◈
그들은 사흘 정도 로마에 더 머물렀다가 뉴욕 공항으로 향했다. 미미와 함께 공항에 도착하자 민병철이 라운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느라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것 외에 미국 지사를 관리하느라 거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진혁아, 오랜만이다!”
병철이 플랜카드를 흔들며 인사했다.
“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철의 옆에서 이전에도 보았던 운전사가 불쑥 나타났다. 병철이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올 필요가 전혀 없네.」
「데리러 온 거였어?」
진혁이 키득키득 웃었다.
「같이 출장 가는 줄 알았지.」
미미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비서진에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 한 것 같군요.」
뒤에 따라오고 있던 비서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미미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미국 지사에 마중이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지 않았나요?」
「죄송합니다!」
비서들이 바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서 병철이 말했다.
「아니, 올 거라고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진혁이를 빨리 보고 싶어서 제가 온 겁니다.」
왕 비서가 병철에게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민병철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늘은 일정 안 잡았더라. 숙소에서 쉬고 내일부터 시찰 시작하던데, 저녁이라도 함께 먹을까?」
진혁이 입을 열었다.
「바로 미스터 앤더슨의 전시회에 가기로 했어.」
「뭐? 어딘데?」
「첼시 갤러리.」
병철이 고개를 저었다.
첼시 갤러리는 하나의 갤러리를 뜻하지 않는다. 18번가에서 27번가, 그리고 10번가와 11번가 사이에 있는 300여 개 이상의 모던 아트 갤러리를 통합해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그저 ‘첼시 갤러리’라고만 해서는 어딘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프라이빗 공개야? 일반 전시인가?」
미미가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했다.
「전시회는 내일부터지만 오늘 저녁에 따로 들러서 볼 수 있게 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아.」
병철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럼 그거 끝나고 같이 밥이라도.」
「밥 앤더슨 씨께서 전시와 디너를 겸해 잠시 들러 달라고 하셨기 때문에.」
미미가 설명하는 사이에 진혁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한 명 더 같이 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
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앤더슨 씨! 혹시 일행이 한 명 더 추가되어도 괜찮겠습니까?」
◈ ◈ ◈
전시회 장소는 첼시 갤러리의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앤티크풍 갤러리였다.
구리로 만들어진 장미 장식이 화려하게 붙은 간판 아래, 우아한 현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밥 앤더슨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시게나! 멀리서 왔군. 이분이 그 친구인가? 사람이 많으면 더 좋지.」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곳이에요.」
미미가 짧게 평가했다. 진혁 역시 함께 인사했다.
「초대 감사합니다.」
「자, 자. 이쪽으로 오게나. 그림부터 보자고.」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 세피아 색 공간을 통과하자, 훅하고 식물 향내가 났다. 이름 모를 키 큰 열대 식물들이 수없이 많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덧붙였다.
「그림을 관리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지만요.」
발 높은 화분들 사이로 정글을 헤쳐가듯 지나가자, 사람 키보다 더 큰 유화가 보였다.
미미가 알아보았다.
「악마의 포크군요.」
진혁이 물었다.
「악마의 포크?」
「펜로즈 삼각형이나 펜로즈 계단처럼 불가능한 도형으로 꼽히는 2차원 도형 중 하나예요.」
「호오.」
허락을 받아 함께 따라온 병철이 반갑게 말했다.
「이건 고등학교 때 기하학 시간에 보았던 작품인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이 포크는 2차원 도형이었다. 세 개의 다리가 내려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운데는 뒤집혀 있어,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형태다.
「이 그림이 끝이 아니야.」
그들은 연한 상앗빛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복도를 지나 굽이굽이 돌아 두 번째 유화 캔버스를 마주했다.
이번에 본 그림은 아까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진 액자처럼 작았는데, 붓질의 감각을 살린 입체적인 유화였다.
진혁에게는 아주 낯익은 광경이었다.
「이건 내가 전에 만들었던 케이크군요.」
펜로즈 삼각형 케이크.
진혁이 처음으로 입체적으로 재현했던 물건이다.
하지만 그것을 펜로즈 삼각형의 형태로 보이는 각도가 아니라, 다른 각도로 만들었다.
미미가 그 케이크를 보고서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펜로즈 삼각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민병철이 짧게 평했다.
「하지만 제목은 <펜로즈 삼각형 IV>잖아.」
내내 곁에서 침묵하고 있던 밥 앤더슨이 느닷없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는 불룩한 배를 내밀고 깎지 않은 겨자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모든 것은 본질이야. 본질은 보는 자의 눈에 따라서 바뀌지 않아야 해. 그러니 진혁 쉐프 자네가 이전에 만들었던 펜로즈 삼각형은 사실 펜로즈 삼각형이 아닌 것이지.」
그는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진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는 아내가 관심을 보여서 따라왔을 뿐, 예술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러한 유화 그림을 볼 때 물감의 붓 터치 하나하나, 그리고 그곳에 올라간 먼지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보면서 그림의 가치나 예술성을 재평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캔버스와 물감이 어떻게 분배되어있는지 살펴보았을 뿐이다.
밥 앤더슨이 말했다.
「아니, 반응이 왜 그래.」
「예?」
「내 깨달음을 듣고서 자네도 뭔가 팍! 하고 오는 게 없나?」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 물체도 어느 각도에서 보면 펜로즈 입체 삼각형으로 보일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
「작품 제목이 ‘펜로즈 삼각형 IV’입니다. 그걸로 끝난 거죠.」
진혁이 결론지었다. 잠시 벙쪄 있던 앤더슨이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이 터져 나오듯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그렇구만. 내가 지은 제목인데 말이지.」
미미가 슬며시 웃었다.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전부 입체 펜로즈 삼각형을 떠올릴 테지요. 밥 앤더슨 씨, 최신작도 너무 멋져요. 이전에 그리신 그림도 좋았지만 이번에는 색채 면에서 한 층 더 발돋움하신 것 같습니다.」
「임진혁 쉐프가 케이크에 쓰는 다양한 크림 색상을 보고 영감을 얻었지. 안전하고 평온한 파스텔 색깔보다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원색을 주로 쓰던데? 그걸 보니까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호호, 그러셨군요.」
「이번에는 이 그림 두 개가 마지막입니까?」
「아니, 이쪽에 더 있지.」
일행은 앞서 보았던 그림과 달리 차가운 톤 원색의 정돈된 느낌으로 그려놓은 펜로즈 다각형들을 보았다.
넓고 탁 트인 공간에 울창하게 있는 식물 그리고 예술품이다.
미미가 짧게 평했다.
「저는 펜로즈 오각형 입체 그림이 제일 좋았어요.」
조금 전까지 그림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진혁이 밥 앤더슨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그림들은 파실 생각이 있습니까?」
「미술관에 기증하려고 했는데.」
「중국에 있는 황 미술관에 한 점을 기증하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니 임 쉐프, 이거 아주 날로 먹으려고 하네?」
앤더슨이 킬킬 웃었다. 진혁이 말했다.
「오늘 저녁 식사하고 나서 다른 펜로즈 다각형을 구워 드리죠.」
밥 앤더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괜찮아.」
그는 진혁이 케이크를 구워준다고 하는 이야기를 거절한 적이 없다.
특히나 펜로즈 다각형이라고 하면 더욱더 탐내면서 달려들어야 한다. 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외골수 타입의 예술가는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끼고서 발끝으로 바닥을 탁 탁 탁 쳤다.
어디를 봐도 ‘왜 내가 못 먹는지 물어봐 줘!’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묻지 않았다. 그는 거절한 사람에게 굳이 재차 제안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미미가 진혁의 손을 살짝 쥐었다가 다시 풀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용하고도 싸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민병철이 외교적으로 물어보았다.
「아니, 미스터 앤더슨! 어째서 거절하십니까? 저는 진혁이가 이런 말을 하면 아이구 좋다 하고 달려드는데요.」
그는 슬프게 말했다.
「이번에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무리했어. 거의 몇 달간 제대로 챙기지를 못했더니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뭘 더 먹으면 안 돼.」
「허어.」
「해링턴 클리닉의 브레드 카페에서 그럭저럭 먹을 만한 것들을 주고 있어서, 굶어 죽진 않아서 다행이지. 거기 것 말고는 먹을 수 있는 게 전혀 없다고.」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쪽 빵집에서 구워내는 빵을 먹을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쪽 레시피도 전부 제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고 계시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 그냥 그때 그거 하나만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니야?」
밥 앤더슨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 가게의 레시피는 거의 다 제가 만든 겁니다. 뭐, 쌍둥이의 도움을 좀 받기는 했지만요. 지금 드실 수 없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면 그에 맞추어서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버터도 설탕도 먹을 수가 없다고.」
「밀가루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어렵지, 글루텐 프리여야 해. 그러니 카페에서 먹을 수 있는 빵 종류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고.」
그가 투덜거렸다.
「우유도 못 먹으니 아이스 라테도 마실 수가 없다네.」
민병철이 말했다.
「우유를 마실 수 없다면 두유를 드시면 되지 않습니까?」
「두유는 맛이 없잖나.」
진혁이 물었다.
「아몬드유도 맛없다고 느끼십니까?」
「아몬드유? 그건 먹어본 적이 없는데.」
진혁은 어떤 재료로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다.
「그렇다면 제가 아몬드유와 쌀 크림으로 펜로즈 오각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삼각형이 아니라 오각형도 만들 수 있다고?」
「아주 쉽습니다. 눈이 있다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걸요.」
「하!」
앤더슨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 민병철이 잽싸게 화제를 전환했다.
「훌륭한 그림들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진혁아, 오늘 디너는 어디서 먹어? 내가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진혁이 말했다.
「해링턴 클리닉의 카페.」
「…너 내일 시찰한다며?」
「오늘은 손님으로 가는 거지.」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민병철이 미간을 좁혔다.
「과연 윌리엄 쉐프도 그렇게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