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4화
「빵을 먹고 다른 사람이 되다니요?」
미미가 물었다. 본즈 해링턴이 대답했다.
「모든 걸 일 중심으로 생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가족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일하는 것이 좀 더 가족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어요.」
해링턴 미망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매일 규칙적으로 같은 걸 먹던 사람인데 말이지. 그 빵 이야기를 몇 번이고 하다가 갑자기 회의 핑계로 한국까지 갔단 말이에요. 그때 진짜 이 사람이 미쳤나 싶었어요.」
「그러게요. 가족들도 이 빵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다가 뜬금없이 이제는 일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봐야겠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전에는 일을 줄이자 줄이자 해도 들은 체도 않던 분이신데 말입니다.」
한 번 말을 하기 시작하자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해링턴 미망인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너무 아프지 않게, 조용히 마무리하고 가서 다행이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할 말 다 하고 갔으니까 미련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코스요리는 이미 예전에 끝났다.
디저트는 아포가토였다. 달콤한 바닐라 젤라또 아이스크림 위에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부었다. 투명한 칵테일용 잔 속 검은 바다에 잠긴 새벽 해 같다. 샛노란 아이스크림이 새까만 커피에 잠겨 점차 젖어 들어갔다.
진혁은 이 디저트를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덜 달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도 설탕이 아니라 꿀을 사용한 것 같군. 하지만 씁쓸한 맛이 강한 만큼 은은한 단맛이 더 확 느껴져. 요즘은 이런 식으로 맛을 대비시키는 간식이 좋단 말이지.’
그가 맛을 즐기는 동안 미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해링턴 미망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마치 온몸이 귀가 된 것처럼 열심히 들었다.
「저는 잘 모르는 분이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항상 저를 믿고 아끼시면서 든든하게 받쳐 주시던 분이었거든요.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지금도 본토에 계실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사라지셨다는 실감이 안 나거든요.」
해링턴 미망인이 답변했다.
「저도 그래요. 그러다가도 그이가 쓰던 쉐이빙 크림이 비지 않은 채 화장실에 놓여 있는 걸 보거나, 영원히 젖지 않는 남성용 면도기나 칫솔 같은 걸 볼 때마다 울컥하고 감정이 몰아쳐요. 그 순간만 지나면 괜찮아요. 오히려 이렇게 멀리 나와 있을 때는 더 거리감이 느껴지고, 병원에 있겠구나 싶으니까요.」
두 여자는 잠시 서로 이해하는 눈빛을 나누었다. 침묵이 흐른 후 미미가 물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뭐든지 물어봐요, 미시즈 임.」
「남편분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고 나서 그분이 먼저 떠나셨는데, 견디기 힘들지 않으신가요.」
해링턴 미망인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진주 반지가 반짝하고 빛났다. 커다란 진주 주변을 다이아몬드와 작은 사파이어가 감싸고 있는 디자인의 반지다.
진혁은 모르지만, 미미는 그 반지를 눈여겨보았다.
‘할아버지께서는 몸에 지니고 있는 보석 장신구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셨지.’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의 반지다. 그때는 탄생석을 중심으로 다양한 보석들로 장식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진주인 것을 보면 아마도 6월생이리라. 따로 제작한 여성용 결혼반지로 보였다.
다른 보석들과 달리 진주는 유기물이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어렵다. 땀이 닿으면 변색이 되기 쉽기 때문에 항상 착용하기에 좋은 보석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도가 낮은 진주는 다른 단단한 광물계 보석들과 부딪히면 쉽게 긁히고 벗겨져 버린다.
그러한 진주 반지를 이렇게 흠집 하나 없이 광택을 유지하며 새것같이 끼고 있다는 건 그만큼 신경 써서 잘 관리해왔다는 것이다.
미미가 잠시 반지에 시선을 빼앗긴 동안 해링턴 미망인이 대답했다.
「그래도 추억은 남으니까요.」
「!」
미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혼자 남으면 외롭지 않을까요.」
「사실은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기는 해요. 내가 아들이랑 놀러 나온 거고 남편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지금이라도 핸드폰을 들어서 전화하면 간호사님이 대신 받아서 “수술 중이십니다. 3시간 소요 예상입니다.” 하고 퉁명스럽게 말할 것만 같아요. 그래서 혼자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아하하, 일하는 도중에는 절대로 전화 연락을 받지 않으셨군요.」
미미가 웃어버렸다.
「외과 의사는 수술 도중에 전화기를 만질 수 없으니까요. 수술실의 스크럽 간호사가 대신 전화를 받아 주거든요. 그래도 그이는 내 전화는 꼬박꼬박 받아서 언제 끝나는지 얘기해 주도록 말을 했어요. 전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랬군요.」
「그이가 일만 하는 것 같아서 원망스러웠던 때도 분명히 있었어요. 그런데 그이 장례식에 온 손님이 천 명이 넘었답니다.」
미미가 눈을 크게 떴다.
「천 명이나요?」
「그이가 수술해서 살린 환자분들과 그 가족분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신 거예요. 자리가 부족해서 전부 다 참석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관을 운구하는데 줄줄이 따라온 차량과 걸어서 온 손님들이 정말로 많았답니다. 지역 신문에 기사까지 났어요.」
해링턴 미망인이 기쁜 듯, 슬픈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년에 평온한 시간을 저와 함께 보내주어서 좋았죠. 그 순간순간이 너무나 즐거웠어요.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잘 해줄 걸 그랬지요.」
미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먼저 가신 분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으세요?」
「저하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해서 제가 더 행복했을까, 그이가 더 즐거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와서는 전부 소용없는 일이죠.」
해링턴 미망인의 눈가에 주름이 졌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이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나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의학이 발전하는 동안 해링턴 클리닉이 뒤떨어지면 안 된다면서 논문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몰라요. 새로운 논문을 쓴다고 고생하던 것도 기억나고, 어려운 수술을 해냈다고 기뻐하던 순간도 전부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이는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었구나, 싶어요. 지금은 여기 없더라도 단단하게 서 있는 병원 건물과 그 안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사람들, 근무가 끝나고도 의학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보면 이게 다 그이가 남겨 놓은 유산이구나 싶어요.」
본즈 해링턴이 말했다.
「이번에 아버지가 졸업하신 모교 의대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기탁하셨습니다. 신경외과를 전공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돈 때문에 신경외과를 택하지 못하는 의대생들이 좀 더 부담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해링턴 미망인이 생글생글 웃었다.
「요 본즈 녀석이 하자고 한 거예요. 적당히 물려받아서 어디 자기 클리닉 개업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장학금을 하자고 하더라구요. 아들을 참 잘 키웠다 싶었어요.」
대화가 끝나갈 무렵 진혁은 아포가토를 다 먹었다. 그는 흐뭇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가 미미가 디저트에 아직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은 이미 녹아 버려서 에스프레소와 함께 얼룩져, 상앗빛과 흑색의 마블링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진혁은 손을 뻗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해링턴 모자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디저트를 다시 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신 그는 직원을 불렀다.
「여기 아포가토 좀 새로 내놓아 주게.」
대화에 참여하지 않다가 갑자기 부인의 디저트를 챙긴다. 그 모습을 보고서 해링턴 미망인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말씀드렸듯이 진혁 쉐프를 따로 만난 적이 있어요. 제가 꼭 인사드리고 싶어서, 저하고 제 남편이 같이 만났습니다. 그때 만나 뵈었던 진혁 쉐프는 조금 더 단단하고 벽이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부인분이 함께 계셔서 그런지 더 오늘은 다정하고 상냥하시네요.」
「아, 감사합니다.」
미미가 방긋 웃었다.
「늙은이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어 주느라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진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는 중간부터는 거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그는 가족과 친인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의 죽음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미미의 반응에 관심이 있었다.
‘미미 씨가 디저트를 안 먹다니 뭔가 기분이 복잡해진 것 같은데.’
멀뚱멀뚱 앉아 있는 진혁의 오른손 위에 미미가 왼손을 살짝 얹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웨이터가 곧 새로운 아포가토를 갖다 주었다.
「이거 맛있네요, 아이스크림이 제가 좋아하는 식감이에요.」
미미는 커피와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함께 맛보며 흡족해했다. 진혁은 그런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본즈 해링턴이 부러운 듯이 말했다.
「저도 일이 바빠서 결혼 생각이 아직 없었는데 두 분을 보고 있으니까 참 좋아 보이네요.」
「그렇지? 그래도 서두를 필요는 없어. 어딘가에 인연이 있다면 나타나겠지.」
해링턴 미망인이 아들을 달랬다.
식후의 홍차까지 마시고, 진혁 부부는 두 사람과 헤어졌다.
미미는 구형 엘리베이터를 선호하지 않아 두 사람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진혁은 자연스럽게 미미의 팔을 잡으며 체중을 지탱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미미는 기대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정자세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기대도 괜찮은데요.」
「이런 일부터 기대기 시작하면 좋지 못하다고 들었어요.」
「구두 굽이 평소보다 한 뼘 정도 높으니까 괜찮습니다.」
미미가 멈칫했다.
「그걸 알 수 있어요?」
「평소보다 머리가 올라와 있으니까요.」
그녀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그렇게 수치로 명확하게 알 수가 있군요.」
「보면 보입니다.」
「건축이나 그림 그리기를 배워도 좋겠어요, 비율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있으니까요.」
미미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미시즈 해링턴과 이야기를 나눌 때 듣지 않고 계셨지요?」
「음.」
「제게는 아주 귀한 이야기였어요.」
「어떤 점이요?」
「이번에 법인을 설립하기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드워드 해링턴 씨가 병원과 함께 면학하는 분위기를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상념이 떠올랐거든요.」
계단을 올라가던 진혁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미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어떤 생각입니까?」
「저는 사람들이 좀 더 열심히 살았으면 좋겠어요.」
미미가 말했다.
「진희 씨 같은 사람들이 좋아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발전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세워질 학교에서도, 그리고 회사에서도 자기 계발하는 이들이 우대받기를 원해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에요. 지금은 미묘하게 열심히 하면 너무 튀어서 다른 사람들이 좀 덜 일 하라고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사내 문화 자체를 바꾸고 싶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