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9화
“….”
진희는 입을 다물었다.
임진희가 돌아가는 길, 진혁이 입구까지 배웅을 나왔다. 임진희가 진혁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야, 임진혁.”
“음?”
“미미 씨한테 잘해라. 아주 잘해. 아아아아아주 잘하라고.”
“잘하고 있는데.”
“너 혼자 생각대로 잘하지 말고, 상대방이 원하는 게 뭔지 물어보고 그걸 해 줘.”
“….”
진혁이 멀뚱멀뚱 바라보자 임진희가 답답해하며 말했다.
“지금 관계가 얼마나 일방적인지 알아? 너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미미 씨가 너한테 완전히 맞춰 주고 있는 거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더 주는 거지. 그런데 그게 정상적인 건 아니야. 부부라면 대등한 관계여야지.”
진혁이 중얼거렸다.
“대등한데….”
“너 결혼했잖아. 독립해야지. 결혼한 20대 남자가 갑자기 가족의 소중함을 얘기하면서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는 것도 이상해! 보통 네 나이에 그런 생각 안 해.”
“안 한다고?”
“자기 자식이 생기면 애들 키우면서 힘들어서 부모 생각을 하지. 아니면 아예 부모님이 암 진단받아서 오신 보호자들이라면 모를까!”
흥분해서 쏘아붙이던 진희가 느닷없이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우리 아빠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나한테만 말 안 한 건가? 그러고 보니 텔레비전에 나올 때도 유난히 화장을 진하게 하셨던데….”
진희가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전에 진혁이 황급히 말했다.
“아냐, 아냐. 건강검진은 계속 받고 계셔. 비서실에서 챙기고 있어.”
뜻밖의 답변에 진희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맙소사. 이놈 자식이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대리효도 금지야, 금지! 네가 챙겨야지. 너 진짜 진짜 미미 씨한테 잘해라.”
“그보다 나 너하고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 좀 내줘.”
“그래, 그래. 어떻게 하면 미미 씨랑 잘 지낼 수 있을지 좀 더 고민해 봐. 다음 주에 운동하러 올 때 삼십 분 일찍 올 테니까 그때 얘기해.”
진희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임진혁은 잠시 동안 혼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미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
◈ ◈ ◈
다음날은 아버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과기능장 입회식 날이었다. 호텔의 로비에는 제과기능장 입회식 장소를 알리는 푯말이 붙어있었다.
미미가 보내준 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아버지는 긴장해서 뻣뻣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보, 같이 들어가면 좋을 텐데.”
“우리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았어, 끝나는 대로 나올게.”
임운정은 호텔 로비를 지나쳐 특강실에 도착했다.
“임운정 님 되시지요?”
“예.”
“여기 있습니다.”
리셉션에서는 이름을 확인하고 옷을 나눠주었다. 가이드 한 명이 따라와 탈의실로 안내하였다. 임운정은 어색하게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장을 입고 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걸.”
다른 이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곧 행사가 시작됩니다! 옷을 갈아입으셨다면 바깥으로 나와주세요!”
다들 새하얀 조리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행사장으로 돌아갔다.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졌다. 제과기능장 협회의 사무총장이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92년에 최초로 한국의 제과기능장이 탄생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의 유일한 제과제빵협회로서 노동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훌륭한 기능장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제과기능장 신입회원 가입식과 특강을 겸한 날이다.
“이번 합격생은 총 15명입니다. 그중에서 최연장자, 임운정을 소개합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새하얀 조리복의 왼쪽 가슴 위에는 제과기능장 임운정이라는 글씨가 수 놓여 있었다.
짧은 특강이 끝나고 임운정은 입회식을 마치고 나왔다.
아내를 보고서 반가워 달려가는데, 그 뒤에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진혁아! 여기까지 어떻게 왔냐. 너 바쁘잖아.”
“아버지가 제과기능장이 되시는 날인데 당연히 와 봐야죠.”
“짜식, 기특한 소리 하기는.”
아버지가 아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너도 시험 보러 와야지. 아직 경력이 부족해서 못 보지만 말이야!”
“하하하하!”
진혁이 웃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제가 아버지 뒤를 따라서 후배가 될게요.”
“당연하지. 그때는 내가 꼭 와 주마.”
“여보, 진희도 오고 싶어 했는데 가게가 바빠서 못 왔어요. 대신 오늘 저녁 식사는 같이 한대요.”
“미미 씨도 오려고 했는데 오늘은 중국 출장이 있어서 못 왔어요.”
“그래, 그래.”
진혁은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걸었다. 한 비서가 예약해둔 식당은 호텔에서 매우 가까웠다. 백 미터 정도를 걷자 바로 한정식집이 보였다.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진혁이 말했다.
“이제는 좀 더 자주 찾아뵈려구요.”
“그래? 갑자기 왜 그런 마음이 들었어?”
어머니가 웃으며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혁은 새삼스럽게 어머니를 보았다.
동네에서 몸뻬 바지와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고 다니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옷차림이었다.
세련되어 보이는 여사장 같은, 비즈니스 수트 차림이다. 목에 걸려 있는 진주 목걸이와 붉은색 보석 귀걸이, 그리고 팔에 차고 있는 팔찌, 시계.
하지만 그 복장보다 어머니의 표정이 더 좋았다. 60대라고는 하지만 그 나잇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갈색으로 그린 눈썹과 초롱초롱 빛나는 진갈색 눈동자, 그리고 잘 손질한 머리.
환하게 웃을 때 보면 40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밝고 활기찬 분이었던가.’
피곤에 지쳐서 아이라인이 번진 채 멍든 것 같은 눈을 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병원을 오가던 엄마는 이제 없다.
지금의 어머니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중년 여성 사업가였다.
“엄마, 처음 보는 옷이네요.”
“며늘아기가 스타일리스트를 보내줘서 내 옷장을 싹 갈았어. 내 얼굴형에는 볼드하고 패턴 있는 대형 귀걸이가 어울린다고 하면서, 액세서리도 새로 바꿔줬단다.”
아버지가 킥킥 웃었다.
“진혁이 너한테는 안 그러디? 내 옷장도 완전히 사라졌어. 옛날 조리복 몇 벌만 간신히 숨겨놨지 뭐냐.”
“그래서 아버지 머리를 투블럭으로 깎기 시작하신 겁니까?”
“그렇지. 이 얼굴에 어울리는 모양의 가르마가 따로 있다고,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하더라고. 영화배우들 얼굴 보면서 알려주던데.”
진혁이 수저를 들며 말했다.
“저한테는 그런 이야기가 딱히 없던데요.”
어머니는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실크 머플러를 벗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웃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아들은 이미 잘생겨서 손댈 데가 없어요.”
“아니, 그래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 수가 있잖아.”
“저랑 같이 일하는 쉐프 복 디자이너하고 나이프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하긴 한 것 같더라고요. 개인의 복장이 아니라 사업적인 문제라고.”
“맞다. 그 키친 나이프 말이지? 나이프 세트 아주 괜찮더라. 나도 선물 받아서 잘 쓰고 있어.”
“가격 듣고 깜짝 놀랐어.”
아직까지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진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주에 진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실패했다. 하지만 오늘은 드디어 부모님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미미하고 예행연습을 했으니까 잘 될 거야.’
아들이 왜 군대에 다녀와서 놀랄 정도로 바뀌어버렸는지 말해야 한다. 그래야 설명할 수 있다.
어째서 자녀 계획을 서두르지 않는지, 어째서 가끔 상식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부분들은 부모님이 이미 이해하고 계시다.
하지만 더 늦지 않게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부모님을 위해서 말해야 해.’
그것은 진혁이 아니라 미미가 짚어준 부분이었다.
“당신이 아니라 부모님을 위해서 이야기해줘야 해요.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치니까요.”
앞으로 부모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오래 건강하게 살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여든이나 아흔 정도에는 죽겠거니 하고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
적어도 백이십 살까지는 건강하게 살 것이다.
앞으로 살 날이 이십 년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육십 년이 더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르다.
미래를 계획할 때 보는 시야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한정식집이지만 메뉴는 소박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정갈한 나물 반찬, 그리고 어머니가 즐기는 잔치국수가 곁들여져 나왔다.
아버지가 반가운 듯이 말했다.
“한정식집을 예약했다고 해서 이것저것 화려하게 정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김치찌개를 좋아하시잖아요. 여기가 맛있대요.”
새빨간 국물이 칼칼하게 팔팔 끓는 가운데 듬뿍 들어있는 고깃덩어리가 엿보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크게 한 국자 떠서 앞접시에 담는다. 어머니가 방금 떠놓은 앞접시를 아들 먼저 밀어주자 아버지가 씩 웃었다.
“이제 내가 아니라 아들이 먼저다 이거지.”
“당신하고는 매일 밥을 같이 먹잖아요.”
어머니가 장난치듯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버지 앞으로 슥 밀어놓는 그릇 안에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비계가 두툼하니 붙은 고기가 가득 담겨 있다.
부모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혁이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엄마, 아버지 먼저 주셔도 됩니다.”
“얘. 내가 너한테 효도할 기회를 준 건데 네가 그냥 놓쳐 버린 거지~!”
“그런가?”
아버지는 젓가락으로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집어 살폈다.
“이거 이거, 아주 좋은 고기를 썼는데. 찌개에 넣기 아까울 정도야. 이 정도면 구워도 맛있을 거야.”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면서 감탄하였다.
“제주산 흑돼지 고기래요.”
“여기는 구이를 시켜도 좋을 텐데.”
“그래도 찌개는 또 찌개의 맛이 있잖아요.”
식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혁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 할 이야기가 집안의 평화를 해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따스하고 안온한 분위기가 무너지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버지가 화를 낼까 봐 무서웠다.
어머니가 허튼소리라고 치부하는 것이 싫었다.
아니면 미친 게 아니냐, 정신과 진료를 받으라고 말을 할 수도 있다.
이야기를 믿어 주어도 문제고, 믿어 주지 않아도 문제다.
두려움은 안개구름처럼 뭉클하니 피어올라 마음을 적셨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주화입마에 빠져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무공의 고수가 심마(心魔)에 빠져들면 곤란하다.
특히나 무공을 익히고 있는 사람이 자신 혼자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아버지는 흰밥에 수저를 넣어 뜨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여기 밥도 아주 맛있네. 찌개랑 딱 어울리는 맛이야.”
“우리 집 근처에 이런 식당 하나 있으면 좋겠네. 맨날 가고 싶을 거야.”
“은퇴하고 이쪽으로 이사 오면 되지. 한 5년? 정도만 있어 봐요. 그러면 나도 은퇴하고 당신도 은퇴하면 되잖아.”
“아휴, 가게는 누가 하라구 두고 서울로 올라와요? 애들 둘 다 자기 가게가 있는데, 우리 가게 맡아서 해 줄 수도 없잖아. 우리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계속 해야지. 나이 들어서 돈 못 버는 게 얼마나 슬픈데.”
진혁은 마음을 정했다.
‘지금 당장 이야기해야겠다.’
“아버지, 어머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