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8화
“알았어.”
진희는 곧잘 동작을 따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배웠다는 황미미의 경우 똑같이 태극권을 하더라도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우아했다. 하지만 진희의 태극권은 태극권이 포용하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한다기보다 팔다리를 휘적휘적하니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게 세게 할 필요가 없어. 빠르게가 아니라 느리게 가는 게 더 중요해.”
미미가 진희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저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 좀 보고 올게요, 두 분이 말씀 나누세요.”
진희가 고개를 숙였다.
“네!”
미미가 자리를 떠났다. 진혁은 이후 계속해서 그렇게 진희가 제대로 태극권을 펼칠 수 있도록 자세를 봐주었다.
“이제 혼자 해봐.”
“엉.”
하지만 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분 정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한 진혁이 임진희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만 더 느리게 해 봐.”
“지금도 충분히 느리다고!”
“어제보다는 좀 낫네.”
느릿느릿 움직이는 전신에서 땀이 흐른다. 진희가 옆에 준비되어 있던 수건을 집어 이마를 훔쳤다.
“너도 피곤할 텐데 도와줘서 고마워.”
“네가 잘 되면 좋지.”
땀을 닦고 샤워하고 나온 진희가 투덜거렸다.
“이게 도대체 왜 제과제빵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진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이유를 지금 알려줄게.”
임진희에게 진혁이 태극권을 가르친 지 보름이 넘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 미미도 자리를 비켜주었으니 드디어 말할 때가 되었다.
‘지금 말하기만 하면 된다.’
어젯밤에 황미미와 함께 연습도 했다.
미미가 진희인 척 연기도 해 주었다.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연스럽게 조금씩 이야기하면 된다.
“그게 말이지.”
막상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목에 말이 턱 하고 걸렸다.
“뭐, 사실 모르는 건 아니야.”
임진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안다고?”
진혁이 놀라서 반문했다.
“응. 이거 하니까 근력이 좋아지고 악력도 남자보다 더해졌잖아. 내가 정 쉐프님보다 더 반죽하는 힘이 좋더라고. 나 혼자 배우지 말고 쉐프님들 다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야.”
“….”
태극권의 효능으로 몸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사실은 좋다. 하지만 이 태극권을 어디서 배워왔는지 알려준 적은 없다.
진혁이 운을 떼려는 순간 진희가 시계를 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11시 30분이네. NBC 좀 보자.”
막 이야기하려다가 말문이 막힌 진혁이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 갑자기 왜 텔레비전을 보자는 거야? 이야기하는 중이잖아.”
딱 잘라 거절하는 말에 진희가 킥킥 웃었다.
“바로 아버지 인터뷰 방송 시작하는데 안 본다고?”
“아. 그게 오늘이었나.”
진혁이 팔짱을 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보자.”
“와, 태도 바뀌는 것 보소.”
자연스럽게 미미가 내려왔다. 그녀가 진혁이 앉은 소파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왕 비서가 오늘 방송이라고 알려 주더라구요.”
“부모님도 모시고 같이 볼 걸 그랬네.”
“지금이라도 모시는 게 좋을까요?”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전화해서 엄마 TV 켜라고 할게.”
◈ ◈ ◈
“안녕하세요! 하루를 닫는 NBC, 밤을 맞이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MC 지재언입니다. 오늘은 두 분의 뛰어난 인재를 모셨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소망시의 떠오르는 제과제빵사, 임운정 교수님이십니다! 다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지재언 MC가 웃으며 말하자 방청객들이 손뼉을 쳤다.
“반갑습니다.”
화면 속에서 임운정이 몸에 꼭 맞는 남색 줄무늬 정장을 입고서 당당하게 들어섰다. 옥스퍼드식 갈색 구두에 아들이 새로 사준 넥타이까지 완벽한 차림새였다. 제과제빵사라기보다는 장년 모델 같기도 한 모습이다.
“이쪽에 앉아주시면 됩니다.”
“두 번째 초대손님은 젊은 벤처사업가 민병철 이사님입니다! 어서 오세요.”
“이 두 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라고 들었는데요.”
“병철이네 아버지가 동네 친구입니다.”
“호오.”
민병철이 즐겁게 이야기했다.
“저희 어머니께서 곱창집을 하시는데 임운정 선생님과 부인 되시는 분께서 종종 오세요.”
“병철이네 부모님 부부도 저희 빵집에 들러서 빵을 팔아줍니다. 같은 동네에서 이십 년 넘게 장사를 하다 보니 서로 모를 수가 없는 사이죠. 왜 이웃사촌이 피보다 더 진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웃 이촌이에요, 이촌.”
“하하하하.”
소망시의 주민들이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지 사담을 나눈 후에 지재언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면 임운정 교수님께서도 민병철 이사님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들이 있으시지요.”
“예, 제과제빵사로 일하고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진혁이를 그냥 제과제빵사라고 하긴 좀 어렵지 않나요?”
민병철이 끼어들었다.
“‘해와 달’은 아주 훌륭한 기업입니다. 저도 그린 워터 팜 시절부터 ‘해와 달’과 인연이 있어요. 지금은 ‘해와 달’의 국제 부분 이사로 재직하면서 그린 워터 팜의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럼 아들의 직장 동료인 셈이군요.”
“제가 스카웃하려고 찾아갔는데 오히려 스카웃을 당했죠. 아직 어려서 수월하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대국을 보는 눈이 있고 결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친굽니다. 같이 사업할 때는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적이 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죠.”
지재언이 엄지손가락을 튕기자, 배경 스크린 자료 화면이 켜졌다. 이전에 거제도의 타르트 가게에서 찍었던 영상의 일부다.
“임진혁 쉐프님이라면 저도 같이 촬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과묵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애정이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이셨지요. 아드님을 아주 훌륭하게 키우셨습니다.”
거제도에 함께 갔던 임운정이 호오 하고 작은 탄성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다른 패널이 물었다.
“임진혁 쉐프님 말인데 젊은 나이에 엄청나게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세계대회를 최연소로 두 개나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훌륭하게 성과를 내고 있지요. 보통 장인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모습을 보니 대단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미래에 잘될 모습이 보였나요? 될성부른 새싹이었나 아닌가 궁금하네요.”
민병철이 킥킥 웃었다.
“그건 동네 형인 제가 말씀드려보자면, 전혀 아니었어요.”
임운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는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빵집 주방에 들어와서 기구를 건드리다가 화상을 입기도 하고 해서 아예 주방에는 못 들어오게 했죠. 동네 애들하고 싸워서 맞고 들어오기도 하고 때리고 들어오기도 해서 애 엄마가 맨날 사과하고 다니느라 바빴어요. 제과제빵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해서 정신 차린 줄 알았는데 학교 나가면서도 계속 PC방에서 틀어박혀서 게임만 했죠.”
지재언이 놀라서 물었다.
“지금 모습만 봐서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데요.”
“사춘기 지나서 아드님이 크게 변하실만한 사건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그럼 어떻게 그렇게 아들을 훌륭하게-”
“그냥 지가 군대를 갔다 오더니, 갑자기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왔더라고요.”
“아….”
지재언이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 다른 패널이 말했다.
“그럴 수 있겠네요. 제 남동생도 군대에 다녀오더니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고 하더라고요.”
민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대 갔다 와서는 강제로 운동을 당해서 그런지 몸도 좋아지고, 얼굴도 확 펴서 한동안 동네에 소문도 있었어요. 진혁이 저놈은 군대를 갔다 온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전신 성형이라도 받고 온 게 아닌가 하고요.”
“맞아. 보통 군대 가면 새까맣게 타서 오는데 저놈은 오히려 이목구비가 뚜렷해지고 피부도 좋아져서 왔더라고.”
“물 좋고 공기 좋은 데 가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면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 ◈ ◈
임운정과 민병철의 인터뷰는 약 25분가량 지속되었다.
마무리는 병철이가 ‘해와 달’의 해외 지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끝났다.
진희가 킥킥 웃었다.
“병철이 오빠는 저기서 이탈리아 호텔 홍보까지 하고 있네. 언제 봐도 넉살이 좋아.”
하지만 25분 중 10분 이상이 임진혁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병철이 신나서 동네 말썽꾸러기 진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아버지가 최근에 진혁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자랑하는 식이다.
진혁이 턱을 괴었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가 방송의 방향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는데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들한테는 자식 잘 키웠다는 얘기가 최고의 칭찬이야. 아버지도 기분 좋아하고 계실걸.”
“그런가?”
“응, 그러니까 병철이 오빠도 괜히 이런저런 얘기 꺼내면서 맞춰 주는 거지. 부자(父子) 사이가 좋은 거 보여줘서 나쁠 건 없잖아.”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서 방송에 출연한 건 아니잖아? 아버지 가게 홍보도 하고, 아버지 이미지 이야기도 해야 하는데. 초점이 달랐다고.”
“아빠 가게는 손님 더 오면 안 돼. 지금 햇살 노인정 어르신네들이 가면 빵이 다 팔리고 없대. 그래서 아빠가 따로 구워서 배달해줘야 한다고 하더라.”
“단골손님들이 못 온대?”
“한참 전부터 못 왔지. 엄마 샌드위치 가게도 비슷해, 근처에서 온라인 주문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직원도 더 뽑았잖아.”
진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업이 너무 잘 되어도 문제네.”
“뭐?”
“가족들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너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고. 일하느라 너무 바쁘잖아. 결혼식 끝나고 밥 두어 끼 먹은 거 말고는 부모님 얼굴도 못 뵈었어. 너도 지금 태극권 배운다고 오는 거 빼고는 매출 보고서만 주고받고 있잖아.”
진희가 웃음을 터트렸다.
“넌 결혼해서 독립했잖아. 이제 올케님이랑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지.”
미미가 진희에게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부모님을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못 본다는 건 뭔가 잘못됐어.”
“우린 서울 살고 부모님은 소망시에 계시잖아. 서울에서 일하는 20대 성인이 한 달에 한두 번 부모님을 찾아뵙는 건 자주 가는 거야.”
임진희가 지적했다. 진혁이 꺼진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며 멍하니 말했다.
“이제 부모님과 함께 할 시간은 점점 더 줄어 들어가고 있다고. 촛불의 심지가 타들어 가듯이….”
진혁이 갑자기 심각해지자 임진희가 눈을 끔뻑거리다가 물었다.
“우리 지금 극기수련원 와서 촛불 켜놓고 조교쌤한테 이야기 듣고 있는 거 아니잖아. 갑자기 왜 이러냐?”
“지금 네 나이에는 부모님이 평생 건강하시고 그 모습 그대로 곁에 계실 거 같잖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나랑 너랑 동갑이거든?!”
미미가 웃으며 말했다.
“진혁 씨, 그럼 소망시에 집을 하나 더 사죠.”